화도(하) 지은이:민병삼 출판사:아세아 미디어 1 포도청으로 끌려온 연홍은 그날로 전옥서에 갇힌 몸이 되었다. 옛날, 전옥서에 서 당했던 고초의 악몽이 아직도 생생한 마당이라, 연홍은 차라리 혀라도 깨물 어 자결하고 싶었다. 지난번 여옥에서처럼 이번에도 똑같은 고초를 당한다면 일 찌감치 목숨을 끊는 것이 하루가 더 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찌 된 일인지 지난 경우처럼 일반 죄수들이나 윤상범들이 있는 감방에 넣지 않았다. 분위기를 살펴보니 모두가 천주교 신자들인 것 같았다. 신자들만 따로 격리 수 용한 것이 틀림없었다. 연홍은 우선 그것만으로도 다소 위안이 되었다. 내일 당 장 효수를 당할지라도, 지난번처럼 그 마왕인가 뭔가 하는 악독한 여자를 만나 지 않게 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연홍이 갇힌 감방에는 스무 명 남짓한 여자들이 있었다. 늙은이는 세 명뿐이 고, 나머지는 연홍이와 나이가 비슷하거나 아래인 여자들이었다. 그들 모두가 연 홍이처럼 느닷없이 들이닥친 포졸들에 의해서 잡혀온 신자들이었다. 연홍은 포졸들에게 끌려오면서 밀고자가 누구인가를 계속 캐물었으나 끝내 입 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홍경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밤, 연홍이 꾀 를 내어 옥수와 동침하게 만든 것을 알아차린 홍경무가 이튿날 청계옥을 나서면 서 연홍을 노려보던 핏발선 그 눈빛에 이를 보득보득 가는 모습을 곁눈질로 보 았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보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번에 잡혀왔을 때는 이용후가 구출하였지만 이번에는 그가 어더한 방법을 쓰든 석방되가 어려울 것 같았다. 천주교인들이 매일 수십 명씩 처형되는 것만 보아도 탄압이 어느 정도인가 빤히 알수 있는 일이다. 더구나 이용후 자신도 몸 을 숨겨야 할 처지인데,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 놓고 남의 구명운동을 하겠는가. 그러나 연홍은 이용후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원망은커녕 그 사 람만이라도 무사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차피 자신의 운명은 천주님한테 맡겨 진 것이라 생각해 왔기 때문에, 지난번과 같은 두려움은 없었다. 천주님의 부름 에 따른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였다. 어차피 한 번은 죽을 목숨, 하루라도 빨리 천주님 곁으로 가고 싶었다. 이튿날, 이용후는 먼저 변 주부한테 달려갔다. 연홍의 문제를 터 놓고 의논할 사람이 당장은 변 주부밖에 없었다. 그는 이용후 일이라면 곧 자기 일처럼 생각 하는 사람이었다. 변 주부는 이침 일찍 약전 문을 열고 들어서는 이용후의 표정이 잔득 굳어 있 음을 보고 그에게 삼상치 않은 일이 생겼음을 눈치로 꿰ㄷ었다. "이 시각에, 어인 일이십니까?" "너무 일찍 오지 않았나 해서 망설였소이다. 허나, 워낙 화급한 일이라서 예의 를 갖출 마음이 아니었소." "무슨 일이시길래…… 우선, 안으로 드십시오." 이용후는 그가 권하는 자리에 좌정을 하고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무슨말부터 서두로 삼아야 할지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일도 아니고 한낱 기생의 일로, 이른 아침에 들이닥친 자신의 꼴이 우습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 여, 달려올 때의 기분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앗다. "화급한 일이라 하셨는데, 무슨 일입니까?" "청계옥의 연호이가 포도청에 끌려갔다 합니다." "무슨죄를 지었다고 합니까?" "연홍이가 어디 죄나 지을 계집이겠소. 결국 나 때문인 것을." "허면, 진사 어른께서도 연루된 일입니까?" "연호이 천주교를 믿게 된 것이 내 영향이었고, 그로 인해 포졸들한테 끌려간 것이오." "연홍이 천주교 믿는 것을 포도청에서 어찌 알았답니까?" "밀고를 당했다지 않습니까. 주위에, 그런 비루한 인간이 있으니……." 이용후는 홍경무한테 혐의를 두고 있었지만 이렇다 할 증거도 없이 입 밖에 낼 수가 없어, 그저 울분만 씹고 있었다. 어제 말고자를 물었을 때, 계향이 자신 의 느낌을 발설하려다 말고 옥수의 눈치를 살핀 것을 생각하면 그녀 역시 홍경 무한테 의심을 두고 있음이었다. 그러나 증거 없이 남을 의심하는 것 도한 죄라 서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천주교 산자들을 보는 대로 잡아들여 처형한다고 하는 데, 걱정 아닙니까." "해서, 이렇게 달려오지 않았겠소. 연홍이 처형당다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주부께 좋은 방법을 구하려고 왔소이다." "저한테 무슨 방벙이 있겠습니까. 굳이 방벙이라면 도도대장과 다리를 놓는 길 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만……." "허면, 다리 역할을 할 만한 인물이 있소이까? 지난번에는 옥장獄長한테 뇌물 을 주어 빼냈습니다만, 마침 그 사람이 파직을 당해 나한테는 알 만한 사 람이 없소이다." "글쎄요……? 약전에 자주 오는 사람 중에서 포도청 종사관從事官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 사람보다는 혜산 유 숙이 어떨까 합니다. 제가 듣기로는 혜산이 포 도대장과 각별히 지낸다고 합니다." 포도청은 좌우 양청으로 나누어, 종2품에 해당하는 대장을 각각 1명씩 두고 그 밑으로 종사관 3명, 부장部長 4명, 무료부장無料部長 26명, 가설부장加設部長 12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에 종사관은 문관으로 종5품의 벼슬이다. "혜산이 이 같은 사사로운 일에 개입하려고 하겠소? 더구나, 나라에서 금하는 천주교와 연루된 문제인데요. 차라리 종사관이 어떨까 싶소만." "포도대장이란 사람이 워낙 강직한 성품인데다가, 대원군의 심복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종5품의 종사관 말쯤 귀담아듣겠습니까?" "그런 사람이라면, 유 숙도 어렵지 않겠소이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사람이 유 숙의 그림을 많이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그 만큼 돈독한 관계가 아닌가 싶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허면, 혜산한테 부탁을 넣어 주시겠소?" "부탁하는 일이야 어렵지 않습니다만, 기대하였다가 오히려 실망하는 일이 생 길까 염려됩니다." "일이 성사되든 아니 되든, 그것 하늘의 뜻으로 여길 수밖에요." "진사 어른께서도 당분간 조시마시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대원군이 흉흉해 진 민심을 돌려 놓기 위해 온갖 방책을 다 쓰고 있는데다가 나라의 개방을 매우 경계하는 인물이라서, 서양의 종교와 문물이 발붙이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지금 천주교를 탄압하는 것이구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배교할 수는 없지 않소." "배교하시라는 뜻으로 드린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저들이 천주교 탄압을 멈출 때까지만 조심하시라는 말씀입니다." "충언忠言의 말씀을 깊이 간직하겠소이다." 오원吾園은 이용후가 약전으로 달려가는 것을 배웅하고 곧장 유 숙의 집으로 돌아왔다. 유 숙은 마친 도화서에 들어가고 집에 없었다. 만석이가 오원을 보자 왠지 잔뜩 일그러진 표정으로 다가왔다. 언짢은 일이 었었던 눈치였다. "만성이 표정이 와 기러네? 꼭 벌레 씹은 낯짝이잖네." "대체, 어디서 외박을 하고 오는 길이우?" "청계옥에서 자고 왔어. 와우?" "그럼, 기생년하고 동침했단 말이우?" "만석을 오원이 기방에서 잤다는 말에 호기심 반 의심 반으로 침을 꼴깍꼴깍 넘기면 턱밑으로 파곧르었다. 갑자기 돈냥이나 손에 쥐더니 바람을 피우나 싶었 던 것이다. "민하게 굴긴…… 내래 설마 기생하고 잤갔네. 그 집 연홍 아시래 포도청에 끌 려가는 것을 보고 걱정이 돼서 있었어야." "연홍인지 연풍인지 내가 알 바 아니지만, 기생이 잡혀가는데 형님이 왜 나서 서 걱정이우? 정 붙었수?" "뭐이 어드래? 닙으로 뱉으믄 다 말인 줄 아네? 연홍 아시래 얼마나 좋은 사 람인지 네가 몰라서 기래. 그딴 말 함부로 하디 말라우. 또 기랬다가는 내래 혼 내 주갔어." 그래도 만석을 겁을 먹기는 터녕 눈도 꿈쩍 않은 채 여전히 당당하게 굴엇다. 볼에 바람을 잔뜩 불어넣고는 무슨 소린가 한참을 군시렁거렸다. "도대체, 와 기러네? 나한테 불만 있네?" "쳇. 어젯밤, 나으리계서 얼마나 노하셨는지 알기나 하우? 형님이 집에 없다구 나만 날벼락을 맞았잖수." "나으리께서 와? 나를 찾으셨네?" "말도 마우. 형님을 찾아오라 하시는데, 대체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알아야 찾 아오고 말구 하지. 오늘 아침까지도 형님이 없어 더 노하신 것 같습디다. 어쨋 든, 오늘 저녁엔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할 거유." "나를 와 찾으셨을까……?" 오원은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안절부절 못하였다. 그림을 그리기 는커녕 그림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튿날가지 사람을 찾았다면 뭔가 급히 지시 할 일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대체, 어드런 일로 나를 찾으셨을까? 경복궁 일은 더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언질을 주었으니, 그 일로 찾았을 리는 없고……. 생각을 이리저리 굴려도 마당한 추측은 떠오르지 않앗다. 오원이 점심을 먹고 막 자리를 드는데, 누군가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도화서 로부터 전갈을 안고 온 화공이었다. 그는 단청공으로 낯이 많이 익었다. "무슨 전갈입네까?" "장 화공을 급히 데려오라는 유 숙 나으리의 분부요." "와 기럽네까?" "낸들 알겠수? 심부름이나 할밖에. 어여 서둘러야 할 거유." 오원은 영문도 모른 채 서둘러 화공을 따라붙었다. 어제 일로, 꾸중하기 위해 서 사람을 시켜 불러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화공 일을 더 시키 려는 뜻이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들었다.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오원은 갑자기 맥이 빠졌다. 스승이 지시하는 대로 채색만 하는, 그런 무의미한 일에 또 매달려 야 한다면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스승의 분부니 어쩌랴. 도화서 임시 설치소에 당도하자 마침 유 숙이 기다리고 있었다. 오원은 스승 의 눈치부터 살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서 노여움은 볼 수 없었다. "어젯밤에는 어디에 잇었더냐?" "제가 한때 기숙했던 청계옥에 큰일이 생겨서, 이 진사 어른과 함께 있었습네 다." "그건 그렇고…… 내가 너를 부른 것은 지난번에 했던 일을 더 시키려고 그런 것이다. 마땅치 않겠지만, 나를 도와 주어야 되겠다. 이는 내 뜻이 아니라, 대원 위 대감께서 특별히 분부하신 일이니라. 대감께서 일월오악도와 쌍룡을 보시자 크게 기뻐하시고, 이번 일에도 네가 관여하도록 지시하신 것이니 소임을 다해야 할 것이야." "나으리 분부에 따르갔습네다." "오원은 잔뜩긴장한 만석의 얼굴을 떠올리며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만석이가 전하는 대로라면 오늘밤 혼쭐이 날 일이었다. "기럼, 일월오악도를 또 그립네까?" "편전으로 쓰실 사정전에 벽화를 그려야 한다. 이번 그림도 쌍룡이기는 매한가 지나, 근정전 것은 조각품에 채색한 것이지만, 이번 것은 벽화이니만큼 채색에 너의 독자성이 있어야 할 것이야." "기럼, 더욱 좋갔습네다." 오원은 독자성이라는 말에 다소 워안이 되었다. 물론 혼자서 도맡아 하는 것 은 아니지만 작업을 주도하면서 채색에 자기 생각을 넣을 수 있음은 해 볼만한 일이었다. 벽화의 도본을 살펴보니, 근정전의 쌍룡처럼 여의주를 가운데 놓고 서로 차지 하려는 모양이 비슷하엿다. 근정전의 쌍룡은 목조물이라 새밀한 맛이 없어 사실 성이 많이 결여돼 있었다. 그러나 이번 벽화의 쌍룡은 용틀임의 여운에서 볼 수 있는 세밀함이 매우 돋보이는 그림이었다. 무섭게 부릅뜬 눈동자와 벌린 입의 날카로운 이빨, 그리고 상대 몸체를 꿰뚫고도 남을 만큼 날카롭게 뻗은 발톱, 갑 옷 같은 비늘, 싸움에 휘몰리는 운무 따위가 매우 정교하였다. 근정전 것이 조각 으로서는 훌륭했지만, 반면에 용의 기개가 약하게 표현돼 잇어, 역시 그림으로 표현하는 기교를 따르지 못하였다. 색채도 근정전의 것은 거의 황금빛 일생이었 다. 그러나 오원은 이번 벽화에서만큼은 여러 색이 고루 어우러져 한찬하면서도 웅장한 위용이 드러나도록 채색할 생각이엇다. 유 숙은 오원의 복안을 듣고 흡족한 쵸정을 지으면서, 혼신의 힘을 넣어 벽화 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만들라고 격려하었다. 오원은 그날부터 침식을 다시 경복궁 내에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소 임으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오원은 연홍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이용후와 변 주부가 과연 그녀를 석방시킬 수 있을 지 의 구심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마침, 이백냥의 돈은 잉ㅇ후한테 맡겨 연홍을 구명 하는 데 쓰도록 일임하였기 때문에 다소 위안이 되고는 있지만, 돈으로도 해결 이 안 되는 일이 있으니맡큼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은 이제 매 인 몸이 되었으니 그들의 능력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유 숙을 찾아간 변 주부는 용건부터 설명하고 연홍을 전옥서에서 빼낵 수 있 는 방법을 단도직입으로 제안하였다. 그러자 유 숙이 매우 난처한 표정을 지었 다. 변 주부와의 인간관계를 생각한다면 그의 청을 꼭 들어줘야 옳지만, 천주교 와 연루된 문제만은 개입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변 주부가 역관의 직으로 중국 을 다녀올 때마다 유 숙에게 붓이나 벼루 따위를 사 와서 성물하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고가의 중국 서화도 서슴없이 내주었다. 그 우의를 생각하면 그의 청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엇다. 그러나 유 숙 자신은 도화서에 나가면서 나라의 곡을 먹는 입장인데다가 포도 대장의 강직한 성품으로 보아 이미 체포된 천주교인을 빼 달라는 부탁을 감히 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청을 넣는다고 해도 들어줄 포도대장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럴 만큼 그는 공사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어찌하면 좋겠소, 내가 주부의 청을 거절할 처지가 아님을 알지만, 그 분의 강직한 성품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혜산 선생의 입장이 그러하시니, 저 또한 민망할 따름입니다. 인력으로는 아 니 되는 것이니, 혜산께서도 도리가 없는 일 아닙니까. 오늘 애기는 듣지 않은 것으로 접어 두십시오." "미안해서 몸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괘념치 마십시오, 승업이는 어찌하고 있습니까?" 변 주부는 자신이 더 민망하여 재빨리 말머리를 도려 버렸다. 그렇지 않고는 자리가 서먹서먹하여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림이 많이 좋아졌소이다. 그리고, 지난번 근정전 단장 때 내가 데리고 가서 일월오악도의 채색을 맡겼는데, 소임을 훌륭하게 해냈지 뭡니가. 대원위 대감께 서도 승업의 솜씨를 칭찬하시고, 이번 사정전 벽화에도 참여시키도록 친히 말슴 이 계셨소. 그래서 지금은 궁 안에서 침식하고 있습니다." "승업이 대감한테까지 재능을 인정받았다 하니, 매우 기쁜 일입니다. 이 모두 가 혜산 선생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아무리 공을 들여도 재능이 없으면 따라오 지 못하는 법 아니겠소, 게다가 그 아이는 노력을 많이 합니다." "아니오, 앞으로 기회를 보아, 다른 화풍을 배울 수 있도록 더 좋은 선생을 소 개할까 생각 중입니다." "허면, 누구를……?" "아직 마음에 둔 선생은 없습니다만, 차후 적당한 기회에 말씀을 드릴 것입니 다." 변 주부는 유숙의 처지를 이해할 수밖에 없어, 아무 보람도 없이 헛걸음으로 돌아왓다. 이용후가 목이 빠지게 기다릴 것을 생각하니 맥이 빠져 걷기조차 힘 들었다. 이용후의 청을 모르는 체할 수도 있지만, 그의 사람 됨됨이를 생각하면 차마 거절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의 인영이란 마치 고래 심줄 같아서 좀처럼 끊어지기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오원으로 인해 더욱 가까워진 인연이라 두 사 람의 우의는 돈독해질 수밖에 없엇다. 변 주부한테 전후 사정을 다 듣고 난 이용후는 금세 풀죽은 얼굴이 되어 한숨 만 폭폭 내쉬었다. 당장 그럴 듯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담담한 마음 이루 형 언할 수가 없엇다.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옵니까?" "당장은 묘안이 없군요. 마음만 답답할 뿐이오. 정 방법이 없으면, 새 옥장을 찾아가 뇌물로 움직여 볼까 하오만, 그게 통할는지……." "그러자면 돈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마침 나한테 이백여 냥은 있소이다. 내가 마련한 것은 아니지만요." 이용후는 그 돈의 출처를 변 주부한테 설명하면서 오원의 갸륵한 마음을 덧붙 였다. 변 주부도 대강은 알고 있는 일이라 오원을 칭찬하는 데 조금도 인색할 필요가 없었다. "제가 이백 냥을 더 드릴 터이니, 그것으로 힘을 써 보시겠습니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만."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하겠소? 지난번에는 이백 냥으로 신도 여럿을 구아였 소이다."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다를 것입니다. 저토록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보아, 예사롭게 생각해서는 아니 될 듯싶습니다." "허긴…… 그러나, 한 번 부닥쳐 보기는 해야지요. 그래서 아니 되면, 연홍의 운명으로 돌릴 수밖에 도리가 없을 것 같소." "그렇습니다." 이용후는 더 앉아 잇을 필요가 없을 듯하여 서둘러 약전을 나왔다. 그리고는 청계옥으로 발길을 돌렸다. 청계옥 문지방을 넘어서자 안으로부터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호방한 사내들이 온 모양이었다. 이용후는 헛기침으로 안에다 인기척을 들여보냈다. 그러자 계향이 먼저 듣고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나으리. 어서 오시어요. 연홍 아씨 소식은 들으셨사옵니까?" "아직은 감감무소식이니라. 헌데, 안에 손님이 왔더냐?" "네, 나으리. 홍 생원 나으리께서 낯선 손님과 함꼐 계시옵니다." 홍경무가? 이용후는 관자놀이에 힘줄을 세우면서 어금니를 물엇다. 대체 무슨 낯으로 나 타났는지 새삼 상판을 고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증거만 있다면 당장 들어가 요절을 낼 수도 있었다. "나으리." 계향이 갑자기 손님 방 쪽을 흘끔거리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비밀리 할 애기 가 있는 눈치였다. 이용후도 따라서 계향이에게 키를 맞추었다. "왜 그러느냐?" "생원 나으리께서 아씨를 구해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하셨사옵니다." "홍 생원이? 무슨 수로?" "모르겠사옵니다. 그러시면서, 누구든 생원 나으리께 잘못 보이면 신세를 망치 게 된다고 하셨사옵니다." "허허. 정녕 그리 말씀하시더냐?" "이 귀로 똑똑히 들었사옵니다. 정말 믿을 말씀이옵까?" "그야 낸들 알겠느냐. 헌데, 이를 어쩐다?" "왜 그러시옵니까?" "내 오늘도 여기서 유해야 되겠는데, 손님이 있으니……." "무엇이 걱정이옵니까. 어제처럼 사랑방에 유하시면 되지 않사옵니까?" "그렇기는 하다만, 어쩐지 홍 생원과 마주치기가 싫구나." "나으리께서 와 계심을 말씀드리지 않겠사옵니다. 어서 사랑방으로 드시어요. 제가 주안상 올리겠사옵니다." "낭패로구나. 마치 숨어 있는 것 같지 않는냐." "그리 생각지 마시어요." "……그럼, 그리할까?" 이용후는 청계옥에서 밤을 묵고 내일 동이 트는 대로 포도청으로 갈 생각이엇 다. 집에서 자도 돼겠지만, 아내가 특별한 생각을 가질 것이 분명하여 그것이 성 가셨다. 아내가 투기나 하는 여가는 아니지만, 어쨌든 기생의 일로 바삐 나간다 면 그녀 역시 마음이 편치는 않을 것이다. 이용후가 사랑방 쪽을 향해 막 걸음을 떼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사내 목소리 가 "이 진사." 하고 발목을 잡는 것이었다. 뒤를 돌아보니 홍경무였다. "어찌 그냥 가시려고 합니까?" "그저 잠깐 들었을 뿐이외다. 홍 공께서는 그간 편안하셨소이까?" "저야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 이 공께서는 어찌 소일하십니까?" "저도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간 너무 적조한 듯싶으니, 잠시 안으로 드시지요. 마침 소개할 사람 도 있으니." "글쎄올시다. 오늘은 술 생각이 없어서……." 이용후는 마치 누룽지 훔쳐먹다 들킨 머슴처럼 갑자기 무안하여 한참을 전전 긍긍하엿다. 그러자 홍경무가 재차 권유하였다. "계향이는 뭘 꾸물거리느냐?" 나으리를 모시지 않고." 계향이 이쪽 저쪽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 못하였다. 홍경무가 또 호통을 치자 그제서야 이용후 앞으로 쭈뼛쭈뼛 다가섰다. 홍경무가 이용후에게 소개한 사람은 뜻밖에도 포도청의 종사관이었다. 조양복 이라는 이른의 그는 종사관 세 명 중에 하나일 것이다. 아까 변 주부가 말했던 종사관이 바로 이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참으로 우연항 일이었다. 홍경무가 종사관을 소개한 다음 그에게 이용후를 소개하면서 마음에 없는 허 풍을 한참 늘어놓았다. 이용후가 듣기에 민망하여 몹시 불쾌하였다. "홍 공은 사실에 없는 이야기를 어찌 그리도 잘 하시오? 듣기에 몹시 민망하 오." "이 공이 이토록 겸손하신 분이외다. 나하고는 근본붙가 다르지요." "소개는 그만 하시고, 세상 애기나 합시다." 이용후는 그의 실어失語가 듣기 싫어 주먹을 쑤셔 넣어서라도 입을 틀어막고 싶어 안달이 솟았다. 그가 생원에 오를 만큼의 학문을 했다고는 볼 수 없을 만 큼 선비의 체통은 눈꼽만큼도 엿볼 수 없는 언행을 하고 있었다. "헌데 이 공, 연홍의 송식을 들으셨습니까?" "들어 알고는 있습니다만……." "그년의 괘씸함을 생각하면 나 몰라라 할 수도 잇이다. 허나 옛정을 생각하여 그 계집을 구하기로 하였소이다. 이 공 생각은 어떻소?" 말하는 도중에, 그가 이용후의 안색을 자주 살피는 것으로 보아 다른 의도가 있는 것 같았다. 이용후가 말을 받기에 따라서 연홍과의 관계를 확인하거나, 천 주교에 대한 비난을 노골적으로 내놓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시에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사후에 극락에 간다지 않습니까. 보잘것없는 기 생한테 그토록 마음을 쓰시니, 홍 공께서는 틀림없이 극락에 가서 영생을 누릴 것이오." "허허, 빈말씀이라도 듣기에 나쁘지는 않소그려." "헌데, 내가 듣기로는 포졸들 말이 누군가 밀고를 하여 연홍을 잡아간다고 변 명하더랍니다. 우리 주위에 그런 비열한 인간이 있는 것 같으니, 우선 그놈부터 색출하는 것이 어떻겠소?" "그래요? 포졸들이 정녕 그리 말했다 합니까? 세상에, 그런 몹쓸 놈이 있다니 ……. 애 옥수야. 너도 포졸의 말을 들었느냐?" 홍경무가 갑자기 옥수를 향해 얼굴을 돌리며 눈을 부라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옥수가 입술을 바르르 떨며 듣지 못했다고 대답하였다. "허면, 계향이 이년의 입에서 나온 것이렷다?" "홍경무가 특별히 흥분하고 있었다. 마치 계향이 당사자인 것처럼 굴엇다. "홍 공, 우리가 미천한 것들의 귀를 믿어야 옳소이까? 그만 해 둡시다. 천지에 비열한 인간이 어디 한둘이어야 말이지요." "그러자 종사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술이나 들자고 하였다. 그제서야 홍경무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술잔을 들었다. "헌데, 홍 공께서는 연홍이를 어떻게 구하실 수 있습니까? 참으로 재주가 용하 시오." 이용후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묻자 홍경무가 낯빛을 바꿔 술을 연거푸 털어 넣는 것이었다. 이용후의 의중을 알아차려 심사가 꼬이는 눈치였다. "내 힘이라기 보다는, 여기 계신 조 공께서 힘쓰시는 일이오." "허면, 조 공께서는 연홍이라는 계집을 틀림없이 빼낼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글쎄올시다. 홍 공께서 하도 부탁을 하시길래 포도대장한테 청을 넣기는 하겠 습니다만,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오. 그년이 혹 배교를 한다면 일이 쉬워질 수는 있지만." "배교를 하지 않는다면 구하기 어렵다는 말씀입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지금으로스는 그리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러자 홍경무가 갑자기 낭패한 얼구이 되어 옥수를 시켜 술과 안주를 더 가 져오게 하였다. 이용후는 자신없는 그 속내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홍경무가 갑자기 화살을 이용후에게 돌렸다. "듣자 하니, 이 공께서도 천주교를 믿으신다지요?" "이용후는 망설일 것도 없이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종사관이 끼여들어 사실이냐고 물었다. 이용후는 주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허면, 그 계집한테는 곧 전교자傳敎者가 되겠습니다?" "그렇소이다." 종사관이 왠지 매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스스로 술을 따라 연거푸 마 시는 것이었다. 홍경무가 당황한 얼굴로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오늘, 이공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소이다." 그리고는 한숨을 거푸 내쉬었다. 2 이용후는 청계옥에서 아침을 뜨고 바로 포도청으로 달렸갔다. 계향이가 따라 나서겠다고 애원하는 것을 간신히 떼어 놓았다. 포도청에 가서 연홍이를 만날 수 있다는 포장이 없어, 울고불고하면 낭패스럽기만 할 것 같았다. 그 동안 두 여자가 맺은 정분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들의 정분에 묶일 여유가 없 었다. 화급한 것은 연홍이를 포도청에서 빼내는 일이었다. 어제, 홍경무가 연홍이를 구할 수 있다고 장담한 것은 종사관 조양복을 믿고 한 소리지만 결국 흰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였다. 종사관의 의중을 짐 작하건대, 그의 힘으로도 매우 어려울 것 같았다. 홍경무가 그에게 향응을 베풀 어 코를 꿰겠다는 술수였지만 이용후가 보기에는 그 정도에 넘어갈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포도청 앞에는 안에 갇힌 사람들을 면회하기 위해 그 가족들로 붐비고 있었 다. 개중에는 연홍이처럼 잡혀온 죄수들을 만나기 위해 온 무리도 있었다. 그러 나 천주학쟁이는 절대 면회할 수 없음을 아예방으로 붙여 놓았다. 이용후는 포졸에게 다가가 대뜸 옥장을 만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포졸이 이 용후를 훑어내리며 용건을 대라고 하였다. 그 어투가 매우 퉁명스러웠다. 지난번 에는 약조가 돼 있다고 둘러대어 그냥 통과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림도 없 는 분위기였다. "옥장에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네." "드릴 말씀이 무엇인지, 용건을 대라고 하지 않았소?" "어허. 이런 무례가 있나. 사사로운 애기를 포졸한테 고한단 말인가?" "허면, 옥장과 약조가 있었소이까?" "그렇지는 않네." "용건도 대지 않고 약조도 없었다면, 들어갈 수가 없소이다. 포도대장 나으리 께서 출입자를 철저히 통제하라 하셨소이다. 그러니 돌아가시오." 지난번, 옥장을 쉽게 만났던 경우와는 상황이 매우 달랐다. 포졸들이 일반 죄 수들의 면회자를 들여보내면서 낱낱이 기록하는 것을 보아도 전과는 사뭇 달랐 다. 천주교인들에 대한 감시를 철저히 하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이용후 처지로는 그냥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포졸들이 너무 완강하여 특별한 수를 마련하지 않고는 출입이 불가능하였다. 그들에게 돈냥을 쥐여 주는 방법도 한순간 생각하였으나, 주위 이목이 많은데다가 괜히 허튼 수작이 되어 양반 체 통만 깎이는 꼴이 될 것 같아 금세 기가 죽어 버렸다. 이용후는 맥없이 서서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 등청할 시간이 되었는 지 관원들이 줄지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이용후는 어제 만났던 종사관 생각이 났다. 그 역시 이 시간에 등청할 것이 분명했다. 물에 바지면 지 푸라기라고 잡는다고, 친분은 없지만 이 판에 그라도 붙들고 사정을 해 보는 편 이 옳을 듯싶었다. 이용후는 등청하는 관원들 틈으로 조양복을 찾아 내기 위해 목을 이리 뽑고 저리 뽑고 하였다. 웬일인지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등청을 한 것인지 아니면 더 늦게 등청할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어 애간장만 탔다. 잠시 후 마지막인 듯싶은 관원 하나가 바븐 걸음으로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틀림없이 조양복이었다. 이용후는 급히 그에게 다가가 길을 가로막았다. "안녕하시오. 어제 인사 나눈 이용후올시다." "이 공께서 여긴 웬일로……? 오오라. 연홍인가 뭔가 하는 그 기생을 보러 오 셨구료." "그것이 아니라, 조 공께 부탁이 있어 왔소이다." "어제 애기를 다 하지 않았소? 아직 포도대장을 뵙지도 못했소이다." "허면, 그분께 청을 넣으실 생각이십니까?" "실은 어려울 것 샅소이다. 홍 생원이 간곡하게 부탁은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무리일 것 같소. 나라에서 엄히 다스리는 문제라서 함부로 입을 열 일이 아닐 것 같아서요." "조 공께 부탁드릴 말씀은 다름이 아니라, 옥장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을 해 달라는 것이외다. 포졸들이 굳이 용건을 대라면 출입을 통제하고 있으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어야지요. 해서 조 공을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부질없는 생각입니다. 그 문제라면 옥장도 만나 주지 않을 것입니다." 예상한 대로 그의 견해는 부정적이었다. 이용후는 입에 뜨거운 숯덩이를 물고 있는 것처럼 침이 모두 말라 버렸다. 조바심이 나서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조 공. 옥장을 만날 수 있게만 해 주시면, 나머지 일은 제가 알아서 할 것입 니다. 그러니……." "이 공, 혹시 옥장한테 뇌물을 줄 생각이시오? 만에 하나, 그런 뜻이라면 생각 을 거두는 것이 좋을 듯싶소이다. 포도대장께서 각별한 훈령을 내리신 바 있어 옥장도 일언지하에 거절할 것이 분명합니다. 자칫, 이 공의 체통만 깎이는 일이 될 것이오. 뿐만 아니라 이 공이 천주교를 믿는 걸 눈치채는 날에는 그 자리에 서 하옥시킬지도 모르는 일이구요." "그거야 숨기면 되지 않겠소? 우선, 사람부터 살리고 볼 일 아닙니까?" "어제의 그 당당함은 어찌하고요? 그건 배교가 아니던가요?" 이용후는 조양복의 어조가 충고인지 비아냥인지 얼른 가늠할 수가 없었다. 어 제 이용후를 앞에 두고 서로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그의 마지막 얘기를 떠올 리면서, 방금 그가 뱉어 낸 여러 말들이 가슴을 압박하였다. "이 공과의 연을 생각해서 말씀드리오만, 이 일에서 손을 떼심이 좋을 듯싶소 이다. 그리고 각별히 조심하셔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시대를 잘 읽어야 될 줄로 압니다." "조 공의 충고 고맙소이다. 그러나……." "저는 길이 바빠서 이만……." 조양복은 말을 싹뚝 잘라먹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총총히 사라졌다. 이용후 는 닭 쫓던 개가 지붕을 올려다보는 격으로 그의 뒷모습만 망연하게 바라볼 뿐 이엇다. 물 위의 수결手決(서명)이로구나. 이용후는 타박타박 되돌아가면서 눈물을 꾸역꾸역 밀어 냈다. 오로지 절망적 인 생각만이 앞을 가려 걷기조차 힘이 들었다. 연홍아. 너와 함께 죽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연홍이 천주학을 배우고 싶다고 했을 때, 그의 생각을 막았어야 옳았다. 그랬 더라면 그녀가 천주교에 입교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오늘 같은 불행한 일은 당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잉ㅇ후는 자책감에 빠져 가슴에 천근 쇳덩이를 안고 가는 마음이었다. 홍경무가 정말 밀고자라면, 연홍이만 밀고할 것이 아니고 차라리 자 신도 포함시켰더라면 이보다는 덜 괴로웠을 것이다. 이용후는 변 주부 약전을 저만치 바라보면서 더욱 맥이 풀어졌다. 두 사람이 정성과 노력을 다했는데도 아무런 보람도 얻지 못했으니, 이젠 기댈 곳이 더 없 게 돼 버렸다. 조선 천지에 변 주부만큼 매사 우호적이고 배려가 세심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과 힘을 합쳤음에도 보람을 얻지 못했으니 이제 무슨 희망이 있으랴 싶어 절망 도 절망이었다. 연홍아. 천주님의 뜻으로 점어 두기에는 너무 안타깝구나. 연홍이 포도청에 끌려간 지 닷새 가 지났는데도 종무소식이라. 계향은 애를 바작바작 태우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이용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 어, 자꾸 불길한 생각 속으로 파묻혔다. 연홍을 꼭 구해 내겟다고 홍경무가 큰소 리 뻥뻥 쳤으나 계향은 처음부터 믿지를 않았다. 허풍쟁이에다가 기회만 닿으면 계짐 치마 들추는 일에만 몰두하는 그를 미덥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양반 가문 에도 그런 말증末症의 인간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그런 양반이라 면 심지 깊은 천민만도 못한 것이다. 그러한 주제에, 기생을 천한 여자라고 함부 로 대하는 꼴이 더없이 가소로웠다. 이런 와중에, 어쩐지 옥수만이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계향을 비롯해서 찬 모와 어린 상노까지도 연일 침울해 있는데, 오작 옥수만이 태연자약하여ㅆ. 계향 은 그 속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의심스럽기까지 하였다. 옥수는 연홍이 그리 된 것을 안타까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에게는 잘된 일인 것처럼 여기는 낯빛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치 자기가 연홍의 자리를 이러받은 것처 럼 행새하며 전에 없이 당당하게 구는 것이었다. 저년이 흉계를 꾸몄는지도 몰라. 계향은 얕은 머리를 굴려 이리저리 후리를 하였다. 홍경무가 연홍이 천주교 믿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옥수와 특별히 밀착된 이후였고, 그래서 그가 연홍에 게 노골적으로 협박하기 시작했고, 홍경무가 술상을 받을 때마다 오로지 옥수만 끼고 있었다. 그렇게 둘이만 붙어서 온갖 흉계를 주고 받았을 수도 있다는 추측 쯤은 쉽게 할 수 있었다. 옳아. 그럴지도 몰라. 계향은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치면서 볼을 바르르 떨었다. 이때 옥수가 계향 의 모습을 한참 동안 훔쳐보고 있었다. "비 맞은 중놈처럼 혼자서 뭘 그리 중얼거리니?" 계향은 옥수에게 속내를 들키기나 한 것처럼 화들짝 놀라서 냉큼 등을 돌렸 다. 그러자 옥수가 다가와 계향의 손목을 낚아챘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도 좀 알자구나." 흥.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더니, 요년이 속이 켕기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어요. 연홍아씨 불쌍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걸요." "정말?" "미덥지 않으면 내속을 까 보구료." "내가 왜 계향의 말을 믿지 않겠니. 우리가 한솥밥 먹은 햇수가 그새 얼만데. 안 그러니?" "그렇구말구요." "헌데, 연홍 아씨가 그리도 보고 싶니? 기특도 하구나." "그럼, 옥수 형님은 아씨가 그립지 않아요?" "얘는? 낸들 왜 보고 싶지 않겠니. 그러나 형님의 운명인 걸 어쩌겠니. 형님이 이렇게 된 발단이 이 진사 어른한테 있다는 걸 너도 알아야 해. 그 분만 아니었 더라면 형님이 왜 천주학쟁이가 됐겠으며 포도청에는 왜 갇혀 있겠어. 너도 아 다시피 홍 생원께서 형님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고 계시니까,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다. 그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겠구나. 그 동안은 내가 머리니 까,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요년아. 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계향은 어금니를 잔뜩 깨물어 찬 바람이 일 만큼 록수로부터 휭하니 등을 돌 렸다. 그러자 옥수가 계향을 다시 불러 세웠다. "내달부터 급을 올려 줄 터이니, 손님들을 더 잘 모셔야 한다. 손님들 중에서 도 홍 생원 나으리는 특별한 분임을 잊어서는 안 돼. 알았지?" "급을 옥수 형님 마음대로 올려도 되는 거예요? 연홍 아씨도 아니 계시는 마 당에." "내가 알아서 하는 일이니 너는 손님 접대나 잘 하면 되는 것이다." "급 올려서 마다할 사람은 없겠지만 연홍 아씨가 아니 계시니, 그다지 기쁘지 가 않네요." "어쨌든, 너는 내 말만 따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다짐해 둘 것 이 있다." "뭐예요?" "형님을 밀고한 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공연히 나를 위심하거나 생원 나으 리를 마음에 두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증거도 없으면서 남을 의심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내가 언제 옥수 형님을 의심했다고 그러세요? 더구나 언감생심 생원 나으리 를 의심하다니요? 나는 그런 적 없어요." "……그러면 됐다." 저년이 제 발이 저린 거야. 떡갈나무에 회초리 나고 바늘 간 데 실 따라간다 는 속담도 모르는 모양이지? 똥 싼 주제에 매화타령 한다더니……. 계향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 냉수를 독째로 마셔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다. 옥 수의 음흉한 속을 홀랑 까 보았으면 평생 원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 는 매일 화증이 나서 명대로 못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 급을 올려 주겠다구? 이 떡 먹고 말 말아라 이거지? 이년아. 속 그린 년 개가 먼저 안단다. 오원은 사정전 벽화를 그리면서도 마음은 온통 연홍한테 가 있었다. 이용후 노력으로 지금쯤 집에 와 있는지, 아니면 여태 포도청에 갇혀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벽화가 완성될 때까지는 대궐을 떠나지 못한다는 도화서의 엄명이 내려져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누구든 그녀의 소식을 전해 주면 좋으련 만 그럴 만한 사람도 없었다. 있다면 유 숙뿐인데, 그가 기생 따위의 소식이나 물어다 줄 사람은 아니었다. 밤을 틈타서 살짝 빠져나가면 되겠지만 그래봤자 순라군한테 잡힐 것이 뻔하니 궁금해도 도리가 없었다. 대궐에서 청계옥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지만, 장안의 중심지라 순라군이 특별히 순찰을 돌고 있어 나가면 걸리기 십상이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잠시 쉬고 있는데, 갑자기 유 숙이 다가왔다. 놀라서 발딱 일어서자 유 숙은 오원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고 벽화 쪽으로 가 진척 상황 만 확인하였다. "힘이 드느냐?" "아닙네다. 잠시 쉬고 있었시요." "그런데, 승업아." "네, 나으리." "한때 청계옥이라는 기방에 머문 적이 있었다고 했느냐?" "어릴 적에 잠시 있었시요. 와 기러십네까?" 오원은 청계옥이라는 말에 혹시 연홍의 소식을 들을까 싶어 귀가 솔깃하였다. 가슴을 졸이며 유 숙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며칠 전에 변 주부가 다녀갔느니라." "주부 어른께서 와 다녀가셨습네까?" "음…… 청계옥에 연홍인지 무었인지 하는 기녀가 있었더냐?" "네, 나으리." 유 숙의 입에서 연홍의 이름이 떨어지자 오원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 았다. 그에게서 연홍의 소식을 듣게 될 것이 분명하였다. 입 안이 바작바작 타기 시작했다. "그 계집이 천주학쟁이더냐?" "네, 나으리. 기래서 포졸들이 와서 잡아갔습네다." "변 주부가 나를 찾아온 까닭은 그 계집을 포도청에서 빼낼 방법을 강국해 달 라는 것이었느니라. 허나,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하고 있으니 낸들 무슨 수를 내 겠느냐." "기래서 어드렇게 됐습네까?" "변 주부의 부탁이 매우 갈금한 것 같았지만, 나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느 니라. 담담하지만 그냥 돌아갈 수밖에." "기럼, 연홍아씨래 아직도 포도청에 갇혀 있습네까?" "글쎄다. 다른 사람한테 줄을 대지 못하였다면 아직 갇혀 있겠지." "천주교 믿는 사람은 잡아다 모두 죽인다고 했시요. 기렇다면, 연홍 아씨도 죽 게 됩네까?" "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 계집 역시 죽을 수밖에 더 있겠느냐? 어쩌다가 천주 학쟁이가 되어 고초를 사서 하는지 모르겠구나." "오원은 그만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자 유 숙이 어안이 벙벙해 오 원을 물끄러미 내려보고만 있었다. 오원은 벌써 눈물을 흘리며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네가 애태울 일이 아니잖느냐? 비록 한때 연을 맺기는 했어도 한낱 기생에 불과한 계집인데 왜 그리 마음을 쓰느냐." "나으리. 연홍 아씨래 제가 배를 곯고 있던 시절에 은인입네다. 밥 배불리 먹 게 하고 따뜻한 잠자리까지 준 은인이야요. 제가 어드렇게 마음을 쓰지 않갔습 네까." "네 충정은 이해한다만, 나라에서는 중죄인으로 보고 있음을 알아야 해." "나으리. 연홍 아씨를 구할 방책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라요." 오원은 유 숙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애걸하였다. 그러자 유 숙이 오 원으로 부터 등을 돌려 혀만 차고 있었다. "나으리. 제 소원을 한 번만 들어주시라요." "어허. 이런 변이 있나. 이놈아, 방책이 없었으니까 변 주부가 그냥 돌아가지 않았겠는냐." "안 됩네다, 안 됩네다. 연홍 아씨래 죽으면 안 됩네다." "허면, 따라 죽을 작정이더냐? 미욱한 놈 같으니라구." "나으리……." 오원은 무릎을 꿇은 채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화공들의 시선이 여 기저기서 모여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원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울음을 멈추렸다. 어찌 된 놈이 계집이 죽을 때마다 초랭이 방정이냐. 몇 해 전에도 이 부사 딸이 죽자 이 꼴이더니, 또 그 짝 났구나. 당장 눈물을 넣으렸 다. 잠시 후면 대원위 대감께서 행차하실 것이야." "대감이래 중요치 않습네다." "어허 이놈이? 입을 잘못 놀리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야. 네놈이 감히 대감 을 능멸해?" 유 숙이 소리를 크게 내지는 못하고 눈만 호랑이처럼 부릅떠 오원을 곧 삼킬 듯이 노기를 품었다. 그러나 오원은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나으리. 제발 연홍 아씨를 살려 주시라요." "어허, 그래도? 큰 변 당하지 전에 냉큼 벽화앞에 섰거라." 그제서야 오원이 마지못해 일어나 벽화 앞으로 어기적어기적 다가섰다. 그러 면서도 울음을 멍추지 못하고 계속 어깨를 들썩댔다. "미욱한 놈 같으니…… 정이 많은 것도 탈이로다." 유 숙은 오원의 꼴을 더 보고 있을 수가 없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예 얘기를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오원이 그토록 마음 쓸 일이라 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저 놈 성격에 일이나 저지르지 않을지……. 몇 해 전, 이응헌 부사의 딸이 죽었을 때를 상기하면서 유 숙은 마치 맷돌에 눌린 것처럼 가슴이 담담하였다. 감정이 극에 달하면 큰일을 저리르고도 남을 사람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그날 밤. 오원은 그 동안 아무 뜻 없이 안면을 익혀 온 한 포졸에게 접근을 시도하였 다. 그는 나이가 비슷하여서 접근하기가 비교적 수월했다. "밤마다 고생이 많습네다." "하는 수 없지 않소. 화공도 고생이기는 마찬가지 아니오?" "기래도 김 포졸보다는 고생이 덜하디요. 우선 이것 받으시라요." 오원은 다짜고짜 그의 주머니에 돈 다섯 냥을 쑥 넣었다. 이용후한테 이백 냥 을 건네 주고 남은 돈 중의 일부였다. 그가 주위를 살피며 무엇이냐고 물었다. "얼마 되지는 않디만, 나중에 술이나 한잔 하시라요. 그 동안 낯도 익었고 성 품이 좋아서 거냥 드리는 거야요." "그렇다고 이렇게 큰돈을……." 그는 누가 볼까 봐 전전긍긍하면서도 매우 흐뭇해 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오 원은 이때가 좋은 기회다 싶어 본론을 꺼냈다. "실은, 김 포졸한테 부탁이 하나 있시요." "말씀하시오. 어렵지 않은 거라면 들어줘야지요." "내래 근정전 작업 때 전염병을 앓았댔시요. 기런데 또 머리가 아프고 설사를 자꾸 하디 뭡네까." "어허. 돌림병이라면 빨리 약을 드셔야 되겠소." "여기 약은 잘 듣디 않아요. 기래서 부탁하는 기야요. 종로에 가면 아주 용한 약전이 있는데, 이 시간에 내래 혼자 나가면 순라군한테 낭패를 당할 것이 뻔하 니까니, 김 포졸이 약전까지 동행 좀 해 주시라요." "글쎄……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화공은 바깥 출입을 못하게 하잖소." "밤인데 누가 알겠습네까?" "허긴, 잠잘 시간이니까. 그럼 빨리 다녀오도록 합시다. 나도 마음을 놓을 처지 는 아니지만, 장 화공의 부탁이니……." "고맙습네다. 나중에 사례는 톡톡히 하갔시오." "사례까지야 뭐……." 이렇게 해서 오원은 포졸을 대동하고 변 약전으로 달려갔다. 변 주부한테 가 면 연홍의 근황과 전망을 알 수 있을 것 갔았다. 위험하지만 이렇게 꾀를 쓰지 않고는 연홍이 죽었다고 해도 소식을 듣지 못할 것이다. 도주에 순라군을 두어 차례 만났지만 포졸을 대동했기 때문에 그들도 전혀 문 제삼지 않았다. 예상한 대로 약전의 문의 굳게 닫혀 있었다. 오원은 예의 갖추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무작정 문을 두드렸다. 한참 만에 사동이 부시럭대며 나와 문도 열지 않은 채 누구냐고 짜증을 부렸다. "내래 승업이야. 급한 일이니까니, 날래 문 열라우." "남 곤히 자는데……." 비로소 문이 열렸다. 오원은 포졸을 세워 둔 채 안채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그 러자 사동이 한밤중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투덜거렸다. "나으리, 나으리."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도 안에서 응답이 없었다. 변 주부가 깊은 잠에 빠진 모 양이었다. 서너 차례 연거푸 불렀다. 그러고도 한참 만에 변 주부가 불을 들고 나왔다. 오원은 대뜸 큰절을 올리고 찾아 온 까닭을 말했다. 변 주부는 기가 찬 듯 엎드려 있는 오원을 멀거니 내려보기만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밤중에 숨어 나와?" "용서하시라요. 허지만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시요." "네 마음은 알겠다만, 지금으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느니라. 진사어른께서도 백 방으로 노력을 하고 계시니까, 가서 기다리거라. 무슨 소식이 있으면 내가 전하 도록 하마." "나으리. 제발 연홍 아씨를 구해 주시라요." "내가 장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느냐? 허니, 어여 돌아가거라. ㅇ사람들이 알면 중죄를 면치 못할 것이야." "기럼 나으리만 믿고 가갔습네다. 안녕히 계시라요." 3 연홍이 결국 처형된다고 한다. 그 정보나마 입수할 수 있었던 것은 종사관 조 양복이 날짜를 미리 알려 줬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홍경무가 연홍을 빼 내겠다고 장담한 것은 허풍이었고, 조양복 또한 포도대장을 만나지도 않았다. 이용후는 변 주부의 전갈을 받고 한달음으로 달려왔다. 사색이 되어 뛰어든 그를 변 주부가 침통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눈인사만 나누고는 오랬 동안 말없이 천장만 올려보았다. 기막힌 사실에, 무슨 말을 서두로 내야 할지 모 르는 표정이었다. 한참 만에 변 주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진사 어른의 충격이 크실 줄로 압니다." "지금의 심정을 어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소이다. 연홍의 운명이 꼭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인지…… 오로지 자책감만 들 뿐이오." "연홍이 이리 된 것을 어찌 나으리 탓으로만 돌리십니까. 말씀대로 그 사람의 운명이라 여기심이 옳을 듯싶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ㅁ가 내 탓이오. 내가 전교를 하지 않았다면 연홍이가 왜 목숨을 잃겠소. 다 내 탓입니다." "이용후는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몸을 흐느적거리며 도리질을 하였다. 도무 지 어떠한 생각으로도 자책감은 지울 수가 없었다. 때로는 천주를 원망하기도 하였다. 전지전능한 천주가 어찌하여 연홍이와 같은 선한 인간을 악마들에게서 구해 주지 않는지 원망스러웠다. 어디 연홍이뿐인가. 김후안을 비롯해서 베르뇌 신부 등 많은 순교자들이 처참하게 죽는데도 아무런 능력을 보여 주지 않고 있 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천주가 임간의 죄를 용서하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내려보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였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를 용서하였고 누구를 구원했다는 말인가. "언젠가 나으리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주교인들은 영생한다고 아니 하셨습니까. 허면, 연홍이도 그리 될 것입니다.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아니오 아니오. 다 부질없는 믿음인 것 같소." "지금으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연홍이 사후의 문제를 생각하심이 옳을 듯싶습니다만……." "한 많은 인생, 죽으면 양지 바른 곳에 묻어 주는 일밖에 더 있겠고.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소이다." "허면, 내일 사형터로 가실 작정이십니까?" "당연하지 않겠소? 밤이 되기를 기다려 시신을 거둬야지요." "나으리 혼자서 그 일을 어찌하시겠습니까?" "……."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며칠 전에 승업이가 다녀갔습니다." 변 주부는 승업이가 한밤중에 포졸을 대동하고 경복궁을 빠져나왔던 이야기를 설명하였다. 그러자 이용후가 놀라 아연실색을 하였다. "그래서요?" "연홍이한테 소식이 있을 경우, 꼭 기별을 해 달라고 당부를 하였습니다. 그래 서 억지 약조를 하여 돌려 보냈습니다." "그 아이가 철이 없는 것인지 생각이 깊은 것인지 원……. 지난번 이 부사 딸 이 죽었을 때도 엉뚱한 짓을 하지 않았습니까. 연홍이 소식을 알면, 이번에도 그 아이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일입니다." "저도 그 생각을 아니 한 것은 아니지만, 나으리께서 혼자 감당하시기 어려우 실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승업이를 대동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대원군의 최대 사업이 경복궁 중건에 있는데, 중차대한 소임을 맡은 사람이 어찌 자리를 뜰 수 있겠소이까. 큰 화를 당할까 우려됩니다." "승업이 특별이 정이 많아서 눈앞에서는 차마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연홍이 사후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할 것이니 과히 염려 마십시오. 나름대로 방 법을 구할 것입니다." "제가 직접 나설 수는 없고, 나으리께 무엇을 도와 드리면 좋겠습니까?" "더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소이다." 이용후는 약전을 나와 바로 청계옥으로 갔다. 청계옥 문턱을 넘어서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계향이 쪼르르 달려왔다. 이미 그녀 눈에 눈물이 찰랑 찰랑 고여 있었다. 이용후는 계향이 새삼 기특하게 느껴졌다. 선머슴처럼 굴던 어린아이가 그새 스무 살이 넘어 이젠 어른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을 다 품고 있 는 것이 대견하였고, 한편 가련하게 보이기도 하였다. 이제껏 연홍이만을 의ㅈ며 살아왔던 삶이 그녀가 곁에 없음으로써 깊은 낭패감에 빠져 있을 것이다. "목이 빠지도록 나으리를 기다리고 있었사와요. 우리 아씨는 어찌 되었사옵니 까? 곧 풀려나시게 되어요?" "글쎄다…… 실은 나도 답답한 중에 있는니라." 이용후는 계향의 초조한 얼굴을 보자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어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데도 계향은 턱밑으로 파고들어 마치 이용후한테 시비 라도 걸 것처럼 묻고 또 묻는 것이었다. 이용후는 어찌할 바를 몰라 막막하였다. 연홍이 처형된다는 사실을 말했다가는 계향이 혼절할 것이 분명하고, 어차피 알 려질 일인데 마냥 숨기고 있을 수도 없고……. 그는 또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황 서방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뒤뜰에서 장작을 뽀개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왜 그러시옵니까?" "너는 알 것 없고……." "오라고 이를까요?" "허면, 잠시 사랑방으로 들라 이르겠느냐? 그리고 너는 주안상 좀 간단하게 차 려 오도록 하고." "네, 나으리" 이용후는 사랑방으로 들어가서도 벽만을 응시한 채 망연하게 앉아 있었다. 이 젠 청계옥에 더 올 일도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그 동안 출입하면서 있었 던 갖가지 추억들이 실바람처럼 불어와 마음을 더욱 울적하게 하였다. 청계옥은 홍경무에게 느닷없이 끌려와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그때 비로소 연홍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비록 기생이기는 하지만 인물이 특별히 빼어난데다 가 예의범절이나 문장이나 양반집 규수나 다를 바 없어, 사내들 중에서도 특히 한량이면 누구나 그녀를 품고 싶은 마음이 들 만한 여자였다. 이용후는 때로 끼니가 온데간데없을 만큼 가난한 선비 주제에도 불구하고 그 때부터 청계옥 출입을 자주 하였다. 그녀의 도타운 인정이 그의 발걸음을 이리 로 돌려 놓았다. 그가 주안상을 받을 때마다 화대는커녕 술값도 받지 않았다. 외 상값명목으로 간혹 엽전 몇냥 내놓아도 결코 받으려고 하지를 않았다. 어느 구 구도 처가에 가서 그런 대접 받기 어려울 만큼 항상 융숭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내 집이려니 생각하십시오." 할 뿐이었다. 연홍이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다니 ……. 천주님. 이리 무심하실수는 없습니 다. 이용후는 눈물이 그렁그렁하면서 연홍에 대한 그리움이 엿물처럼 흘러내려 가 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나으리. 찾아계시옵니까? 황 서방이옵니다." "……어서 들게." 이용후는 황급히 눈물을 닦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황 서방은 문을 열고도 차 마 들어오지를 못하고 툇마루 끝에 무릎을 붙인 채 엉거주춤 서 있었다.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안으로 들게." "예, 나으리." 황 서방이 안으로 들어서자 곧 이어 계향이 주안상을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술상을 내려놓고도 선뜻 나가지 않고 마냥 앉아 있었다. 그러면서 무슨 낌새를 차린 것처럼 곁눈질로 이용후 눈치를 자꾸 살폈다. "계향이는 잠시 나가 있도록 해라. 황 서방과 긴히 할 애기가 있어서 그러느니 라." "……네, 나으리." 계향은 매우 서운하고 궁금한 여운을 내려놓고 물러갔다. 비로소 이용후가 술 상으로 다가앉았다. "내일 저녁에 나랑 갈 곳이 있네." "어디를 말씀하시는지요?" "……서대문 밖일세." "서대문 밖이라 하오면……?" 이용후는 고개를 꺾고 술을 거푸 두 잔이나 따라 마셨다. 그리고는 잔을 황 서발에게 내밀었다. "사형장이야." "방금 사형장이라 하셨사옵니까?" "……그렇다네." 이용후는 그제서야 연홍에 대한 사실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러자 황 서방이 놀라서 "사실이옵니까, 사실이옵니까?"만 반문하였다. 이용후는 죄인이 된 마음 으로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이 얘기는 당분간 함구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지만, 미리 알면 집안이 시끄럽지 않겠나." "어이구, 불쌍한 우리 아씨." 황 서방이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며 방바닥을 쳐 댔다. 이용후는 그 모습을 바 로 볼 수가 없어 눈길을 천장에 걸어 놓았다. 황 서방이 오래도록 울음을 그치 지 않았다. 이용후로서는 몹시 민망하였지만 차마 말릴 수가 없었다. 그들대로 쌓인 정을 생각하면 이용후만 오직 죄인이었다. 오원은 벽화에 채색을 하면서 연신 유 숙의 안색을 살폈다. 어제부터 품고 있 었던 생각이라, 그에게 털오 놓을 기회를 이제나 저제나 노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품을 생각은 뻔한 것이었다. 연홍의 소식리 궁금하여 참고 있을 수가 없었 다. 연홍에게 특별한 일이 생기면 변 주부가 기별하겠다고 역속은 하였지만 마 냥 기다릴 수가 없었다. 유 숙이 등을 돌려 자리를 뜰 기미가 보이자 오원이 앞을 가로막았다. "나으리께 청이 있습네다." "청이란 게 무엇이더냐?" "오늘 저녁에 밖을 나가도록 허락해 주시라요." "어디를 갈 것이냐?" "……청계옥에 다녀오갔습네다." "거기는 무슨 일로 가느냐?" "연홍 아씨가 궁금해서 기럽네다." "그 아이 일이라면 포도청엘 가야지 거기는 가서 무슨 소용이냐." "포도청에는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합네다." "기방에 가도 소식을 알 수 없을 것이야." "나으리. 허락해 주시라요. 내일 아침 일찍 돌아오갔습네다." "생각 좀 해 보자꾸나." 유 숙이 일단을 그렇게 미루었지남 마음속으로는 이미 내락하고 있었다. 오원 의 성격으로 보아 허락하는 것이 좋을 듯싶었다. 발을 묶어 놓을 경우, 몰래 빠 져나가고 말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응헌의 딸이 죽었을 때를 회상하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성격이었다. 해질녘, 유 숙이 돌아와 내일 아침에 꼭 돌아올 것을 약속받고 오원의 외출을 허락하였다. 내내 마음을 졸이고 있던 오원이 매우 기뻐하였음은 물론이다. "궁을 빠져나온 오원은 한달음으로 청계옥에 도착하였다. 마침 계향이와 미욱 이 ㅌ마루에 앉아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화가 선샌이 여긴 웬일로 오셨수?" 계향이 반가운 마음을 짐짓 비아냥으로 드러냈다. 오원은 그러거나 말거나 대 뜸 연홍의 소식부터 다그쳤다. "나도 아씨 소식을 몰라서 하루하루가 답답해요." "기럼, 아씨 소식을 아무도 모른단 말이네?" "그러니까 답답하다는 거 아니오." "이 진사 나으리께서도 전혀 모르시네?" "그러신가 보우. 나으리는 지금 사랑방에 계시우." "뭐야? 나으리래 오셨네?" 오원은 계향의 말을 더 들어 볼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 길로 사랑방으로 달려 갔다. 그러자 계향이 따라붙어 승업의 소매를 낚아챘다. "와 기러네?" "나으리는 지금 주무시고 계시다우." "기래도 마음이 급해야." 오원은 계향의 손을 뿌리치고 문 앞으로 다가ㄱ다. 계향의 말대로 이용후가 정말 잠이 들었는지 인기척이 전혀 새나오지 않았다. "나으리, 나으리." 오원은 갈금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여 불렀다. 그렇게 대여섯 차례를 불렀다. 그제서야 인기척이 들리며 문이 열렸다. 이용후는 긴가민가하여 오원을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오원은 그 자리에 엎드려 인사를 넣었다. "승업입네다. 그간 옥체 만강하셨습네까?" "네가 여기는 웬일로 왔느냐?" "연홍 아씨래 궁금해서 달려왔습네다." "대궐 일은 어찌하고?" "유 숙 선생님께 허락을 받고 왔습네다." "그 말이 사실이냐?" "기렇습네다." "……왔으니, 들어오너라." 이용후는 다시 마음이 무거웠다. 오원에게 사실을 숨길 일이 몹시 걱정이었다. 변 주부한테 얘기를 들었던 터라 바위를 안고 있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였다. 오원이 사실대로 알았다가는 기절할 것이 뻔하고, 내일 사형터에 따라나서겠다 고 고집을 부릴 것이다. "연홍 아씨래 어찌 됐는지, 소식을 모르십네까?" "아직 포도청에 있느니라." "기럼, 아씨를 구할 수 없는 겁네까?" "그러니까 이러고 있는 게 아니냐. 답답하기는 너와 매일반이다." "혹시, 돈이래 모자라서 기러십네까?" "그렇지 않아. 돈으로 해결할 수 없음이야." "기럼 어드렇게 하면 아씨를 구할 수 있습네까?" "……지금으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구나." "이러다가 아씨래 죽으면 어캅네까? 지난번에는 뇌물을 써서 구해 내지 않았 습네까." "이번에는 사정이 여의치 않구나." "……아씨해 죽으면 안 됩네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인력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 게야. 죽는다고 해도 하 늘의 뜻으로 알고 있어야 하느니라." "기래도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입네다. 포도대장의 마음만 움직이면 될 것 아닙네까?" "그것이 어렵다는 게야." "손을 빨리 쓰디 않으면 연홍 아씨래 죽고 맙네다." 오원은 절망에 빠진 표정으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래도 이용후 는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오원의 말이 사실이라 달리 대안이 없는 한 그를 위 로할 말이 없었다. 지체래 높으면 뭐하고, 학문이래 깊으면 뭐 하네. 죄 없이 갇혀 있는 사람 구 하지도 못하는 것을. 오원은 이용후와 변 주부가 갑자기 원망스럽기까지 하였다. 그까짓 포도대장 쯤 마음을 돌리지 못하는가 싶어 그들의 무능이 새삼 안타까웠다. "기럼, 연홍 아씨를 볼 수도 없습네까?" "면회조차 허용이 안 되는구나." "기럼, 아씨래 죽었다고 해도 못 들을 것 아닙네까?" "글쎄다……설마 그렇기야 하겠느냐." 오원은 한숨을 내쉬며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이용후와 얼굴을 맞대고 있으려 니 마음만 답답하여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오원이 문을 열고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계향이 조르르 다가오더니 무슨 얘 기를 나누었냐고 물었다. 오원은 묻는 말에 대꾸는 않고 다짜고짜 술상을 차리 라고 하였다. "어머머? 술 마실 줄도 아우?" "내 나이래 몇인데 술을 못 마시네?" 그런데도 계향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오원을 멀뚱히 올려 보기만 하였 다. 오원이 눈을 부라려 빨리 가져오라고 재촉을 하였다. "나으리한테 꾸중 들은 게로군." "하도 답답해서 기래." "무엇이 답답하다는 거유?" "잔말 말고 날래 술이나 개져오라우." 오원은 얼굴을 붉히며 주머니에서 엽전을 있는 대로 다 꺼내 계향의 손에 쥐 여 주었다. 그리고는 돈만큼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미욱이 옆에서 보고 있다가 계향에게 눈짓을 보내고 오원을 제 거처로 끌고 갔다. "형님, 왜 그러우?" "답답해서 기래." "무엇이?" "생각 좀 해 보라우. 지체 높은 양반이 돼 개지고 연홍 아씨 하나쯤 구해 내지 못해서야 되갔네?" "그거야 인력으로 안 되는 일인 걸, 나으린들 별수 있겠수?" "기렇다고 연홍 아씨래 죽는 걸 보구만 있갔어?" "그럼. 형님한테 좋은 수가 있는 거유?" "없어야, 기러니까 답답하지 않네. 저러다가 연홍 아씨래 죽고 말아." "설마 죽이기야 할라구. 사람이 무슨 종교를 갖든 제 마음인데, 천주교를 믿는 다고 사람을 죽이겠수?" "야래 지금 무슨 소리를 하네? 소문도 못 들었네? 천주교 믿는 사람들, 하루 에도 수십 명씩 죽고 있어야." "조선이 아직 개화를 못해서 그래요. 조정에서 나라의 문을 활작 열어야 하는 데 무엇이 두려워서 문을 안으로 꼭꼭 잠그고 있는지 모르겠단 말이우." "기래 기래. 그건 미욱이 말이 맞아. 기거이 다 대원군 때문이 아니갔네. 백성 들은 여기저기서 굶어 죽는데, 궁궐만 크게 지으면 뭐하갔다는 기야?" 이때 계향이 술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앉아서 두 사람 앞에 각각 잔 하나씩을 나누어 놓았다. 승업은 옥수가 보이지 않는다고 궁금해 하였다. 그러자 계향은 코웃음을 치며 볼에 바람을 넣었다. "옥수 아씨가 보고 싶수?" "야는 무슨 말을 기렇게 하네? 거저 궁금해서 물어 본 거야." "무슨 얘기를 했갔네. 연홍 아씨 얘기디. 구해 낼 방법도 없다, 면회도 못한다 하니까니, 내래 얼마나 답답하갔네." 그러자 계향이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차마 함부로 입을 열 수 가 없는 표정으로 거푸 한숨만 내쉬었다. "연홍 아씨래 죽으면 안 되는데……. 좋은 방법 없네? 나으리하고 주부 어른 만 믿어서는 안 되갔어. 포도대장, 그 사람 마음을 움직일 방법만 있으면 되갔는 데." "우리 같은 천민이 감히 포도대장을……." "빌어먹을. 양반이 대체 뭐이가. 양반이 뭐인데 우리가 이 따우 취급을 받고 사네?" "취했수? 나으리가 아시면 어찌할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우?" "나으리한테 이러는 게 아니야. 거저 마음이 답답해서 화가 나는 기야." "하긴, 형님 말이 옳수. 천민은 대대손손 천민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 너무 억울해." "미욱아. 함부로 입을 열면 안 된다. 너는 동학쟁이로 숨어 살면서 입을 그리 함부로 놀리니?" 그러자 오원이 들었던 술잔을 내려놓고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이미 동학얘 기는 듣기는 했어도 미욱이 바로 그 중에 있다는 사실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오원이 미욱이와 계향이를 번갈아 바라보자 계향이 자신이 뱉은 말이 염려스러 운지 이내 고개를 꺾었다. "미욱이가 동학쟁이네?" "그렇수." 그가 서슴없이 시인하였다. 오원이 또 한 번 놀라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 보았다. 그러자 계향이 안절부절못하였다. "기런데, 와 숨어 댕기네? 나라에서 기것도 금하고 있는기야?" "나라가 썩어서 그렇다우." "나라 썩은 거야 새삼스러운 거이 아니잖네. 서학이래 있으니까니 동학이 있는 거이 아니갔네. 조정에서는 와 이것저것 다 못하게 하는 기야?" "권력 잡은 사람들이 백성들 마음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자기 영화만 생각 하니까 그렇지." "기건 기래. 어쨌든 미욱이래 생각이 깊구만. 천자문을 뗀 사람이라 다르구만 기래." 오원이 미욱에게 술잔을 건네면서 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계향이 비로소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보라우, 계향이. 똑똑한 동생을 ㄷ어야, 이래서 사람은 배워야 해. 아마 동 생이래 양반집에서 태어났으믄 벌써 출세했을 기야." 오원이 한숨을 쉬면 혼자 고개를 끄덕이자 계향이 눈물을 훔치며 훌쩍훌쩍 울 었다. 미욱이도 따라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보라우. 내래 울리자고 기런 게 아니야. 다만 안타까워서 기렇디." "출생이 서러워서 울었수." "기래 기래. 알 만해. 자아 계향이도 내 잔 받으라우." 오우너이 잔을 계향에게 건네자 미욱이 재빨리 주전자를 들어 그녀에게 술어 부었다. 그러는 그의 볼에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내가 누이한테 함부로 한 말 잊어버리우." "무슨 말?" "누이가 기생 된다고 했을 때, 내가 마구 욕을 했잖수. 그러구서 누이 곁을 떠 나긴 했지만, 후회를 많이 했수. 누이 처지도 불쌍한데 괜히 그랬구나 싶었지. 우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동기간인데 내가 누이 탓을 왜 하겠수." "그래. 나도 네 마음 다 알아. 그러니까 너를 반겨 맞아들이지 않았니." "보기 좋구만. 동기간도 없는 나는 얼마나 쓸쓸하갔네. 기래서 미친 사람 처럼 그림만 그리는 기야. 이거이 다 진사 어른 덕분이디만. 진사 어른을 뵙지 못했으 면 내래 이 세상에 없을 기야." 오원이 한숨을 내쉬면 잠시 추억에 잠기는 표정에 빠지자 계향이 남매가 고개 를 끄덕이며 따라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계향이 무슨 말이 하고 싶어 연신 입을 달싹거렸다. "누이. 아까부터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수." "아까 나으리께서 황 서방을 따로 불러 무슨 말씀인가 하시는 것 같았는데, 그 게 자꾸 궁금해서 기래." "무슨 말?" "그걸 모르겠어. 틀림없이 연홍 아씨에 대한 얘기 같은데, 차마 엿들을 수가 있어야지." "기럼, 황 서방한테 물어 보지 그랜?" "물어 봤는데, 통 말을 아니 하우.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눈치던데……." "혹시, 연홍 아씨한테 나쁜 일 있는 거이 아니네?" "그래서, 나으리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궁금했던 거유." "나한테 특별한 말씀은 안 하셨어야." 그러는 동안에 어느새 밤이 깊어, 계향은 술상을 들고 나가고 오원과 미욱이 만 남았다. 두 사람이 등잔불을 사이에 두고 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미욱이. 연홍 아씨를 구해 낼 방법이 없갔네?" "글쎄……? 진사 나으리께서 이미 방법을 다 쓰셨는데도 아니 된다고 하시니 우린들 어쩌겠수." "참으로 답답하구만 기래." "우리 누이를 보살펴 준 연홍 아씨는 나한테도 은인이우. 나한테 방법이 있으 면 내 목숨 버리고라도 구하겠수." "미욱이도 내 생각과 같구만기래.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먼저 은혜를 갚아야 하는 기야. 기런데 내래 이게 뭐이가."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는 맙시다. 설마 천주가 착한 연홍 아씨를 죽게 하겠 수?" "기건 기래. 연홍 아씨래 착해서 죽디 않을 기야." "오원은 그녀와의 인연을 떠올리며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거지꼴로 나타난 오 원을 마다하지 않고 등 따습고 배부르게 보살펴 준 연홍의 정이 새삼 그리워 시 원하게 통곡이라도 했으면 싶었다. 연홍 아씨. 조금만 참고 견디시라요. 절대 죽디 않을 기야요. 4 드디어 경복궁 중건을 끝냄으로써, 3년에 걸친 대역사가 막을 내렸다. 그 동안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백성들의 원성을 사면서 거뒤들인 원납전 총액이 710만 2,662냥이고 백미가 615석이었다. 그리고 부역한 연인원이 3만 5,881명에 이르렀 다. 사정전의 쌍룡도 백화는 이보다 훨씬 앞서 마쳤기 때문에 오원은 벽화에 참여 한 다른 화공들과 함께 작업장에서 일찍 철수하였다. 벽화는 그 형상과 동작이 우아하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매우 세밀하여 환상적인 느낌을 갖게 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이 벽화를 보고 만족한 사람은 누구보다 고종이었다. 이에 대원군이 크게 기뻐하여, 벽화에 참여한 도화서 화공들에게 특별히 포상하 여 오원도 5백 냥이라고 하는 거금을 받게 되었다. 오원은 포상금보다는 비로소 작업장에서 빠져나올 수 있음이 무엇보다 홀가분 하였고, 다시 자유로운 시간을 갖게 되어 기뻣다. 유 숙은 오원이 경복궁에서 철수한 날 저녁, 그를 위해 특별히 주안상을 차리 도록 하여 함께 술잔을 나누었다. 벽화에서 보여 준 오원의 감각이 매우 뛰어나 그의 자질에 또 한 번 감탄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인물이 자신의 제자가 되어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그 동안 수고가 많았다. 대원위 대감께서 벽화를 보시고 크게 기뻐하셨음은 물론, 너를 특별히 눈여겨보셨느니라. 오랫동안 습작을 못하였으니, 이제부터는 다시 습작에 임하도록 하여라. "저는 오직 나으리 분부에 따랐을 뿐입네다. 이자부터 습작에 몰두하갔습네다. 앞으로도 엄하게 다스리시라요." 오우너은 유 숙이 내린 술잔을 받아 놓고도 차마 마시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 러자 유 숙이 채근하여 겨우겨우 마셨다. "네 나이 이미 스물다섯이 되었으니, 이제 대작을 하여도 좋으니라." "기래도 감히 나으리와 어드렇게 대작을 하갔습네까. 특별히 주시는 잔이니까 니 오늘만 마시갔습네다. 기런데, 궁금한 거이 있습네다." "무엇이냐?" 유 숙은 오원이 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들어 보 나마나 연홍의 소식을 물을 것이 뻔하여 마음이 부거웠다. 연홍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변 주부로부터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변 주부가 오원에게 약속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전해 줄 것을 유 숙에게 당부하였다. 그러나 유 숙아 숨기고 있 었다. 벽화가 거의 완성단계에 있던 중이라 차마 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칫 오원이 발광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혹시, 그 동안 주부 나으리께서 보내신 전갈이 없었습네까?" "……있었느니라." "기럼, 연홍 아씨에 대한 것입네까?" "……그렇더구나." "포도청에서 나왔다는 전갈이었습네까?" "너에게 전해 달라는 부탁이 있었으나, 벽화 작업 중에 동요될까 우려해서 슴 기고 있었느니라. 안됐다만, 그 기생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이다." "……기거이 정말입네까? 정말 죽었습네까?" "어이구, 연홍 아씨." 오원은 어깨를 사시나무 떨 듯 흔들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유 숙은 갑자 기 죄인이 되어 오원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하였다. 오원이 한참 만에 울음을 그쳤다. "나으리. 내일 잠시 나갔다 오갔습네다." "가는 곳이 어디더냐?" "청계옥에 가서 자세한 얘기를 듣갔습네다." "좋으니라." 이튿날, 오원은 집을 나서자마자 바로 청계옥으로 달려갔다. 마침 미욱이 마당 을 쓸고 있었다. 미욱이 오원을 반기면서도 얼굴 한 구석이 쓸쓸하였다. "연홍 아씨 소식은 들었수?" "어제 들었어.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네. 와 아씨 같이 착한 사람이 죽어 야 한단 말이네?" "그러게 말이우." 오원이 눈물을 글썽거리자 미욱이 따라서 코를 훌쩍거렸다. 이 때 옥수와 계 향이 나왔다. 계향이 오원을 보자 눈물부터 짜냈다. 그러나 옥수는 왠지 침물만 하고 있을 뿐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화가 선생이 아침 일직 웬일이신가?" "연홍 아씨 소식 듣고 달려왔시오." "정말 안됐어. 괜히 천주교는 믿어 가지고…… 내가 그토록 말렸건만." "연홍 아씨래 어디다 묻었습네까?" "나는 가 보질 않아서 모르겠고…… 계향이랑 미욱이는 알고 있지?" 옥수가 남의 일이라는 듯이 아주 태연하게 굴었다. 그러자 계향이 입을 비죽 거리며 옥수를 흘끔흘끔 곁눈질을 하였다. "계향이랑 미욱이는 아씨 묻힌 곳에 가봔?" "누이랑 함께 갔었수." "계향이는 아씨를 누구래 묻어 드렸는지 알고 있네?" "진사 어른과 황 서방이." "도대체, 언제 돌아가셨네?" "형님 다녀간 그 이튿날이우." "기럼, 그때 진사 나으리는 알고 계신 거였네?" "우리한테는 감쪽같이 숨기고 계셨던 거유." "미욱아, 나랑 아씨 묻히신 곳에 가지 않갔네? 계향이는 아씨한테 올릴 것 좀 장만하라우." 계향이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가자, 오원은 툇마루에 앉아 미욱이한테 그간에 있었던 일들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잠시 후 계향이 젬루이 든 찬합과 술병을 들고 나왔다. 그녀도 함께 가겠다고 하여 셋이 청계옥을 나섰다. 그러자 옥수가 빨리 오라고 못을 박았다. 옥수를 보 는 계향이 눈이 또 곱지 않았다. 연홍이 묻힌 곳은 서대문 밖 공동묘지였다. 그녀의 무덤은 떼도 입히지 않은 채 봉분만 덩그렇게 솟아 있었고, 열 십자로 엮은 막대가 삐딱하게 꽂혀 있을 뿐이었다. 오원은 무덤 앞에 엎드려 통곡을 하였다. 뒤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는 계향이 와 미욱이도 따라서 끄억그억 울음을 터뜨렸다. 연홍 아씨래 와 죽습네까. 아씨래 잘못한 거이 뭐인데 죽는단 말입네까. 오원은 눈물을 모두 말려 버릴 것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미욱이 그의 겨 드랑에 팔을 껴 일으키려 해도 막무가내였다. 저토록 울다가는 결국 기절할 것 이 분명하여 계향이도 나란히 쪼그려 앉아 애써 말렸다. "그만 울어요. 울어서 아씨가 살아나신다면 몰라두……." "아씨래 우리를 얼마나 많이 돌봐 주셨네. 기렇게 착한 분이 와 죽는단 말이 가. 아씨래 천주교만 믿디 않았어두 이렇지는 않았을거 아니가." "누가 아니라우. 그러면서도 왠지 나한테는 믿으라는 말씀을 선 뜻 아니 하셨 어요. 아마 이럴 줄 미리 아셨나 보우." "거 보라우. 아씨래 기렇게 마음이 깊으신 분이잖네." 아씨. 편히 주무시라요. 아씨래 틀림없이 극락에 가실 기야요. 거기서 부디 영 화를 누리시라요. 오우너은 연홍의 무덤을 다녀온 이후로, 여러 날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습작 도 시작하지 않았고, 곡기도 입에 대는 둥 마는 둥 하였다. 만석이 안달을 부리 며 먹기를 권하였지만 귀담아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마치 혼이 두 빠져나간 사람처럼 초점 없는 눈길로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젠장. 형님은 어찌 된 사람이 누가 죽기만 하면 혼이 빠지우? 부모상을 당해 두 이렇지는 않을 거구만. 내말 듣고 있수?" "……" "……만석아." "어럽쇼? 이제사 정신이 돌아오나? 왜 그러슈?" "술이나 한 사발 개져오라우." "방금 술이라구 했수?" "……기래." "입에 곡기도 대지 않는 사람이 술은 왜 마시우? 그랬다가 취해서 주정할까 두렸수." "날래 개져오라우." "……알았수." 만석이 술사발을 들고 오자 오원은 마치 술에 걸신들린 사람처럼 숨도 안 쉬 고 벌컥벌컥 마셔 댔다. 그리고 한 사발 더 가져오라고 하였다. "더는 아니 되우." "빨리 개져오지 못하갔어?" "……알았수." 만석은 오원의 눈빛이 너무 섬뜩하여 뒷걸음질로 비칠비칠 물러났다. 꼭 발광 하는 사람의 눈빛이어서 바로 쳐다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때 유 숙이 나와 만석이와 마주쳤다. "승업이는 어찌하고 있더냐?" "……여전하옵니다." "허면, 아직도 밥을 먹지 않고 있더란 말이냐?" "밥은 켜녕 물조차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술만 마시겠다고 함니다 요." "술을?" "한 사발 갖다 줬는데, 또 가져오라고 저리 강짜를 부립니다요. 어찌하옵니 까?" "……실컷 마시게 하여라." "참말이시옵니까?" "마음이 울적할 때는 술이 곧 약이니라." 유 숙은 오원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원래 정이 많은 사내라, 충격에 서 벗어나기란 그리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 목석같이 기름 지지 못하면 예술을 할 수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애써 오원의 마음을 이해하 였다. 제 스스로 슬픔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만석이 술을 병에 가득 담아 가지고 들어가자 오원이 목을 잔뜩 꺾어 놓고 끄 억끄억 울고 있었다. "여기 있수다. 나으리께서 실컷 마시도록 하라고 분부하셨수." "기래 기래, 나으리께서 내 마음을 아시는 기야." "이거 마시고 한숨 자슈. 정신을 차려야 그림을 그리잖수. 그리고 하나 물어 봅시다. 대체 연홍인가 뭔가 하는 기생이 형님한테 어떻게 했길래 이 난리슈? 혹시 짝사랑한 거 아니우? 아니면 살이라구 섞었수?" "아새끼래 말하는 것 좀 보라우. 니 대갈통에는 기딴 생각만 들어 있네?" 승업이 눈을 무섭게 부라리는 것이 곧 주먹이라도 날릴 기세였다. 그러자 만 석이 놀라서 재빨리 물러앉았다. "아니면 됐지, 화는 왜 내우? 너무 이러니까 괜히 해 본 소리유." "비록 기생이기는 하디만, 여느 기생과는 다름 사람이야. 내래 춥고 배고픈 시 절에 꼭 누님처럼 보살펴 주신 분이야. 기래서 기래." "형님은 보살펴 주는 사람이 많아서 좋겠수. 이 진사도 그렇다지, 변 주부도 그렇다지, 기생도 그렇다지…… 또 우리 나으리는 형님을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 시우." "기건 기래. 내래 그분들 은혜 갚으려면 죽을 때까지도 다 못 갚고 말아. 그분 들이 아니었으면 오늘날까지 살아 있지도 못했을 기야. 그분들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연홍 아씨야. 그 아씨래 죽었단 말이야. 기러니 내 마음이래 어떠하갔네?" "형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우. 너무 오랫동안 슬퍼하니까, 걱정이 돼서 하는 소리유." "나도 모르갔어." "어쨋든, 빨리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슈. 나으리께서 걱정을 많이 하고 계시니 그것도 송구스러운 일 아니겠수?" "알고 있어야. 허디만 마음대로 안 되는 걸 어카갔네." 오원은 취기가 몸에 번지면서 자주 눈물을 짜내, "연홍 아씨, 연홍 아씨."를 주 문처럼 중얼 거렸다. 계향이 동생과 겸상을 하여 늦은 아침을 먹고 있었다. 어제 홍경무가 와서 밤 이 늦도록 술상을 끼고 앉아 주정을 늘어놓는 바람에 몹시 시달렸다. 어쩌다 그 꼴을 목격한 미욱이 심사가 잔뜩 뒤틀려 밥상을 받아 놓고도 입이 대짜나 나와 있었다. "어떻게 하면 누이가 기생 노릇에서 벗어날 수 있겠수? 어젯밤, 홍생원인지 꽁 생원인지 하는 작자가 누이한테 구는 짓을 차마 볼수가 없었수." "그 사람이 원래 그런 인간이란다." "기생질만 아니 하면 그런 작자한테 시달릴 까닭이 없잖수." "당장 벗어날 길이 없지 않니." "차라리 어디 가서 나랑 둘이 농사나 짓는 것이 어떻수?" "농사를 지으려면 논밭이 있어야 하지 않니. 누가 우리한테 그런 땅을 줄 리도 없고." "멀리 떠나 주인 없는 산이라도 개간하면 되잖수." "말은 쉽지만 농사 일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뼈빠지게 농사지어 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할 양이면 그다지 보람 있는 일도 아니야." "그래도 홍 생원 같은 인간한테 시달림을 받으며 기생질하는 것보다는 나을 거유." "차라리 장사를 했으면 했지, 농사 일은 못한다." "내가 돈을 벌어 오면 정말 장사를 하겠수?" "못할 것두 없지. 허지만 숨어 다니는 신세가 어찌 돈을 번단 말이냐?" "동학쟁이에서 발을 빼면 못할 것도 없수. 그리고 누이도 돈을 착실히 모으면, 그것과 합해서 조그만 장사를 할 수가 있어." "좋은 생각이긴 하구나. 어차피 너도 여기를 떠나는 것이 좋아. 홍 생원이 마 음 삐뚤어진 사람이라, 네가 숨어 다니는 사실을 알면 밀고할지도 몰라. 연홍 아 씨도 홍 생원이 밀고하여 저리 된 거야. 옥수는 절대 아니라고 우기고 있지만 내 짐작이 틀림없어. 그러니, 너 하나쯤 밀고하지 않겠니?"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이야. 그래서 며칠 수에 떠날 생각을 하고 있 었어." "어디로 간단 말이니?" "정한 곳은 없지만, 돈을 벌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서야지." "그럼, 동학쟁이 노릇은 정말 안 할 거지?" "그래야지, 사람이 남에게 대접을 받지 못해도 천대는 받지 말아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돈을 많이 벌어야 되지 않겠수?" "참으로 기특한 생각을 하였구나." "떠나기 전에 승업이 형님을 한 번 보았으면 좋겠는데……. 어찌 찾아가면 승 업이 형님을 만날 수 있수?" "약전에 가서 주부 어른께 여쭤 보면 가르쳐 주실 것이다. 그런데 승업이는 왜 만나려구?" "그냥 떠나기가 서운해서 그래. 생각할수록 좋은 사람이거든." "그럼, 오늘이라두 약전에 가서 물어 보렴." "그래야 되겠어." 미욱이 유 숙의 집에 당도하여 안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 마침 만석이 눈길에 잡혔다. 만석이 미욱의 모양새를 훑어내리며 누구를 찾아왔내고 물었다. "여기, 장승업이라는 화가가 살고 있수?" "그렇소만, 댁은 어디서 오셨수? 혹시 그림 그리는 분이슈?" "아니오, 그저 승업이 형님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오." "안에 있기는 하오만, 누구라고 이르면 되겠수?" "미욱이라 전해 주슈." "……잠시 기다리시우." 만석이 고갯짓을 연신 해 대며 뒤뚱뒤뚱 사라졌다. 잠시 후 오원이 궁금한 낯 으로 나와 미욱을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미욱이 얼굴을 잊었수? 왜 그리 바라보기만 하우?" "너무 뜻밖의 손님이라 기래. 대체 여게 웬일이가?" "그냥 형님이 보고 싶어서 왔수." "반갑구만기래. 날래 들어가자우." 오원은 미욱이 너무 반가워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거처로 안내하였다. 오원이 마침 습작을 하던 중이라 방이 매우 어수선하였다. 그는 화선지와 화구들을 한 쪽으로 밀어 놓고 미욱이와 마주 앉았다. 이때 만석이가 얼굴을 디밀었다. "손님이 오셨는데, 맨입으로 있을 거유?" "대접할 거이 있어야디." "술 한잔 드실라우?" "기거 좋디. 개져오라우." 오원은 갑자기 기분이 좋아 마음이 둥실둥실 떠 있는 것 같았다. 미욱은 오원이 그려 놓은 그림들을 구경하며 벌어진 입을 오랫동안 다물지 못 하였다. "이걸 다 형님이 그린 거유?" "기렇기는 하디만, 모두 마음에 안 들어야." "나 같은 문외한의 눈으로는 모두가 훌륭하우." "마음에 드는 거이 있으면 개져가도 좋아." "정말이우? 나 같은 사람이 가져도 되는 거유?" 미욱이 오원의 말이 믿기지 않아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오우너이 그린 것 모두를 모아 미욱이 앞에다 밀어 놓았다. "그럼, 이것 하나만 가지겠수." 미욱이 기암괴석 그림을 골라잡으면서 정말 가져도 되는냐고 또 물었다. "여태 속아만 살았네? 정말 가지래구 기러는구나." 이때 만석이 제법 실한 안주가 놓인 술상을 내려놓고 나갔다. 오원이 상을 끌 당겨 미욱이와 마주 앉았다. 그러면서 연신 웃음을 흘렸다. "미욱이래 와 줘서 기분이 좋구만기래. 자아, 받으라우." "반겨 줘서 고맙수. 실은 형님께 인사하러 왔수." "인사를 하다니, 기거이 무슨 말이가?" "며칠 있다가 청계옥을 떠날 생각이우." "갑자기 와 기러네? 연홍 아씨래 안 계셔서 기래?" "그것도 그렇지만, 하는 일 없이 눈치도 보이고, 또……." 미욱은 계향이와 나우었던 얘기들을 낱낱이 늘어놓으면서 돈을 벌여야 하는 이유로 얘기 마무리를 지었다. 그러자 오원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을 하였다. "미욱이 말이 맞아. 내래 청계옥에 있어 봤디만, 기생 노릇 매우 고달픈 일이 야. 성질 못돼먹은 사내들이 오면 기생들이 여간 힘들디 않아." "누이도 나이를 먹어 이젠 기생질도 시세가 없어. 기생 나이 스물이면 환갑이 라고 하잖수. 그런데 스물 다섯이나 됐으니……." "기런데, 미욱이가 어드렇게 돈을 벌갔네? 머슴 하갔네?" "머슴 일이든 무슨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하면, 설마 못 벌겠수?" "그 세월이 얼마가. 이러면 어떻갔네? 내래 경복궁 중건 때 상금으로 받은 돈 이 있어. 기걸 밑천으로 장사하면 되지 않갔네?" "형님도 참 …… 내가 왜 그걸 갖는단 말이우. 내 힘으로 벌어서 장사 밑천 말 들 거유." "거저 받디 않겠다면 빌려 줄 테니까니, 나중에 갚으라우. 장사 잘 되면 그때 갚으면 될 게 아니네. 지금 육백 냥쯤 있으니까니, 개겨가라우. 내래 돈이 필요 없는 사람이야." "돈 필요없는 사람이 세상 천지에 어디 있겠수." "정말 쓸 데가 없어서 기래." 오원은 발딱 일어나더니 고리짝을 뒤져 돈 주머니를 꺼내 왔다. 그리고는 미 욱이 품에다 서슴없이 안겼다. "형님. 정말 왜 이러우? 내가 이걸 받을 이유가 없잖수." "고집부리지 말라우. 이걸루 술 사 먹으라는 거이 아니잖네. 사이 좋은 남매가 장차 살아가는 방도를 위해서 쓰라는 기야. 내 말 알갔네?" "내 말귀가 어두워서 이러는 게 아니우. 남의 귀한 돈을 덥썩 받을 수가 없어 서 그러는 거지." "이보라우. 계향이와는 어릴 적 한솥밥을 먹으며 고생했댔어. 남이기는 해도 남 같은 생각이 안 들어서 기래. 내래 남의 은혜만 입고 살아서 이자는 남한테 은혜도 베풀면서 살고 싶은 기야." "형님 마음은 알지만……." "기러면 됐어야. 여러 말 하디 말고 개져가서 장사 밑천 하라우." "글쎄……? 어쨌든 누이한테 물어 봐야 되겠수?" "물어 볼 필요가 뭐 있네? 장사하는 길이 계향이를 기생 노릇에서 빼내는 길 이애. 그 길밖에 없어야." 오원이 미욱의 손을 끌어 잡아 토닥이자 미욱이 눈물을 주르르 쏟았다. 인심 각박한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나 싶어, 새삼스럽게 승업이 존경스러웠다. "형님. 이 은혜를 어지하면 갚을 수 있겠수?" "은혜? 남매가 행복하게 잘 살면, 기거이 은혜 갚는 기야." 미욱이 돈 주머니를 가슴에 품고 청계옥으로 달려갔다. 계향이 술시중에 대비 하여 몸치장을 하고 있던 중에 동생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무슨 일인지 미 욱이 계향에게 눈짓을 보냈다. 제 거처로 오라는 뜻 같았다. "승업이는 만났니?" "만나기는 했는데, 이런 경우 어찌하면 좋을지……." "무슨 일인데?" 미욱이 한참 만에 입을 열어 오원과 있었던 일을 사족 없이 늘어 놓앗다. 얘 기를 다 듣고 난 계향이 대뜸 눈물부터 짜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니. 그 사람 마음이 이토록 넓을 줄 몰랐구나." "나도 그래. 승업 형님이 보통 사람이 아냐. 돈이 많은 재력가도 이렇게는 못 할 거야." "그러게 말이다. 우리가 그 사람한테 은혜 입게 될 줄을 어찌 상상이나 했겠 니. 이럴 줄 알았으면 어릴 때 모질게 굴지 않았을 것을……." 계향은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오원에게 툭하면 면박을 주며 멸시했던 일 들을 후회하였다. 이토록 그릇이 큰 사람인 줄도 모르고 함부로 대한 것이 갑자 기 부끄럽고 가슴이 아팠다. "누이는 기회를 보아 떠나겠다는 얘기를 옥수한테 해야 되겟수.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녀, 우리가 할 만한 장사를 알아볼 테니." "그래. 우리가 장사할 거처를 먼저 마련한 다음에 얘기하자꾸나. 아아. 내가 기 생 노릇에서 벗어날 날이 있다니…… 믿어지지 않는구나." "장사를 잘 해서 승업이 형님 돈을 꼭 갚아야지." "그렇다마다. 꼭 갚아야 해." 오원은 미욱을 보내 놓고 나서 한참을 흐뭇해 하였다. 그들 남매가 그 돈을 보람 있게만 쓴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처음에는 그 돈을 모두 이용후한테 건넬 생각이었으나, 양반 체면에 절대 받지 않을 것이 분명하여 포기하였다. 혹 은 그의 술값으로 청계옥에 맡길 생각도 했으나, 연홍이 없는 집에 다시는 출입 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해 그만 두었다. 쓰지도 않을 돈을 가지고 있기가 부담 스러워 고심하고 있던 차에 미욱이가 나타난 것이다. 미욱이 생각이 깊은 사람 인데다가 배움도 있어, 늘 믿음직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더구나 제 누이 장래를 걱정하는 사려가 기특하여 남매의 정을 늘 부러워했었다. 황해도 저잣거리 국밥 집을 돌며 천대받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자 갑자기 눈물이 솟았다. 국밥집 문전 에서 꽤나 얻어맞았었다. 고작 제강 한 그릇 퍼 주면서, 혹은 개한테나 줄 음식 찌꺼기를 내주면서 숱하게 걷어차였었다. 기래. 부지런히 돈 벌라우. 배고픈 서러움이 제일 큰 기야. 오원이 한창 습작에 목두하고 있는데 뜻밖에 양기훈이 찾아왔다. 자기 혼자 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 낯선 사람 하나를 데리고 왔다. 외모로 보아 연배가 승 업과 비슷한 사내였다. 양기훈이 한 발 앞서 다가와 오원의 손을 반갑게 잡았다. "오원. 그 동안 적조했수다래. 별고 없었시오?" "늘상 편하게 지냅네다. 석연이래 그 동안 어디어디를 다녔시오?" "꼭 정처가 있었던 건 아니고, 거저 여게저게 다니며 화가들과 친교를 맺었디 요. 그래서 오늘은 오원한테 좋은 화가 한 분을 소개 하려고 왔시오." 그가 곧 동행한 사내를 소개하였다. 그는 안건영이라는 화가로, 따지고 보니 오원보다 두 살이 위인 신축년생이었다. 그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체구에 이목 구비가 수려한데다가 특히 눈매가 매서워, 사물을 관찰하는 힘이 날카로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원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차에, 이렇게 직접 만날 수 있어 한량없 이 기쁩니다." "기렇게 말씀하시니 얼굴이 뜨겁습네다. 괜히 석연이래 과장을 해서 기렇디, 그림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멉네다." "겸손의 말씀이시오." "서서 이럴 거이 아니라, 누추하디만 안으로 드시디요." 오원이 안으로 먼저 들어가 방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화구들을 한쪽으로 몰 라 놓고 두 사람을 들어오게 하였다. 양기훈과 안건영은 ㄷ르어서자마자 오원의 습작 그림들을 감상하느라고 한참 동안 입을 봉하고 있었다. 오원의 그림을 처 음 대하는 안건영이 매우 감탄하는 눈치였다. 완성된 그림은 별로 없고 거의가 그리다 만 것들이지만, 우락부락한 기암괴석 그림에서는 웅장한 힘이 넘치고, 영 모도에서는 섬세함이, 산수화에서는 화려하고 우아함이 매우 환상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안건영은 미완성의 그림들을 모두 안타까워하는 눈치였다. "어찌하여 오원께서는 그림을 완성하지 않습니까?" "싫증이 나서 그만ㄷ시오." "허면, 미완성인 채로 그냥 버리시는지요?" "기렇다가 마음이 동하면 완성하는 것도 있시오. 여기 있는 기명 절지도는 기 렇게 해서 완성한 것들입네다. 기래도 마음에 차는 것이 없시오." 이때 눈치 빠른 만석이 술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나으리, 사랑채에 계시네?" "아까 도화서로 가셨잖수." "참, 기렇구만. 약소하디만 두 분 목이나 축이시라요. 귀한 손님이래 오셨는데 주안상이 빈약합네다." 오원이 술병을 들어 두 사람 앞에 번차로 병을 기울였다. 술이 몇 순배 도는 동안 가벼운 대화가 드문드문 이어졌다. 얘기는 성격이 활달한 양기훈이 주로 하고 오원과 안건영은 그저 웃음으로 분위기를 채워 갔다. "석연. 여기 안 공께서는 주로 무엇을 화재로 하십네까?" "안 공은 일찍부터 그림을 배워 능하지 않은 것이 없시오. 산수화도 일품이고, 영모 그림도 일품이고, 특히 남종화쪽의 조어도는 뛰어나 감탄하디 않을 수가 없시오." "아니오. 오늘 오원의 작품을 보고, 심히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별말씀을. 이왕 오셨으니까니, 한 작품 남기는 거이 어떻습네까?" "남길 것까지야..." "마침 같은 일을 하는 사람까리 모였으니까, 서로 그림 한 장씩 나위 개지는 것도 좋을 것 같수다." "이런 낭패가..." 그리하여 세 사람이 차례로 붓을 잡아 안건영은 조어도와 산수화를, 양기훈은 노안도와 괴석도를, 그리고 오원은 영모도와 기명절지도를 그려 서로 교환하였 다. 상대방 그림을 각각 받아 든 그들 셋은 매우 흡족하여, 앞으로 교유를 끊지 말 것을 약속하며 정답게 술잔을 주고 받았다. 안건영이 오래 머무를 수가 없다 하여 자리를 뜨려고 해서 오원이 하룻밤 묵 어 갈 것을 권하였으나, 집안에 우환이 있다고 하면서 그냥 가 버렸다. 오원은 그냥 보낸 것이 못내 아쉬워 큰길까지 그들을 배웅하였다. 마침 해질 녘이 되어수 붉게 물든 석양이 취기 오른 오원의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하였다. 앞으로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 명심할 것이 있다며, 이용후가 오우너에게 가르쳐 준 공자 말씀이 갑자기 떠 올랐다. -사람에게는 이로운 벗이 셋, 이롭지 못한 벗이 셋이다. 정직한 벗, 성실한 벗, 박학한 벗은 이로우나 편벽한 벗, 겉으로만 부드러운 벗, 겉과는 달리 실속이 없 는 벗은 해롭다. 이용후가 그때 이 문장을 써 주고는 한자의 훈을 낱낱이 설명하면서 그 깊은 의미를 사족까지 달아 이해시켰다. 그리고는 "예술이란 손재주만 가지고 훌륭할 수가 없는 것이니라. 예술은 마음의 깊이가 있어야 해." 하면서 또 한 번 오원이 글을 깨치지 못한 것을 애석해 하였다. 오우너은 멀리 사라지는 양기훈과 안건영을 안타깝게 여기며 그들과의 우의가 죽을 때까지 돈독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날 저녁, 유 숙이 귀가하면서 왠지 향수 정학교를 데리고 왔다. 정학교는 유 숙의 소개로 오원과 이미 인사를 튼 관계였다. 잠시 후 주안상이 들어가면서 유 숙이 오원을 불러들였다. "습작은 많이 하였느냐?" "네, 나으리. 실은... 조금 전에, 양기훈 화가와 새로 안건영이라는 화가가 다녀 갔습네다." "무슨 일로?" "화담을 나누러 온 것 같았습네다." "음... 유익한 시간을 가졌겠구나." "네, 나으리 앞으로 교유를 자주 갖기로 하였습네다." "잘 하였구나... 헌데, 이제는 승업이도 새로운 화풍을 배울 필요가 있어. 해서, 오늘 나으리를 모시고 왔느니라." "무슨 말씀이온지..." "마침, 향수 선생께서 쾌히 승낙을 하신고로, 한동안 나으리 댁에서 침식토록 결정을 보았느니라. 승업이 생각은 어떠하냐?" "저는 오직 나으리 분부에 따르갔습네다만, 혹시 제가 습작을 게을리 하여 내 쫓는 것이 아니십네까?" "그렇지 않느니라. 화가는 여러 화풍을 익혀서 그 중에 특히 알맞은 것을 제 것으로 삼는 법이니라. 너에게는 재주가 고루 있으니만큼 보다 많은 것을 익히 도록 함이야." "나으리. 하오나..." "무엇이더냐?" "아직 나으리께 다 배우지 못한 중에 있습네다. 기런데 어드렇게 다른 화풍을 배우갔습네까." "나도 다 생각이 있어서 권하는 것이니, 따름이 좋을 것이야." "... 네, 나으리." 오우너이 갑자기 고개를 꺾고 바닥에 눈물을 떨어뜨렸다. 오원이 유 숙에게 사사하기 시작한 지 어언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열 여섯 나이에 머슴이나 다른 없는 꼴로 들어와 그새 스물다섯을 넘겼으니 꽤나 긴 세월이었다. 있는 동 안 꾸중도 많이 들었고 한때 쫓겨나는 곡절도 겪었다. 그러면서도 유 숙은 오원 을 진실로 미워한 적이 없었고, 출생이 보잘 것 없다 하여 박대한 적도 없었고, 지나치게 간섭한 적도 없었다. 오우너이 간혹 자유분방할 만큼 관대하여 항상 이해하려고 애쓰는 쪽이었다. 오원은 지난날을 돌이켜 보며, 그 동안 스승의 덕을 깊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점과 그의 밑에서 습작을 게을리 한 것이 몹시 후회가 되었다. "나으리와 하직할 생각을 하니까니, 지난 세월이 후회될 뿐입네다. 나으리의 은덕을 깨닫지 못하고 천방지축으로 철없이 굴었던 일들이 부끄러워 새삼 얼굴 을 ㄷ르 수가 없습네다. 차라리, 나으리께 종아리라도 맞고 떠나면 송구한 마음 이 덜어질 것 같습네다." "괜한 소리를 하는 구나, 누추한 집에 유하면서도 열심히 하였느니라." "기렇지 않습네다. 나으리, 제발 종아리를 때려 주시라요." 오우너은 기어코 끄억끄억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제 분수를 모르고 스승 앞에서 멋대로 굴었던 일들이 켜켜이 한이 되어 돌처럼 굳어질 것만 같았다. "울음을 멈추렸다. 자꾸 그리하면 너를 가르치실 여기 향수 선생의 마음이 편 치 않으실 것이야." "혜산, 가만 두십시오. 저리 우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울음을 멈추고 내가 이르는 말을 명심해 듣거라. 배우는 자는 스승을 항상 제 부모처럼 마음을 써야 하고, 스승이 이르는 말씀은 당장은 마음에 쓰더라도 달 게 받아야 하느니라. 뼈를 깎는 고통 없이는 진실로 배웠다고 할 수가 없으니, 스스로 제 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 알겠느냐?" "나으리 말씀, 죽을 때까지 명심하갔습네다." "그리 작심하면 됐느니라. 그만 물러가도록 해라." 오원은 거처로 돌아와서도 오랬동안 울음을 멈추지 못하였다. 그러자 만석이 따라서 울음을 떠뜨렸다. "만석아. 내 없어도 나으리 잘 모셔야 해. 알갔네?" "형님이 가면, 나는 누구를 의지하고 사우?" "내래 바다 건너 가는 거이 아니야. 나으리 뵈러 자주 올 테니까니 섭섭해 하 디 말아야. 나도 나으리를 떠나기 싫어. 하디만 나으리 분분가 계시니 어쩔 수가 없잖네." "꼭 자주 와야 하우." "기래 기래. 어디를 간들 스승님을 잊을 수 있갔네. 자주 오갔어." 5 혜산 유 숙이 지병으로 세상을 떴다. 이때 그의 나이 46세였다. 오원은 유 숙의 부음을 받고 망연자실하였다. 그가 몸져 누웠다는 만석의 전 갈을 받고 달려간 것이 불과 열흘 전이었다. 그때 유 숙의 병색이 그다지 나쁘 지는 않아 반주를 곁들여 식사도 하였다. 오원은 만석이 너무 호들갑을 떤 것이 라 생각하고 안심을 했었다. 그러나 정작 유 숙이 죽었다는 소식에, 오원은 하늘이 무너지고 대지가 갈라 지는 충격으로 한참동안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만약 만석이 흔들어 깨우 지 않았다면 오원도 그 길로 세상과 하직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스승의 부음 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참말이네? 참말로 나으리가 돌아가셨네? 거짓말이디?" "감히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수? 오늘 아침 갑자기 그리 되신 거유." "며칠 전만 하여도 괜찮으셨잖네. 기런데 와 갑자기 돌아가시네?" "그걸 낸들 아우? 나도 청천벽력인데." 오원은 만석을 앞세워 유 숙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의 집이 저만치 보이면서 집안의 곡성이 섣달 북풍에 실려 제일 먼저 달려나왔다. 오원은 비로소 유 숙의 죽음을 실감하였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마침 변 주부가 침통한 얼굴로 나와 있었다. 오원은 눈물 을 글썽거리면서 그에게 다가섰다. "며칠 전까지도 괜찮았는데, 와 갑자기 돌아가셨습네까?" "그 동안 앓고 계시던 신장병이 악화되셨던 게야." "아직도 정정하셔야 할 연세에 돌아가시다니, 원통한 일입네다." "그러게 말이다." 오원은 그 자리에 엎드려 또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스승을 자주 찾아 뵙지 못한 불충이 비로소 후회가 되었다. 그때 정학교 집으로 옮겨 2년여 동안 사사 하였고, 지금은 누옥 한채를 구하여 홀로 그림을 그리는 중에 있었다. 그 동안 여러 화가들과 교유하면서 자유 분방하게 지냈다. 교유한 화가들 중에는 이미 친교를 맺은 석연 양기훈, 해사 안건양을 비롯하여 형당 유재소, 이용림, 오경석, 홍세섭, 이회수 등이 있었다. 그들과 만나면 당연히 화담이 오갔고 으레 술자리 가 마련되었다. 그 통에 유 숙을 잠시 잊고 찾지 못하였다. 그것이 이토록 통한 이 되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오원이 울기를 멈추자 변 주부가 머뭇거리는 눈치로 입을 열었다.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으나, 이 진사께서도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 "어드렇게 편찮으십네까? 중병이십네까?" "글쎄... 기침을 심하게 하시는 것으로 보야 폐가 나빠진 것 같아. 약을 드시고 계시니 좀더 지켜볼 일이지만, 몸이 워낙 쇠약하셔서 쉬 나을 것 같지가 않구나. 허니. 이 댁 장례가 끝나는 대로 찾아뵙도록 해." 오원은 죽은 닭처럼 고개를 떨구고 눈물만 떨어뜨렸다. 그까짓 그림이 뭐라고, 화갇르을 만나 술타령이나 하는 통에 사람의 도리를 잊고 지냈으니, 부끄러워 차라리 혀라도 깨물고 싶었다. 이용후를 만난지 어느덧 18년의 세월이 흘러 오원의 나이 벌써 서른이 되었 다. 까마득한 시절에 맺은 정이 지금껏 변함이 없어 어떠한 아비도 그이만큼 애 틋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원에게 있어서 그는 은인의 도를 넘어 인생의 스승이 요, 곧 아버지와 같았다. 그 은혜를 죽을 때까지 갚는다고 해도 결코 갚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그가 병을 앓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나으리. 용서하시라요. 나으리 앞에서 백 번 죽어 마땅한 놈입네다. 생애에 제일 큰 스승을 떠나보내고, 어쩌면 이용후마저 여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슴을 마구 휘젓고 다녔다. 유 숙의 장례가 끝난 그 이튿날, 오원은 이용후 문병을 가기 위해 먼저 약전 으로 갔다. 약을 더 지어 갈 생각으로 들렀다. 그러자 변 주부가 직접 가서 진맥 을 하겠다며 동행할 뜻을 밝혔다. "진사 나으리께서 몸이 쇠약하신 거이 음식이래 넉넉지 못해서 기렇디요? 살 림이 궁하니까니 제대로 잡수시지 못하셨을 기야요." "그렇기도 하거니와, 원래 기가 약한 분이셨어." "기럼, 저자에 가서 육고기랑 생선 좀 사 가지고 오갔습네다. 잠시만 기다리시 면, 날래 갔다 오갔시오." "... 그래라." "오원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저자로 달려갔다. 마침 그림값으로 받은 돈이 제법 있어 음식거리를 넉넉하게 살 수 있어삳. 오원이 독립하여 거처를 정해 놓 자, 어떻게 알았는지 돈 많은 중인들이 몰려와 그의 그림을 얻고자 하였다. 후일 을 기약할 것도 없이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한 장씩 그려 주곤 하였다. 돈은 받지 않겠다고 했으나 재료값이라면서 굳이 내놓고 간 돈이 의외로 많이 쌓였다. 그 림에 제법 안목이 있고 재력이 있는 자들은 돈을 아까워하지 않아, 서너 작품 얻어 가면서 꽤 많은 돈을 놓고 가기도 하였다. 오원은 돈이 모이고부터 차츰 술을 많이 마시기 시작하였다. 친교 있는 화가 들과 만나면 그날의 술값은 으레 오원이 치르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고, 어느 때 는 밤을 세워 마시는 적도 있었다. 그때부터 오원이 말술을 마신다는 소문이 장 안에 퍼져 술집마다 그가 오기를 은근히 기다리기도 하였다. 이용후 집에 당도하자 마침 아들 경이 땔감을 안고 뒤뜰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는 이미 나이 열여덟의 청년이 되어 과거 볼 준비 중에 있었다. 그의 누이 원 도 혼기를 놓쳐 스무 살이 되었으나, 가세가 빈곤하여 이용후 누님 집에 기거하 면서 마땅한 혼처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경이 변 주부와 오원을 보자 황망히 나무를 내려놓고 서둘러 예를 갖추었다. 오원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에게 성큼 다가가 서슴없이 엎드렸다. "도련님. 안녕하셨습네까?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네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이런 예가 어디 있습니까. 몹시 민망합니다." 경이 안절부절못하여 재빨리 오원 앞에 마주 무릎을 꿇었다. 비록 신분의 차 이가 있다고는 하나, 오원은 이미 화단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어 신분을 따질 경 우가 아니었다. 그 사이에 변 주부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고 뜰에는 경과 오원만이 남아 예의 로 잠시 옥신각신하였다. "나으리 건강은 어떠십네까? 차도가 있시오?" "제가 뵙기에는 병세가 여전한 것 같습니다만, 마침 주부 어른께서 오셨으니 알게 되겠지요." "원이 아가씨는 무고하시디요?" "누님도 며칠 걱정만 하다가 어제 가셨습니다." 이때 이용후 부인이 어디선가 나타나 오원에게 다가왓다. 오원은 얘기를 끊고 급히 뜰에 엎드렸다. "소인, 승업입네다." "이리 때를 맞추어 찾아 주니 고마울 뿐이네. 그림은 많이 그리시는가?" "네, 마님. 나으리 환후로 걱정이 많으시갔습네다." 그러자 그녀가 대답 대신 한숨만 내쉬었다. 그러한 그녀에게서 양반댁 마님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고, 그저 여염집 여편네 꼴로 초췌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렇기는 경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빈곤한 모습이 오원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하였다. 오우너이 경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갔다. 이용후는 변 주부의 진맥을 받 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몸이 너무 말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오원은 그의 몰골을 보는 순간, 오래 살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부터 드는 것이었다. 해 쓱한 얼굴에 퀭하게 패인 눈자위가 병이 매우 깊어 있음을 단박 느끼게 하였다. 게다가 밭은 기침은 보는 이를 안쓰럽게 하여 오원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말 없이 눈물만 닦았다. "약을 정성껏 드셔야 합니다." 진맥 보기를 마친 변 주부가 한숨을 내쉬며 간곡하게 당부하였다. 그 목소리 에 왠지 힘이 빠져 있었다. "약은 잘 먹고 있소만..." 오원은 두 사람의 얘기가 끝나자 비로소 이용후 앞에 엎드렸다. 눈물부터 앞 서 인사말을 선뜻 뱉을 수가 없었다. "승업이 왔구나. 그래, 그림은 잘 그리고 있는 게야?" "...네, 나으리." "와 줘서 고맙구나." "나으리. 어서 쾌차하시라요. 이 겨울을 넘기믄 곧 봄이 옵네다." "그렇겠군. 몸이 어서 나아 발전한 네 그림들을 보고 싶은데..." "나으리. 곧 그리 될 것입네다." "그건 이 사람 말이 맞습니다. 약만 잘 드시면 차도가 있을 것이니, 과히 심려 치 마십시오." "변 주부한테 너무 폐를 끼쳐서 미안하오." "폐라니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듣기 민망합니다." "아니오. 폐가 이만저만 아닌 것을 왜 모르겠소." "그런 염려는 마시고, 어서 쾌차하십시오." 이용후는 기운이 없는지 오래 앉아 있지를 못하고 곧 자리에 누워 버렸다. 그 모습을 보니 차마 얘기를 더 나눌 수가 없엇다. 마침 변 주부가 눈짓을 보내 오 원도 그와 함께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그러자 경이 따라나왔다. 마당으로 내려선 오원은 이내 뒤뜰로 갔다. 땔감이 얼마나 있는지 살피기 위 함이었다. 예상대로 며칠 땔 것밖에 없었다. "도련님. 조만간 다시 오갔습네다." "그리 한가한 몸이 아니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닙네다. 꼭 오갔시오." 오원은 변 주부와 함께 집을 나섰다. 마음이 울적하여 내딛는 다리에 힘을 쓸 수가 없었다. 변 주부도 입을 봉한 채 자주 한숨만 내쉬었다. "진사 나으리께서 오래 사시갔습네까?" "자네가 보기에는 어떠하던가?" "왠지 불안합네다." "실은, 내가 보기에도 그래. 몸에서 기가 모두 빠져나갔어. 저래가지구선 오래 살 수가 없는 법인데..." "얼마나 더 사실 수 있갔습네까?" "지금으로서는 예측할 수가 없어." "더 좋은 약이 없갔습네까?" "내가 정성껏 처방하고 있는 중이나, 사람의 병이란 약으로 다 고쳐지는 것이 아니야. 불로초를 먹었다는 진시황도 결국은 죽었으니까." "저러다가 ㄷ로아가시면 어캅네까?" "...안타까운 일이나, 운명으로 돌릴밖에." 어느새 해가 서산에 걸려 있어, 두 사람은 노을을 바라보며 걸음을 재촉하였 다. 변 주부는 오는 동안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무엇인가 깊은 상념에 잠긴 표정이었다. 오원은 오원대로 이용후와의 인연을 새삼 떠올리며 자주 눈물을 글 썽거렸다. "우리 집에 가서 나랑 술이나 한잔 해. 마음이 쓸쓸하여 이대로는 넘길 수가 없겠구먼." "...네 나으리." 변 주부는 약전에 도착하자마자 사동을 시켜 주안상부터 가져오도록 지시하였 다. 술은 아예 동이로 가져오도록 했다. 오원이 말술을 먹는다는 소문이 이미 변 주부 귀에도 닿았기 때문이다. "나으리. 진사 어른을 완쾌시킬 방법이래 아주 없습네까." "내 대답은 아까와 같아. 약으로 생명이나 연장시키는 것 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음이야. 폐를 상하면 도리가 없거든." "진사 나으리가 돌아가시면, 저한테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습네다." "당연히 그럴 테지." 이때 사동이 주안상을 가지고 들어왔다. 술은 정말 동이째로 가지고 왔다. 두 사람은 입을 닫고 한동안 오로지 술만 마셔댔다. "이 진사 댁에는 언제 또 갈 셈인가?" "이틀 후에 갈가 합네다. 아까 뒤뜰에 가 보니 땔나무가 별로 없었시오. 가서 나무도 해 놓고, 한동안 드실 식량도 들여놓을 생각입네다." "...장한 생각이구먼." "그분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것즘은 아무것도 아닙네다." "나으리 댁에서 매우 감동하실 일이야." 이튿날 오원은 그림을 팔아 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틀 동안 열 작품을 팔 아 돈이 제법 모였다. 오원은 그 길로 동대문 저자로 달려가 살 다섯 가마에다 생선 두름과 육류 등을 짐수레에 맡겨 이용후의 집으로 갔다. 오원이 짐수레와 함께 뜰로 들어서자 이용후 부인과 아들 경이 보고 한참 동 안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오원은 두 사람 앞에 엎드렸다. "허락도 없이 주제넘은 짓을 하였습네다. 용서하시고 받아 주시라요." "그래도 그렇지...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나? 항상 신세만 입어서 우리 마 음이 편치 않네." "신세라는 말씀은 옳지 않습네다. 나으리께서 저한테 베푸신 은혜는 죽을 때까 지 갚아도 다 못 갚습네다. 나으리한테는 말씀드리지 마시고, 그냥 받아 주시라 요. 기래야 나으리 마음이 편하십네다." "그러자 경이 눈물을 글썽이며 다가와 오원의 손을 덥썩 끌어 잡았다. 미처 고 맙다는 표현은 못하고 한동안 눈물만 흘렸다. 오원은 짐수레를 보내 놓고 바로 뒤뜰로 가 지게를 메고 나왔다. 부인과 경이 기겁을 하여 오원으로부터 지게를 빼았으려 했다. "세상에, 이런 경우는 없네. 나무는 경이 하여도 되는 일일세." "아닙네다. 도련님은 오로지 학문하시는 거이 옳은 일입네다. 기래서 과거에 꼭 붙으시라요." 오원은 그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내빼듯 곧장 산으로 달려갔다. 오원의 민첩한 행동에 부인과 경은 그저 넋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용후 집에서 이틀을 묵어 꼬박 사흘 동안 해다 놓은 나무가 뒤뜰 처마 밑에 빼곡하게 들어찼다. 겨울을 나고도 남을 양이었다. 이 모두를 이용후 모르게 할 생각이었으나 결국 알려지고 말았다. "승업이 올 적마다 신세를 지는구먼." "신세라니요... 힘이래 남아서 하는 일입네다. 나으리께서 하루 빨리 완쾌하셔 서 전처럼 나들이를 하셔야 합네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마음 같지 않구나." "마음을 굳게 잡수시라요. 기래야 병을 이길 수 있다고 했습네다." "그래. 내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빨리 일어나야지." "오늘은 제 거처로 갔다가 수일 내에 다시 오갔습네다. 그 동안 옥체를 보전하 시라요." "고맙구나. 아무쪼록 습작을 게을리 하지 말고, 열심히 그리거라. 그것만이 네 가 갈 길이야." "네, 나으리." 오원은 삽짝을 나서며 경을 은근히 불러냈다. 경이 무슨 일인가 싶어 궁금한 낯으로 따라 붙었다. 오원이 따로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선뜻 입을 열지 못하 고 한참을 주저주저하였다. "긴히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일입니까?" "도련님, 실은..." 오원이 갑자기 괴나리 봇짐을 풀어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대뜸 경의 손에 쥐여 주는 것이었다. "... 이것이 무엇입니까?" "몇 푼 안 되지만, 도련님께서 맡아 두시라요. 얼마 있으면 설이 닥칩네다. 기 때 요긴하게 쓰시라요." "별말을 다 하십니다. 이것만은 받을 수가 없어요, 그 동안 입은 은혜만도 넘 치는데, 어찌 어것가지 받는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어요." 경이 돈 주머니를 다시 돌려 주려고 하자 오원이 재빨리 등을 돌려 멀리 내뺐 다. 경이 따라오며 오원을 불러도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마냥 뛰기만 하였다. 경 은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오원은 거처로 가지 않고 곧장 남대문 저자로 방향을 잡앗다. 그는 저자 골목 을 몇 굽이 돌아 한 국밥집으로 성큼 들어섰다. "잘 있었네?" "어이구 형님. 오랜만에 봅니다그려." "장사는 잘 되네?" "그럭저럭 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발걸음을 아니 합니까?" "기럴 사정이 있었어야." "무슨 사정인지는 몰라도 섭섭하우." "기래 기래. 미욱이 마음 다 알아. 우선 술부터 내오라우." 그때 청계옥을 나온 계향이와 미욱 남매가 오원이 준 돈으로 밑천 삼아 국밥 장사를 시작하였다. 그들 남매가 독립하면서 계향이는 기생 딱지를 완전히 떼어 버릴 양으로 이름 도 본래대로 미향이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오년 전 에 한 사내를 만나 결혼까 지 하여 이제는 아이 둘의 어엿한 부인이 되었다. 미욱이도 지난해에 저자에서 여자를 얻어 장가를 갔고, 제법 자리를 잡아 안장된 살림을 꾸리고 있는 중이었 다. 오원은 그들을 볼 때마다 대견하여 기분이 좋았다. 그들 남매는 그 공을 모 두 오원에게 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원은 그들의 당연한 생각을 항상 부인하 였다. 그리고 오원이 장사 밑천으로 건네 준 돈을 갚겠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받 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 어디서 오는 길이우?" "이 진사 댁에서 오는 길이야." "진사 어른은 무고하시우?" "기렇디 않아. 폐에 병이 깊어 누워 계시디 뭐이가." "저런. 폐병이 들면 오래 살지 못한다는데..." "기래서 걱정이디 뭐이가, 주부 어른께서 좋은 약을 골라 처방을 했는데도 차 도가 없으시잖네." 비로소 술상이 놓여지자 오원은 사발을 들어 단숨에 들이켰다. 갈증이 꽤 났던 모양이다. 한 사발 술에는 도무지 성이 차지 않는 듯 미욱에 게 동이로 가져오도록 하였다. "장승업 화백이 말술을 즐긴다고, 장안의 소문이 예까지 들리더니... 정말이구 료." "어린 적에 재강으로 배를 채ㅇ던 놈 아니가. 기거이 원수디." "그렇게 마셔도 탈만 없으면야 무슨 걱정이우." "누이는 잘 있네?" "배가 또 남산만하다우." "뭔 아를 자꾸 낳네?" "그러게 말이우. 들도 많잖수. 아마 흥부 마누라 짝 날 모양이우." "부부간에 정이 좋아서 기런 거야. 좋은 일이디." "형님 덕분에 우리 남매는 잘 살고 있지만, 도대체 형님은 어찌하려우? 평생 혼자 지낼 거유?" "내래 혼자 사는 거이 좋아." "혹시, 마음에 드는 처녀가 없어서 그러는 거 아니우?" "기렇디 않아야. 여자라는 거이 귀찮아서 기래. 짱알대고 투기나 하는 꼴을 어 케 보간." "사람 사는 것이 다 그런 거 아니우. 미운 정도 정이라는데." "나 혼자 자유롭게 사는 거이 더 좋아." "죽어서 누구한테 제삿밥 얻어 먹겠수. 처가 있나 자식이 있나." "죽으면 기걸루 그만이디, 젯밥이 다 뭐이가. 젯밥 먹는귀신 봤네? 다아 부질 없는 생각이야." "여자 생각이 통 안 나우?" "생각이야 나디. 허디만 그때뿐이야. 술에 취하면 다 잊어버리고 말아." 오원은 거나해진 얼굴로 걸걸걸 웃으며 안타까워하는 미욱의 마음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오원의 깊은 속을 알 리가 없는 미욱으로서는 그가 어서 가정 을 이루며 살기를 바랐다. 그 같은 생각은 오랜 세월 오원을 흠모했던 미향이도 같앗다. 오원이 비록 유명한 화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나이 서른이 되도록 상투도 틀지 못하고 있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누이도 형님 걱정을 많이 한다우." "기래두, 내래 장가는 가지 않갔어." "그 나이에 상투도 틀지 않고 다니면 사람들이 웃잖수." "장가 안 갔다고 해서 상투를 틀지 말라는 법은 없어야. 당장 내일이라두 상투 는 틀 수 있어. 누가 뭐라 하갔네." "허긴, 형님의 괴팍한 성격을 누가 말리겠수. 어쨌든 답답하우." "걱정해 줘서 고맙디만, 나대로 살게 가만두라우." 오원은 흥얼흥얼 노래까지 흘리며 끊임없이 술만 마셔 댔다. 아무래도 앉은 자리에서 술 항아리를 다 비울 참인 것 같았다. 6 오원이 한창 낮잠에 빠져 있는데, 젊은 사내 하나가 뜰에 서서 사람이 왔음을 알렸다. 그래도 안에서 응답이 없자 사내는 마루 끝에 무릎을 붙이고 서서 소리 를 높였다. 오원이 그제서야 간신히 눈을 떴다. "누구래 왔소?" 오원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엉금엉금 기어 문을 열었다. "영표가 왔습니다." "어이구, 서방님이래 오셨습네까. 어서 드시라요." 오원이 황망히 마루로 나와 사내를 맞아들였다. 사내가 방으로 들어서자 엎드 려 예부터 갖추엇다. 그러자 사내도 따라서 무릎을 꿇었다. "이 누추한 곳에까지 운농서방님이래 웬일이십네까?" "형님이 보고 싶어서 왔지요." 사내는 다름 아닌 바로 유 숙의 아들 유영표였다. 어릴 때부터 부친한테 글미 을 배워 산수와 영모, 따위를 아주 잘 그렸다. 그는 임자생으로 오원보다는 아홉 살이나 아래여서 오원을 꼭 형님이라 불렀다. 오원이 유 숙의 집에 십여 년을 있는 동안 그와 정이 들어 동기간의 마음으로 지냈다. 지금은 일가를 이루어 상 투를 틀고 있지만, 그가 어릴 때는 오원의 등에 업혀 잠이 들거나 간혹 떼를 쓰 면 함께 나가 새도 잡고 할 만큼 오원한테 응석을 자주 부리던 아이였었다. "가내 별고 없으십네까?" "저야 잘 지내고 있습니다만, 형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서방님 덕분에 잘 지내고 있시오. 그림 많이 그리시디요?" "자꾸 나태해져서 잘 안 되고 있어요, 형님은 어떻습니까?" "저도 마찬가집네다. 기렇디만, 죽을 때까정 할 일을 굳이 조바심 낼 거이 뭐 있습네까. 마음을 바쁘게 가지니까니, 그림이 더 안 됩네다." "제가 그래요." "...서방님, 술 생각 있으십네까?" "형님하고라면 기쁘게 마시지요." 그러자 오원이 문을 열어 '개똥아 개똥아' 하고 누군가를 소리 질러 불렀다. 잠시 후 기억에 없는 웬 소년이 폴짝폴짝 달려왔다. 그리 더럽지 않은 입성으로 보아 거지는 아닌 것 같은데, 꾀죄죄한 몰골에 피골이 상접해 분명 여염집에서 자란 아이 같지가 않았다. "나으리. 부르셨어요?" "냉큰 여주댁으로 달려가서 주안상 개져오라고 이르라우. 아주 귀한 손님이래 오셨다는 거 잊디 말라우." "술은 항아리로 가져올까요?" "기래" 오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이가 다람쥐처럼 빠져나갔다. "저 아이는 누굽니까?" "헤헤헤... 소인 아들입네다." "형님도 참... 농담도 잘 하십니다. 누굽니까?" "... 주워 왔시오." "주워 오다니요?" "며칠 전 약전에서 돌아오던 길이댔는데, 길에 쓰러져 있길래 거냥 데려왔시 오." "뉘집 자식인 줄 알고..." "거렁뱅이야요. 옷이래 갈아입혔으니까니 그나마 저 꼴입네다. 처음에는 차마 볼 수도 없었시오." "그런데, 왜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답니까?"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모양이야요. 아새끼래 보니까니 옛날 제 꼬라 지 같았지 뭡네까. 기래서 무작정 데려왔시오." "아이는 똘똘하게 생겼습니다만..." "오랫동안 거렁뱅이로 굴러먹어서 눈치가 무척 빠릅네다. 기래서 심부름도 시 킬 겸 집이나 지키라고 데리고 있시오." "형님처럼 천재화가가 또 태어나는 거 아닙니까?" "글쎄올시다..." 이때 주모일 것이 분명한 펑퍼짐한 여편네가 술동이를 머리에 이고 개똥이와 함께 들어섰다. 오원이 상에 놓은 안주부터 살폈다. 몇가지 전과 너비아니와 생 성 구운 것까지 제법 실하였다. 오원의 입이 헤벌쭉 벌어져 영표 잔에 술을 가 득 부었다. "서방님. 누추한 집이디만 자주 오시라요." "그렇지 않아도, 며칠 전에 왔다가 헛걸음친걸요. 초닷새든가 엿새든가 그쯤 됐을 겁니다." "어이구. 죄송해서 어쩝네까. 그때쯤이라면 정에 말씀드렸던 이 진사 댁에 갔 었구만요. 진사 나으리께서 환후 중에 계셔서 문병 갔댔시오." "그랬군요.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몹시 서운했었지요." "기랬구만요. 그 대신 오늘은 술 좀 많이 드시라요." 그렇게 한참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동이가 바닥을 드러낼 즈음에 개똥이가 문 앞에 다가와 손님이 왔음을 전하였다. 오원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문을 열 었다. 뜻밖에 해사 안건영이었다. "해사, 어서 오시라요... 오늘이 무슨 날인데, 연신 귀한 손님만 오시는지 모르 갔습네다." "누가 또 와 계십니까?" "운농 서방님께서 오셨습네다." "그래요? 본 지 오래 됐는데..." 영표와 안건영이 긴 말로 인사를 서로 주고받았다. 그들 두 사람은 오원이 유 숙 집에 있을 때 이미 인사를 나눈 사이였다. 오원의 입이 벌써 하마처럼 찢어진 가운데, 개똥이를 시켜 술과 안주를 새로 가져오도록 시켰다. 마음이 들떠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었다. 좋은 벗과 술이 넉넉하게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곧 터질 것 같이 즐거웠다. "해사, 그간 와 발걸음이 뜸했습네까? 어디 아팠댔시오?" "건강도 좋지 않은데다가, 이일 저일로 조금 바빴습니다." "기런 줄도 모르고, 섭섭하게 대접한 일이 있나 해서 걱정했댔시오."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래, 오원은 어찌 지내셨습니까? 듣자 하니 요즘 말술 을 드신다면서요? 장안에 소문이 파다합니다." "기럽네까? 장승업 그림 좋다는 소문은 어데로 날아가고, 하필이면 술 소문만 무성합네까." "오원의 그림을 가지고 감히 누가 입 밖에 내겠소. 괜히 농으로 하는 말이지 요." "마침 여주댁이 술과 안주를 새로 가지고 왔다. 그녀가 오원을 흘끔 곁눈질하 고는 먼저 가져온 술동이를 들여다보았다. "술동이에 구멍이라도 났나...? 그새 그 술을 다 드시다니 원..." "구멍이 나서 여태 주둥이를 대고 있었시오." "우스갯소리도 잘 하십니다." 여주댁이 먼저 가져온 것들을 챙겨서 나가자 오원이 서둘러 빈잔에 술을 가득 가득 채웠다. "내래 아무래도 좋아요. 그림이 시원티 않으면 술이라도 장안에 제일이면 그만 아닙네까. 자아, 오랜만에 술이나 드시디요." "아니올시다. 나는 건강이 전과 같지를 않아요. 조금만 과음을 해도 며칠을 몸 져 누워야 하니, 술이라면 겁이 납니다. 허니, 오늘은 내 몫까지 오원이 다 드셔 야 되겠습니다. 어쨌든 오원의 건강은 하늘이 따로 주신 것 같아요. 말술을 마시 고도 까딱없다니 원... 지하에서 장비가 벌떡 일어날 일입니다." "아마, 그 시절에는 술에다 물을 탔던 모양입네다. 장비 주제에 감히 말술을 먹다니... 안 기렇습네까?" "그런 것 같소." 그날도 결국 오원 혼자서 두 동이를 다 마신 셈이다. 영표는 아직 어려서 많 이 마시지 못하고, 해사는 건강이 나빠 거의 입에 대지 않았으니 오원 혼자 마 실 수 밖에 없었다. 술 앞에는 장사 없다고 오원도 두 동이 술에는 기어이 뻗고 말아 앉은 자리에서 벌렁 누워 코를 드렁드렁 골았다. 이튿날 오원은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이미 한 뼘쯤 기울어져서야 눈을 떴다. 개똥이가 떠 온 냉수를 한 사발 다 마시고는 마치 물벼락맞은 개처럼 머리를 투르르 흔들 어 댓다. "손님들이 와 안 보이네?" "나으리도 참... 어제 가셨습니다." "기럼, 내래 취해서 잤네?" "나으리 혼자서 술 두 항아리를 다 드셨는걸요." "기럼, 손님들 가실 적에 배웅도 안 했네?" "배웅이라니요. 술상 앞에서 그냥 쓰러지셨는데요. 나으리, 아무리 생각해도 신 통한 일입니다요." "...뭘 개지구 기러네?" "나으리는 그 술을 다 드시고도, 어지 소피를 아니 보십니까요?" "이놈아. 내 오줌통이 다른 사람보다 세 배가 더 크니까니 기렇지." "우와... 정말입니까요?" "너는 기렇게 알고 있으면 되는 기야. 잔말 그만 하고 날래 세숫물이나 떠 오 라우. 얼음을 둥둥 띄워서 개져오라우." 오원은 빨리 정신을 가다듬어 이용후 집에 문병 갈 셈을 하고 있었다. 그저께 다녀오긴 했으나 떨어져 있다 보니 자꾸 불안하였다. 자칫 운명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유 숙의 경우처럼 부음만 받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아주 깊이 드는 것이엇다. 오늘은 나선 김에 아예 며칠 머무를 생각이었다. "개똥아, 집에 며칠 먹을 식량 있네?" "나으리께서 며칠 전에 사 주셨잖습니까요. 진지 지어 드릴까요?" "이놈아. 네놈이 지어 준 밥을 먹갔네? 밥에 땟국물 떨어질라." "세수하면 되지요." "내래 며칠 못 올 것 같으니까니, 꼼짝 말고 집에 있으라우. 혹시 손님이래 오 시면 진사 어른 댁에 갔다고 이르아우. 알갔네?" "알겠습니다요." 오원은 일단 변 주부의 약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혹시 약 지을 일이 생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심코 피마골로 접어들다보니 저만치 청계옥 지 붕이 눈길에 잡혔다. 굳이 피할 이유가 없겠다 싶어 오원은 일부러 청계옥 앞으 로 지나갔다. 마침 황 서방이 지게를 지고 나왔다. "아자씨, 안녕하셨습네까?" "어이구, 이게 누구요...? 승업이 아닌감?" 황서방이 서둘러 지게를 벗어 놓고 오원의 손을 덥썩 끌어 잡았다. 그새 더 초췌하게 늙어 눈가에 눈물이 찐득찐득하였다. "승업입네다. 그간 별고 없었시오?" "그럭저럭 지내는 구먼. 허지만, 연홍 아씨도 안 계시고 계향이 마저 떠나고 나니 마음이 허전혀. 그새 승업이는 신수가 훤해졌구먼." "기거이 다 아자씨 덕분이디요. 옥수 아씨래 잘 있습네까?" "옥수도 매일 심란해 있지 뭔가. 손님이 별로 없거든. 꼭 있을 사람들이 없으 니까, 자주 오던 손님들도 발길을 끊고 있어." "... 장사가 안 되느만요." "그래, 어디를 가는 길인가?" "약전에 들렀다가 진사 어른 댁에 문병 가는 길이야요." "얘기 들으니, 진사 어른께서 많이 편찮으시다면서? 나도 한 번 뵈었으면 좋으 련만, 매인 몸이 돼서 원... 참으로 후덕하신 분인데." 황 서방이 또 눈물을 글썽거렸다. 사람이 늙으면 지난 일로 서글퍼진다더니 황 서방이 바로 그런 감정인 것 같았다. 약전 문을 열고 들어서자 뜻밖에 이용후 아들 경이 와 있었다. 순간 약전부터 들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틀림없이 약 지으러 온 것이 다. "도련님께서 웬일이십네까?" "마침 약 지을 때가 돼서 왔습니다." "나으리 댁으로 가던 길에 잠시 들렀시오." 이때 변 주부가 약다발을 들고 나오면서 오원을 발견하고는 의외라는 듯이 반 가워했다. "어인 일인가?" "진사 나으리 댁에 가는 길입네다." "나도 궁금해 하던 차에, 마침 도련님이 오셨구먼." 결국 오원은 경과 우울한 동행을 하였다. 왠지 경이 오랬동안 입을 열지 않았 다. 아버지의 병이 깊어 걱정하는 것이려니 단정하면서도 혹시 또 다른 근심이 생겼는가 싶어 은근히 긴장이 되었다. "도련님, 나으리 환후 말고 다른 걱정 있시오?" "..." 경이 대답은 않고 한숨만 내쉬었다. 오원이 재차 물었다. 그러자 그는 아무것 도 아니라면서 갑자기 걸음을 날려 저만치 내빼는 것이었다. 눈치로 보아 예삿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도련님. 말씀하시라요. 승업이 답답해서 죽갔습네다." "...형님.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무슨 일입네까?" "누이가 결혼을 아니 하겠다고 저리 고집입니다." "좀 상세히 말씀하시라요. 아가씨래 와 결혼을 아니 하십네까?" 경이 또 한숨을 쉬며 오래 뜸을 들였다. 오원만 답답하였다. 그 사이에 심각한 의논이 있었던 모양이나, 오원의 입장으로는 깊이 관여할 일이 아니어서 더욱 안타가웠다. "고모님 댁으로 누이 혼처가 들어온 모양입니다. 남자는 중인자제인데 재산이 많은 집안이라고 합니다. 어머님 말씀이 시집살이로 말하자면 가난한 양반집보 다는 나을 것이니 결심을 하라는 데도, 누이는 아버님 병환이 쾌차하기 전에는 가지 않겠다는 겁니다. 누님 나이 벌써 스물 입니다. 이 혼처를 놓치면 혼인을 영영 못 할지도 모르는데, 저리 고집을 부리지 뭡니까?" "양쪽이 모두 답답한 노릇이구만요. 마님 말씀도 지당하시고 아가씨 마음도 지 당하시고... 참으로 답답한 노릇입네다." "어찌하면 좋지요?" "남자 쪽한테 혼인을 조금 늦추자고 하면 안 됩네까? 기렇데 되면 나으리 병 환도 나으실 테니까..." "신랑 될 사람 나이도 마침 스물이어서 서둘러야 한답니다." "남자 나이래 스물이면 과히 늦은 것도 아닌데... 기렇다고 몇 년을 늦추자는 것도 아니잖습네까." "그러나, 그쪽 처지를 우리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아가씨래 댁에 와 계십네까?" "어제 와서 아직 머물러 있습니다." "나으리께서도 이 일을 알고 계십네까?" "가뜩이나 병환이 깊으신 분한테 차마 아뢸 수가 없었습니다." "...기렇구만요." 정월의 칼날 같은 바람이 볼에 에고 말 것처럼 수시로 몰려왔다. 오원과 경은 입을 꼭 닫고 걸음만 재촉할 뿐이었다. 누구에게도 뾰족한 방법이 없는 경우라 입을 열 필요가 없었다. 그의 집이 가까워지면서 느껴지는 기운은 사람이 전혀 살지 않는 것 같았다. 오원이 갈 때마다 항상 느끼는 감정이었다. 뜰로 ㄷ르어서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이용후 부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오원을 보자 고마워하는 마음을 얼굴 가득 담았다. "나으리 걱정이 돼서 또 왔구먼. 고맙기도 하지." "나으리께서는 어떠십네까?" "특별히 좋아지지도 나쁘지도 않으시네. 어여 들어가 뵙게." 오원이 마루에서 예를 갖춘 다음 안으로 들어가자 마침 원이 앉아 있다가 서 둘러 일어났다. "아가씨. 안녕하셨습네까?" "식구들 걱정을 많이 한다는 예기를 ㄷ르었습니다. 고맙다는 말씀 밖에는 더 드릴 것이 없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네다, 아가시." 이용후가 눈을 힘겹게 뜨고 오원을 올려보며 입가에 웃음을 흘렸다. 오우너이 무릎을 꿇자 슬그머니 손을 끌어 잡았다.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구먼." "아닙네다, 나으리. 진지는 드셨습네까?" "좋은 찬으로 많이 먹었네." "진지를 많이 드셔야 기운을 차리십네다. 기래야 일어나시디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꼭 기렇게 되실 겁네다. 염려 마시라요." "승업이한테 부탁이 있느니." "말씀하시라요." "네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보았으면 좋겠구먼." "지금 말씀입네까?" "그리하면 더욱 좋고. 내 청을 들어주겠는가?" "여부가 있습네까. 당장 시향하갔습네다." 그러자 경이 서둘러 필가와 벼루를 내놓고 연상에서 화선지를 꺼내 왔다. "나으리, 어드런 그림이 보고 싶으십네까? 화조를 원하십네까, 아니면 산수를 원하십네까? 나으리께서 원하시는 것을 모두 그려 올리갔습네다." "허허, 그러면 내가 욕심이 과하지 않느냐. 그러지 말고 정학교선생한테 배운 괴석도를 보여주게." "기것뿐입네까?" "더 그려 줄 것이야?" "네, 나으리. 말씀만 하시라요. 기쁜 마음으로 그리갔습네다." "허면, 무엇이 좋을까..." "나으리, 기러기때가 노니는 군안도는 어떻습네까?" "군안도라... 그거 좋겠구먼. 술 한잔 주련?" "제가 나으리 안전에서 감히 술을 먹갔습네까?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입네다. 심히 민망합네다." "술을 마셔야 글미이 잘 된다는 소문이 내 귀에도 닿았어. 허니, 오늘은 괜찮 아. 네 나이 이미 서른이 아니더냐? 내가 이리 말하는 것은 , 어쩐지 그러한 자 네의 기이한 모습을 볼 수 없을 것 같아서 하는 소리야." 그러자 오원이 갑자기 이마를 바닥에 붙이고는 훌쩍훌쩍 울음을 토해 내는 것 이었다. 그러자 경과 원이 등을 돌려 눈물을 찍어 냈다. "나으리. 방금 하신 말씀은 거두시라요. 나으리께서 곧 쾌차하실텐데 어찌 기 런 말씀을 하십네까." "허허. 빈말도 함부로 못하겠구나. 알았느니라. 내 거두면 되지 않느냐." "오원의 뇌리에 갑자기 이응헌의 달 운옥이 떠올랏다. 운옥이 죽기 직전 자신 의 그림이 보고 싶다고 하여 십장생을 그려 준 때가 생각났던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니, 마치 이용후가 운명하기 직전으로 다가섰는가 싶어 마음이 섬뜩했던 것이다. 오원이 화선지를 세로로 펴 놓더니 작두필을 들어 괴석의 산수도를 그리기 시 작하였다. 그러자 이용후가 경에게 시켜 허리를 세우도록 하였다. 오원이 붓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방 안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숨소리도 새나오지 않았다. 그는 마치 영지 버섯이 켜켜이 쌓인 듯한 괴석이 용틀임하는 모습으로 오른 쪽 화면을 가득 채우더니, 그 맞은편으로는 낮은 절벽에 뒤틀어지고 외틀어진 나무를 배치하였다. 그리고는 그 사이로 큰 냇물이 콸콸콸 흐르는 모양을 넣어 평원과 심원구도가 어우러지게 틀을 잡았다. 잔시 후 허리를 구부리더니 세필로 구석구석의 잔잔한 선과 나뭇잎들을 단 한 점도 허술함이 없이 묘사해 나갔다. 붓을 섬세하게 돌리면서도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옆에서 보는 이의 눈이 미 처 따라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오원이 비로소 허리를 펴고 붓을 놓았다. "나으리. 채색이 없어 아쉽습네다. 미리 말씀을 하셨으면 채색 준비를 했을 겁네다." "아니다. 이 그림만으로도 심히 놀라구나. 경아 그리고 원아. 너희들이 보기에 는 어떠하냐? 놀랍지 않느냐?" "그렇습니다, 아버님. 형님의 소문은 이미 자자하지만 이토록 훌륭한 그림은 처음 봅니다. 누님은 어떻습니까?" "놀립기는 나도 매한가지다. 어지하면 저리 그릴 수가 있을까..." 오원이 밖으로 나가 우물에서 물 한 두레박을 떠서 벌컥벌컥 마셨다. 부엌에 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용후 부인이 슬그머니 오원을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바닥에 붇은 항아리에다 바가지를 넣더니 뜻밖에 술을 퍼 주는 것이었다. "마님..." "괜찮으니 어서 마시게. 자네가 술을 마셔야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문을 들어 서 알고 있어. 나으리 앞이라 마실 수가 없을 것이나, 비록 손님한테 대접은 아 니나, 내 마음으로 알고 마시게." "마님..." 오우너은 그녀의 배려가 왕숭하여 바가지를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그리고 는 단숨에 마셨다. 그가 소매로 입을 쓱쓱 문지르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군안도를 그릴 차 례였다. 이번에는 그가 면상필을 잡았다. 그리고는 갈대밭 위로 수십 마리의 기 러기가 멀리서부터 날아와 내려앉는 모양을 같은 원근법으로 구도를 잡았다. 기 러기 한 마리 한 마리의 실경이 어찌나 섬세한지 마치 화선지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 마음이 조마조마하였다. "언젠가 노안도를 본적이 있느니라. 그러나 이번 그림은 놀랍게 발전하였어. 참으로 훌륭하도다." 이용후는 밭은기침을 뱉어 내는 상기된 얼굴로 칭찬을 늘어놓지 못해 매우 안 타까운 듯하엿다. 그 옆에서 원은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붙이고는 황홀경에 빠진 듯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엇다. 자주 "어쩌면, 어쩌면..." 하는 감탄이 끊이지 않 는 것으로 보아 잠시나마 근심을 잊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원은 그것만으 로도 다행이라 생각하여 은근히 기뻤다. "나으리. 다음에 올 때는 채색할 준비를 해 오갔습네다." "또 그려 주려고?" "나으리께서 말씀만 하시믄 하시라도 그리갔습네다." "오늘은 승어비 덕분에 머리가 한결 맑아진 것 같구먼. 너의 장한 모습을 대하 니 기분이 한량없이 좋아. 정말 장하구나... 승업아." "네, 나으리." "실은 청이 한 가지 더 있어." "무엇입네까?" "언제든, 눈이 많이 내리는 날 밖으로 나가서 너의 <긴난봉가>를 한 번 들려 줘. 그 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구나." 이용후가 갑자기 눈물이 글썽해 가지고 오원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오원은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알고 있었다. 옛날, 한양으로 데려가 달라고 떼를 쓰면서 따라 붙었을 때를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때 눈이 엄청나게 내렸었다. 이용후가 그 장면을 잊이 않고 있는 것이다. "기러니까니 날래 쾌차하시라요.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부르갔습네다." "정말이더냐?" "감히 나으리께 거짓을 아뢰갔습네까?" "...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구먼." "나으리. 마음을 강하게 잡수시라요. 기래야 빨리 일어나십네다." "고맙구나. 내 피곤하니 좀 누워야겠어. 그만 물러들 가거라." 이용후가 경의 도움을 받아 힘겹게 눕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오원은 그 모습 을 내려보며 눈물을 하염없이 떨어뜨렸다. 7 이용후가 죽고 말았다. 2월 초닷새, 청빈한 선비가 쉰들의 나이로 포부를 끝내 펼쳐 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오원이 그의 집에 며칠을 머물면서 차도가 있기를 기다리는 동안, 갑자기 각 혈을 심하게 하는 것이엇다. 가족 모두가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를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동안, 그는 탈진한 상태로 마지막 생명의 끈을 간신히 움켜잡고 있 었다. 오원은 이 위기를 알리기 위해 그 길로 변 주부한테 달려갔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의 시간이라 오원은 약전 문을 거칠게 두드려야 했다. 한참 만에 사동이 문을 열었다 . "꼭두새벽에 웬일입니까?" "진사 어른이 위급하니까니 날래 말씀드리라우." 오원이 하도 설쳐 대니까 사동은 더 묻지를 못하고 안채로 들어갔다. 잠시 후, 변 주부가 눈을 비비며 나타났다. "주무시는데 죄송합네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진사 어른께서 피를 쏟고 계십네다. 기래서 달려오는 길이야요." "결국, 그 지경에 이르렀구먼." "어떻게 하면 좋습네까?" "각혈이 심하시던가?" "거의 한 바가지나 쏟았시오." "...명이 다하신 게야. 어쨌든, 내가 봐야 되겠네." 변 주부가 더날 차비를 서두르는 동안 오원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였다. 이용후의 회생이 어렵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는 있지만, 그래도 한 줄기 남은 희망을 차마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사동이 나귀를 끌어내 오원에게 고삐를 넘겨 주었다. 고삐를 잡은 오원이 나귀보다 앞서 뛰었다. 2월의 새벽 바람은 마치 얼굴에다 유릿가루를 뿌리는 것만큼이나 날카로웠다. 그래도 오원은 발이 어는지 손이 어 는지조차 느끼지 못하고 오로지 뛰기만 하였다. 나귀가 먼저 지친 듯 입으로 김 을 풀풀 뿜어 냈다. 여명이 다가오는 가운데 이용후 집이 저만치 보이면서, 오원은 혹시 곡성이 들리는지를 탐지하기 위해 귀를 한껏 열어 놓았다. 앞을 가로막는 바람 탓인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변 주부와 오원은 곧장 환자 방으로 들어갔다. 다행스럽 게도 아직은 명이 붙어 있는 듯 이용후가 숨은 쉬고 있으나, 곧 끊길 듯 말 듯 한 위험한 조짐을 보여 주고 있었다. 부인과 두 남매가 그새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었다. 변 주부가 진맥을 보는 동안 나머지는 둘러앉아서 숨을 죽여 지켜보았다. 한 참 만에 진맥을 마친 변 주부가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부인을 비롯하여 모두가 그를 따라나섰다. "마님, 아뢰옵기 송구한 말씀이오나, 이제는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될 것 같습 니다. 명이 다하신 듯하옵니다." "희망이 조금도 보이지 않습니까?" "... 그러하옵니다." 그러자 원과 경이 손으로 얼굴을 감싸 울음을 터뜨렸다. 오원은 그 모습을 차 마 바로 볼 수가 없어 슬그머니 뜰로 내려섰다. 비로소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 였다. 나으리 가시면, 내래 누구를 믿고 삽네까. 나으리. 제발 죽디 마시라요. 오원은 가족들이 듣지 못하도록 소리를 삼키며 눈물만 펑펑 쏟았다. 경이 내 려와 오원과 나란히 앉았다. 그 역시 울음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 는 모습이 얼굴에 역력했다. 오원이 말없이 경의 손을 끌어 잡았다. 그러자 경이 오원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끄억끄억 울음을 끌어냈다. "도련님. 마음을 굳게 가지셔야 합네다." "보람도 없이 저리 가시면 어찌합니까." "나으리 운명으로 받아 들이셔야 합네다." "구로지은을 생각하면, 불효한 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나으리께서도 도련님의 효심을 알고 계실 겁네다. 이자는 마님과 원이 아가씨 걱정을 하실 차례입네다." "미력한 제가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형님도 저희와 연을 끊지 마시고 항상 가까이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와 도련님과 연을 끊습네까. 염려 마시라요." 이용후는 결국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오원은 장례를 마칠 때 까지 남아서 수발을 도맡아 하엿다. 뿐만 아니라 경이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그 들 가족의 생계를 보조하겠다는 결심도 굳게 가졌다. 거처로 돌아온 오원을 그날부터 두문불출하여 닷새를 술독에 빠져 있었다. 음 식은 마다하고 술만 마셔 댔다. 이를 보다 못한 개똥이가 울면서 하소연을 해도 막무가내엿다. 이용후가 세상을 뜨자 꼭 아비를 여읜 것 같아 마음에 균형을 잃 고 있었다. 다시 고아가 되었다는 외로움이 매일매일 가슴을 찢어 놓았다. 이용 후에게 발견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태어났고 비로소 사람답게 사는가 싶어는 데, 이제 그가 가고 없는 세상이 새삼 무의미해진 것 같았다. 오원은 술 항아리에 바닥이 드러나자 문을 활작 열어제치고 개똥이를 소리질 러 불렀다. 그러자 문을 활짝 열어제치고 개똥이를 소리질러 불렀다. 그러자 개 똥이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술이 떨어졌다. 날래 뛰어가서 새로 한 동이 개져오라우." "나으리. 제발 술은 그만 드십시오. 진지는 아니 드시고, 술만 드시면 어찌합니 까?" "아새끼래 웬 말이 그리 많네. 날래 개져오라우." "나으리..." "이놈으 아새끼래 맞아야 정신 차리간?" 오원이 목침을 집어 개똥이 앞으로 냅다 던졌다. 개똥이가 용케 피하긴 했지 만 오원의 얼굴이 사자상으로 무섭게 구겨져 감히 거역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여주댁이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안주 소쿠리를 든 개똥이를 앞세워 나타났다. 오원은 항아리를 보자 금세 입이 환히 벌어졌다. "곡기는 안 드시고 왜 술만 자십니까? 그러다가 몸이라도 상하면 어지하시려 구요." "허허허... 기래도 죽디 않고 이렇게 살아 있잖소." "술 이기는 장사 없다고 했어요. 저엉 곡기를 안 드시겟다면 이 안주라도 드셔 야 합니다." 여주댁이 전이며 너비아니 따위를 안주 그릇에 차곡차곡 담아 놓았다. 오원이 그제서야 안주 두어 개를 한입에 구겨 넣고 으적으적 씹었다. "무슨 언잖은 일이라도 있었는가 봅니다. 며칠을 술만 드시니." "아주마니는 몰라도 되는 일이야요. 거저 술만 자꾸 개져오라요." 여주댁이 군시렁대며 나가자 오원이 손바닥으로 항아리를 두드리며 갑자기 노 래를 뽑았다. 정방산성 초목이 무성한데 밤에나 울 닭이 대낮에 운다 에-헤에에 에헤요 어림마 둥둥 내 사랑아 이용후가 죽기 얼마 전, 오원에게 이 노래가 듣고 싶다고 했었다. 결국 그는 듣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 버렸다. 나으리께서 이 노래를 듣고 싶다고 하셨잖습네까. 기런데 무엇이 급해서 그리 빨리 가셨습네까. 오원은 이용후와 함께 눈밭을 걸으며 이 노래를 불럿던 옛날을 떠올리며 또 훌쩍훌쩍 눈물을 짜냈다. 그때 오원이 다른 노래가 더 있다고 하자 이용후는 신 통해 하면서 쾌히 불러 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또 한 곡 뽑은 것이 곰배팔이와 다리병신 흉내를 내며 부른 <병신난봉가>였다. 승업은 술 한 대접을 벌컥벌컥 들이키더니 다시 항아리를 두드려 장단을 맞추 었다. 병신의 종자가 또 따로 있나 한 다리 한 팔 못 쓰면 병신이지 에-에헤여 어거야 어야어야 디야 네가 내 사랑아 제 노래락도 듣고 가셨으면, 마음이 덜 아프갔시오. 오원은 몸에서 열이 나는지 갑자기 웃옷을 홀렁 벗어 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술을 퍼마시기 시작했다. 이때 누군가 찾아와 "형님, 형님" 하였다. 오원이 방문을 열고 목을 내밀자 뜻 밖에 미욱이가 서 있었다. "이거이 미욱이 아니가? 웬일이네?" "궁금해서 왔수. 왜 그리 발걸음을 아니 하였수?" "날래 들어오라우. 기렇디 않아도 심심하던 차에 잘 왔구만 기래." 미욱이 방에 들어가면서 옷을 벗은 채 술동이를 끼고 앉아 있는 오원의 모습 에 그만 아연실색하였다. "대체 그 모양이 뭐유? 이 추위에 옷은 왜 벗었수?" "몸에서 열이 나디 뭐이가. 기래서 벗었어야."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유? 진사 어른 돌아가신 것 때문에 마음이 아파 서 그러우?" "...실은 기래" "원... 따라 죽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 같수." "그 말도 맞아. 기럴 수만 있으면 죽고 싶어야. 나으리 없이 어드렇게 살아가 야 할지, 막막한 중에 있어." "형님두 참... 지하에 계신 나으리께서 이를 아시면 당장 노하시겠수. 형님이 잘 되는 것 보셔야 지하에서도 나으리 마음이 편치 않겠수?" "기건 기렇다 치고, 웬일이네?" "궁금해서 왔다지 않수. 형님이 몸져 누운 줄 알았수. 누이도 걱정이 되어 나 보고 가 보라 하잖우. 도대체 며칠째 먹는 술이우?" "... 잘 모르갔어. 기래두 죽디는 않았잖네." "기가 막혀서 원... 어여 일어냐슈." "와아?" "오늘이 내 귀빠진 날이라구 마누라가 한 상 차렸지 뭐유. 형님 생각이 나서 혼자 먹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모시러 온 거유." "... 기랬구만." "어여 일어나우. 같이 가서, 생일 음식 좀 드슈. 허구헌 날 술이라니..." 미욱이 서둘러 옷을 챙겨 입히고 억지로 끌고 나왔다. 술에 적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여삳. 오원은 미욱의 부축을 받으면서 노래를 흥얼 거리기도 하고 갑자기 훌쩍훌쩍 울기도 하였다. 미욱은 계속 혼자 몸으로 지내는 오원이 새삼 측은하여 콧등이 시큰하게 저려왔다. "형님은 영영 장가 안 들 셈이우?" "장가? 기딴 건 가서 뭐 하갔네. 귀찮아." "그럼 평생을 홀아비로 늙겠다는 거유? 남들처럼 계집 얻어 새끼도 낳아 오손 도손 사는 재미도 봐야 하잖수." "기런 재미는 미욱이나 실컷 보라우. 내래 거추장스러운 건 딱 질색이야. 계집 도 성가시고 아새끼도 성가셔. 거저, 혼자 사는 거이 마음 편해야." "형님은 성미도 참 별나우. 마냥 이리 지내다가는 남한테 오해 받기 십상이잖 수. 허우대 멀쩡한 사내가 홀아비로 지낸다면, 십중팔구 고자로 생각할지도 모르 는 일이우." "남의 사돈이야 가거나 말거나." "그래도 인생살이란 그런 게 아니우. 하다못해 짚시노 제 짝이 있다는데 사람 은 말해 무엇 하겠수." "남이 장에 간다고 거름통 지고 나서갔네? 내래 거저, 여게저게 떠돌면서 그림 이나 그리는 거이 좋아." "어이구 답답해, 형님과 얘기하는니 차라리 소한테 경을 읽어 주겠수." 기래. 너야말로 오손도손 잘 살라우. 내래 이것이 좋은데 어카갔네. 그토록 맹위를 떨치던 동장군이 2월이 지나면서 서서히 꼬리를 감추자 온 대 재에 봄기운이 기지개를 펴기 시작하엿다. 나무에 따라서는 벌써 싹을 튀우는 것도 있고, 냇물을 두껍게 덮고 있던 얼음장도 차차 엷어지면서 물 흐르는 모양 을 투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온갖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도 생 기가 넘쳐 듣는 이의 마음을 들뜨게 하였다. 오원은 그토록 지겹게 마시던 술을 며칠 전부터 딱 끊고 바깥 출입을 자주 하 였다. 그는 주로 산이 아니면 깊은 계곡을 고루 찾아 다녔다. 겨울 옷을 벗어 버 린 바위나 맑은 물이 졸졸졸 흐르는 계곡에 앉아,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 다니며 우짖는 새들의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거나, 아직도 잔설이 덮여 있는 음지의 초목들을 요리조리 관찰하였다. 그렇게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일로 며칠을 허비하였다. 도무지 서두르고자 하 는 마음이 없이 걸음이 항상 느려, 아무 곳에서든지 누워 잠을 청할 수도 있을 만큼 여유작작하였다. 오원은 언제 부턴가 아침밥 먹는 일이 없어지고 점심과 늦은 저녁을 국밥집이 나 주막에서 해결하였다. 끼니를 손수 해 먹는 일이 귀찮을뿐더러, 불알 달고 있 는 사내 처지에 차마 부엌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굴뚝에서 아침 저 녁으로 연기가 솟는 것은 개똥이가 밥을 짓거나 군불을 넣기 때문이었다. 그 시 간 외에는 늘 빈 집처럼 보였다. 낮 시간에 오원이 집을 비우자, 그의 그림을 얻고자 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 가는 사람이 꽤 많았다. 매일 대여섯 명은 으레 오는 모양이었다. "나으리. 오늘도 일곱 사람이나 왔었습니다요. 나으리 어디 계시느냐고 나만 들볶지 뭡니까." "너한테 저엉 귀찮게 굴면, 사람 꼴이 싫어서 멀리 도망갔다고 하라우. 기러믄 다시 오디 않을 기야." "그렇게 말한다구 누가 믿는 줄 아십니까요? 어떤 사람은 내 방에서 하룻밤 자겠다고 사정까지 하는 걸요. 나으리 그림이 그토록 훌륭한지 미처 몰랐습니다 요." "글쎄다...? 내 그림이 훌륭해서 기러는지, 아니면 그 사람들 허파에 똥물이 들 어서 기러는지, 내래 모르갔구나." "어쨌든, 나으리는 좋으시겠습니다요." "뭐이가 좋아." "사실이 그렇잖습니까요. 그림을 그려 주면 돈도 벌고 칭송도 듣고, 얼마나 좋 습니까요. 나한테도 그런 재주가 있었다면 한 밑천 잡는 건데..." "요 아새끼래 조둥이 까는 것 좀 보라우. 뭐이 어드래? 다시 한 번 지껄여 보 라우. 한 밑천 잡겠다고? 이놈아. 내래 돈 벌겠다고 그림 배운 줄 아네? 돈 벌 욕심이래 있었으면 하루에 백 장도 그리갔다. 어른한테 기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이 아니야. 알갔네?" "...잘못 했어요. 다시는 그딴 말 안 하겠습니다요." "입을 함부로 놀렸다가는 발가벗겨서 내쫓길 줄아라우." "네, 나으리. 그런데..." "뭐이가?" "아까 어떤 상인이 와서 좋은 값으로 쳐 줄 것이니, 나으리 그림을 팔라고 졸 랐습니다요." "기래서 팔안?" "제가 감히 나으리 물건에 손을 대겠습니까요? 무조건 아니 된다고 했습니다. 어찌나 애걸하는지 혼이 났습니다요." "그 상인이래 도둑이 분명하니까니, 차후에도 절대 들이지 말라우... 아니디. 내 래 없을 때는 그림을 몽땅 태워 버려야 되갔구나. 기거이 마음 편하갔구만 기래. 잘못하다가는 상인놈들이 강도로 변할지도 모르갔어." "설마 그렇게까지야 할라구요." "사람 속을 어드렇게 알갔네. 욕심이 과하면 사람도 죽이는 법이야. 기래서 나 한테 오는 사람들 중에는 허파에 똥물이 든 놈들도 있다는 기야. 놈들ㅇㄴ 내래 죽은 다음에 아주 후한 값으로 팔아 장사를 하갔다는 욕심이거든." "그렇다구, 애써 그린 것을 불에 태우는 건 옳지 않습니다요." "도둑을 맞는 건 아깝디 않디만, 그 그림이 나한테 화를 미칠 수도 있는 기 야." "소인은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기러니까니, 개똥이래 문단속을 잘 하고 있으라우. 아무나 물 열어 주디도 말 고. 알갔네? 우리 딥에 오는 사람은 모두 내 그림을 얻으러 오는 손님이니까니, 그 중에 도둑도 있다는 기야. 우리 집에 개져갈 거이 뭐가 있갔네. 금이 있네 은 이 있네. 솥단지도 변변한 거이 없잖네." "나으리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요. 그럼, 나으리 그림이 그토록 비싼 값 입니까요?" "기건 내래 죽은 다음에 얘기야. 기런데, 기딴 걸 와 자꾸 묻네?" "그냥 여쭤 봤습니다요." "개똥아, 너 정말 아바지 오마니래 없네?" "얼굴이 생각나지 않아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죽어답니다요." "몇 살 때부터 혼자 또돌아다녔네?" "주막에서 밥 얻어먹다가 쫓겨난 것이 아홉 살 때였습니다요." "와 쫓겨났네?" "..." "대답을 못하는 거 보니까니, 도둑질을 했구만 기래. 내 말이 맞네?" "억울합니다요. 주모 반지가 갑자기 없어졌는데, 그걸 제가 훔쳤다구 뒤집어씌 우잖습니까. 절대 아니라고 대들었더니, 배은망덕한 놈이라면서 마구 때리길래 도망쳤습니다요." 개똥이가 설움에 겨워 엉엉 소리내어 우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는 절대 훔치지 않았다고 악을 썼다. "기럼, 누구래 그 반지를 훔쳤네?" "제가 그걸 어찌 압니까요." "아바지 오마니래 보고 싶지 않네?" "얼굴을 알아야 보고 싶지요. 얼굴도 모르는데 어찌 봅니까요." "만약에 네 아바지나 오마니가 나타나면 어카갔네?" "죽은 사람이 어지 나타납니까요?" "죽은 걸 네 눈으로 직접 봔?" "보지는 못했지만, 죽었으니까 죽었다고 일러 줬겠지요.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했습니다요. 살아 있지도 않은 사람을 보고 싶어하면 뭐 합니까." "기건 기래." "만약 살아 있다고 해도, 저처럼 거지 꼴이면 따라가지 않겠습니다요." "와 안 따라가네?" "밥을 굶을 바에야 뭐 때문에 같이 삽니까요." "이놈아. 네 놈이 밥을 얻어다가 아바지랑 오마니 배를 채워야 될거이 아니가. 기거이 자식이야." "싫습니다요." "기럼, 앞으로 어드렇게 살 생각이네?" "...죽을 때까지 나으리 곁에 있을 겁니다요." "요 아새끼래 말하는 것 좀 보라우. 누구래 너를 데리고 있갔대?" "평생 나으리 머슴으로 있을 겁니다요. 제발 내쫓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든 시 키는 건 다 하겠습니다요." 개똥이가 갑자기 바닥에 이마를 박고는 내쫓지 말라고 애걸애걸하였다. 순간 오원은 한양에 데려다 달라고 이용후한테 떼를 쓰던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이 떠올랏다. 그때 이용후가 박정한 사람이었으면 자신은 지금의 장승업이 되지 못 하였을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울컥 솟았다. 개똥이를 보니 꼭 그때 자신의 모습 같았다. "개똥아. 너 긴난봉가를 부를 줄 아네?" "...긴난봉가가 뭡니까요?" "모르면 그만 두라우. 내래 기것 때문에 여태 살아 있는 기야." "나으리. 무슨 말씀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만두라우. 어차피, 내래 그와 같은 어른이 되지 못할 거니까니." 오원은 개똥이를 외면하고 앉아서 이용후와 같은 후덕한 인물이 되지 못할 것 임을 생각하며 한숨만 거푸 내쉬었다. 자신의 한 몸 건사하기도 귀찮게 생각하 는 위인이 개똥이까지 돌볼 여유가 있을성싶지 않았다. 장차 술과 그림으로 정 처 없이 떠돌다가 죽을 결심을 한 마당에, 어설픈 동정 따위는 차라리 갖지 않 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8 1876년(고종 13년) 병자년 2월 26일에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 일명 한일수 호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는 근대 국제법을 토대로 하여 맺어진 최초의 조약이 며, 일본의 위협에 굴복하여 맺어진 불평등한 조약이다. 소위 운양호사건(일명 강화도사건으로, 1876년 9월에 일본 군함 운양호와 강화도에 포진하고 있던 조 선 수병간에 있었던 포격 사건)을 계기로 일본에서 정한론이 대두되면서 강경책 을 쓰기로 한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운양호사건에 대한 조선의 사과 및 모선 영 해의 자유로운 항해와 강화도 부근의 개항 등 개국을 강요한 조약이었다. 조정에서 서둘러 개국을 결정한 이유는 문호 개방의 세계적 추세, 무력에 의 한 일본의 정한론, 쇄국정책을 고수할 경우 대원군의 복귀를 초래할 위험이 있 다고 판단한 민씨 일파의 집권욕, 청나라의 권유 등이었다. 바로 전 해에, 경기도 일원의 수해로 민가 150여 호가 침수되고 수십 명의 인 명 피해가 있었는데다가, 기아에 허덕이던 백성들의 민란이 끊이지 않는데도 조 정에서는 어떠한 대책도 강구하지 못하였다. 이런 와중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되 자 임진왜란의 뼈아픈 상처를 기억하고 있는 백성들로서는 일본에 대한 공포를 떨쳐 버릴 수가 없었고, 이는 곧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인심이 점점 각박해져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챙겨야 한다는 이기주의가 팽배 하였다. 어느 주막을 가나 남정네들의 표정이 한결같이 침통하여 한숨섞인 푸념만 뱉 어 낼 뿐이었다. 그 중에는 정치에 관심을 둔 무리도 있어, 구관이 명관이라면서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두둔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혹자는 민시 일파의 개방정책 을 옹호하여 언쟁이 심심치 않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기는 여주집도 마찬가지였다. 오원은 그들 무리와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들 얘기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며칠 전에 해사 안건영이 죽었다. 나이가 불과 35살이고 보면 요절한 셈이다. 그는 산수와 인물화에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려, 도화서 화 원으로 있으면서 고종의 어진을 도사하였다. 비록 과작이기는 하나 그가 남긴 작품 모두가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의 산수화에 있어서는 안정된 구도로 배치한 사물을 매우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어, 그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안건영을 석연 양기훈의 소개로 알게 된 오원은 그와 호형호제하며 지냈다. 그가 오원처럼 술은 그다지 즐기는 편이 아니나 성품이 호방하고 온화하여 상대 방의 마음을 아주 편안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말수가 적으면서도 화담을 나눌 때만은 촌철살인의 날카로움이 있어 오원을 자주 감동시켰다. 오원은 안건영이 죽자 마치 자신의 팔 하나가 잘려 나간 것 같은 안타까움으 로 깊은 고독에 빠져 있었다. 스승인 유 숙과 아버지 같은 이용후의 죽음으로 받은 충격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한 중에 있어,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오원을 또 다시 외롬움에 빠뜨렸다. 주객들이 그렇게 세상 돌아가는 얘기로 목에 핏줄을 세우고 있어도 오원이 자 기들에게 고개 한 번을 돌리지 않자, 건장한 사내 하나가 불쑥 다가서는 것이었 다. 그의 얼굴에도 취기가 물감처럼 번져 있었다. "뉘신 줄 모르지만, 혼자서 쓸쓸하지 않으슈? 웬만하면 우리와 합석하여 세상 얘기나 나눕시다." 어투가 사뭇 시비조였다. 오원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술만 마셔 댔다. 그 러자 그가 한 발 더 다가섰다. "이보슈, 형씨. 내 말 안 들리슈? 귀먹었수?" 오원이 비로소 고개를 돌였다. 얼굴 피부가 울퉁불퉁 일그러진 꼴이 매우 천 박한 상이었고, 심술과 건달기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내래 세상 얘기에는 관심이 없으니까니, 님자나 얘기하라요." "그래도 그렇지, 사람 성의를 이리 무시하면 되겠소? 꽤나 도도하구만." "이보라요. 내래 혼자 있고 싶으니까니, 날래 가라요." 오원은 귀찮은 표정으로 그를 무시해 버렸다. 그런데도 사내는 물러서지 않고 서 오원을 잔뜩 노려보기만 하였다. "그렇게 못하겠다면 어쩌겠수?" "나한테 시비 거네?" 오원이 술잔을 팽개치듯 내려놓고는 눈을 한껏 부라렸다. 잠시 그가 흠칫 긴 장하는 눈치였으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오원을 만만하게 보는 것이 틀 림없었다. "그런데, 눈동자가 왜 그리 노랗수? 혹시 조상이 서양 오랑태 아니슈?" "내 눈깔이래 노랗든 파랗든 무슨 상관이네? 니가 밥 먹여 줬네?" "허허. 나한테 감히 시비를 건다?" "좋게 말할 때 꺼디라우. 기렇디 않으면 좋디 않아." "얼씨구. 제법 협박까지 하는군. 어디 그 주먹 맛 좀 볼까?" "이보라우. 내래 너 같은 건달패하고는 상대하고 싶디 않아야. 날래 꺼디는 거 이 좋아." 그러자 사내가 손바닥에 침을 탁탁 뱉으며 팔을 겉어 붙였다. 분위기가 험악 하게 돌아가자 여주댁이 황망히 달려와 사내 앞을 가로막았다. "왜 가만 있는 분한테 못 살게 구는 거유? 이분이 뭐라고 했길래. 김씨는 술 만 먹으면 아무하고나 시비를 붙지 못해 안달이우? 장안 객주집에 소문이 났습 니다." "사람 무시하는 거, 아주머니도 방금 보았잖수?" "김씨가 먼저 시비를 거니까, 그러지. 저 양반이 괜히 그러우? 어여 김씨 자리 로 돌아가우." "그렇게는 못하겠는걸. 나한테 혼 좀 나야 되겠어." "뮈이 어드래? 누구래 혼을 내? 아새씨래, 못됐구만기래." 오원이 발딱 일어나더니 사내 얼굴에 술을 확 뿌렸다. 그리고는 그도 팔을 걷 어 붙이며 여주댁을 한쪽으로 밀어냈다. "어디. 덤벼 보라우." 오원이 바위처럼 버티고 서서 그의 도전을 기다렸다. 사내가 또 손바닥에 침 을 뱉더니 오원의 아래 위를 훑어내렸다. 어디에다 일격을 가할 것인지를 탐색 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주객들이 모두 일어나 두 사람을 빙 둘러쌌다. 오원은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사내를 노래보고 있었다. "김씨. 뭘 꾸물거려?" "자신이 없어진 모양이지." "그 돌주먹은 어디로 갔나?" 주객들이 사내를 자꾸 부추겼다. 순간, 사내의 주먹이 오원의 얼굴을 향해 잽 싸게 날아갔다. 오원이 슬쩍 피하면서 그의 손목을 도끼자루처럼 움켜잡았다. 그 리고는 팔을 비틀어 사내의 등짝에 붙이더니 발로 그의 엉덩이를 힘껏 걷어찼 다. 그 건장한 사내가 힘없이 나가떨어져 부뚜막에다 얼굴을 갈았다. 오원은 거 기서 멈추지 않았다. 느닷없이 국이 설설 끓고 있는 가마솥 뚜껑을 열더니 사내 의 덜미를 잡아 얼굴을 솥에 처박을 직전으로 몰고 갔다. "네놈의 낯짝을 국에 처박아, 말아? 어카갔네? 기래도 조둥아리를 함부로 놀 리갔어?" "잘못했습니다. 어르신네를 미처 몰라뵈었습니다요." "정말, 잘못한 줄 아는 기야?" "물론입죠." 오원이 그제서야 덜미를 풀고는 손을 털었다. 사내 얼굴이 뜨거운 김을 쐬어 벌겋게 익어 버렸다. "가만 보니까니, 아새기래 천하에 불쌍놈이구만. 마지막으로 내 박치기 맛 좀 보라우." 오원이 사내의 멱살을 바싹 움켜잡는가 싶더니 이마가 그의 얼굴을 향해 정통 으로 가 박혔다.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발랑 넘어갔다. 이내 사내 코에서 선혈이 낭자하였다. "여주집에 다시는 얼씬하디 말라우. 알갔어?" "다시는 발걸음을 않겠습니다요." 사내가 코피를 줄줄 쏟으면서 무릎을 꿇고는 손을 싹싹 비볐다. 이때 문이 열 리며 개똥이가 헐레벌떡 들어섰다. 뿐만 아니라, 뜻밖에도 석연 양기훈이 따라서 들어서는 것이었다. 오원 집에 갔다가 개똥이 안내를 받고 온 모양이었다. 양기훈은 오원의 흐트러진 옷매무시와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를 번갈아 보며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음을 알아차렸다. "오원. 필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습네다...?" "못된 아새끼래 있어서, 버릇 좀 고쳐 줬시오." "이놈 말입네까?" "기래요. 아새끼래 천하에 불한당이구만요." "이놈. 김가야. 이분이래 누구신지 정말 모르고 대든 기야?" "미처 몰라뵈었습니다요." "아새끼래 또 민하게 굴었구만. 이분이 바로 장승업 화백이야. 네놈은 그 알량 한 힘만 믿고 깝죽대는 게 탈이야. 오늘 님자 만났구만기래. 날래 엎드려 싹싹 빌라우." 양기훈이 호령을 하자 사내가 다시 바닥에 이마를 붙여 놓고 손이 닳도록 빌 었다. "석연이래 이놈을 아십니까?" "이놈이래 한때 서대문 밖에서 꼭지딴 노릇 좀 했댔시오. 나한테도 한 번 혼쭐 이 났댔는데,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구만요. 천하에 망나닙네다." "해사 때문에 가뜩이나 심란한데, 저놈이래 가슴에 불을 지르지 뭡네까?" "거렁뱅이 출신이 기렇디 별수 있갔소?" "기건 기렇고, 석연이래 웬일이십네까?" "거야 오원이래 보고 싶어서 왔디요. 조금 일찍 왔으면, 좋은 구경 할 뻔했구 만요." "오셨으니 술부터 드시디요. 이보라요, 여주댁 여기 술상 좀 새로 봐 주시라요. 귀한 손님이래 오셨시오." 오원이 비로소 마음을 풀어 술상 앞에 다시 좌정을 하였다. 양기훈이 오원에 게 술을 부어 주자 단숨에 들이켰다. 그는 일단 채워진 잔은 절대 나우어 마시 는 법이 없었다. 꼭 한입에 마셔 버리곤 하였다. "해사가 너무 일찍 죽었시오, 겨울 서른 다섯에 죽다니..." "나도 오원 생각과 같습네다. 앞길이 구만 리나 남은 사람이 허망하게 죽었시 오. 그림이래 좋은 건 말할 것도 없고 인품도 훌륭하잖습네까." "기래서 내 마음이래 더 아파요. 못된 놈들은 빨리 뒈지고 해사 같은 사람이래 오래 살아야 하는데..." "이미 죽은 사람, 자꾸 생각하면 뭐 하갔습네까. 기런데, 오원." "말씀하시라요." "오원을 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시오." "...누굽네까?" "호는 소림이고 조석진이라고 합네다. 원래는 황해도 옹진에서 살았댔는데, 얼 마 전에 한양에서 왔시오." "황해도라면 나하고 동향입네다. 뭐하는 사람입네까? 그림을 그립네까?" "물론이디요. 임전 조정규어른이 조석진의 조부입네다. 도화서 화원으로 계시 면서 산수와 어해를 잘 그려 화명을 떨친 분이었디요. 기런데, 그분이 한떼 절제 사를 지내다가 말년에 황해도 귀향을 가게 됐시오. 조석진을 조실부모하여 조부 한테 가학으로 학문과 그림을 전수받았디요. 그 사람이 호를 소림이라 한 것도 작은 임전이라는 뜻으로 다 온 것이라 합네다." "기런데, 어드렇게 한양에 오게 됐습네까?" "마침 한양 친척중에 후사가 없는 사람이 있어 그 딥 양자로 오게 됐다고 합 네다. " "기랬구만요, 석연은 조석진을 어드렇게 만났습네까?" "저희 조부님과 조석진의 조부님 간에 왕래가 있어 알게 됐디요." "여하튼, 석연이래 발도 넓습네다." "기래서 마당발이라 하지 않습네까. 조석진이 우리보다 십년 연하이긴 하디만 인품이 있는 사람입네다." "기렇다면, 한 번 만나고 싶구만요." "빠름 시일 내에 데려오갔시오. 오원을 꽤 보고 싶어합네다. 운농은 요즘 어찌 지냅네까?" "지난달에 왔댔는데, 습작을 아주 열심히 하는가 봅네다. 부친의 화풍을 이어 받갔다고 하드만요." "유 숙의 산수와 영모는 참으로 본받고 싶은 거야요. 오원도 그분께 사사하였 으니까니 장치 그분 못지 않을 겁네다." "내래 어림도 없시오. 아마 죽을 때까지도 따르지 못할 겁네다." 그날, 오원과 양기훈이 술 두 동이를 비운 다음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 래도 오원은 술이 부족한 듯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였다 .양기훈이 갈 길이 멀다고 사양하는 바람에 그 정도에서 그칠 수 있었다. 오원이 모처럼 집에서 틀어박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 옆에는 여주집에서 가져온 안주와 술동이가 놓여 있고, 그는 그림을 그리는 짬짬이 술을 마셨다. 지 난번 불상놈하고 시비가 있고부터는 주막에 걸터앉아 술 마시기를 꺼렸다. 문자 를 모르기는 그런 놈이나 매한가지나, 경우도 없이 사람의 도리를 기존적으로 무시하고 사는 놈들하고는 상종하기가 싫었다. 주막이 주로 그런 인간들로 북적 대는 곳이라 경우를 따지고는 있을 곳이 못 되었다. 오원 자신이 누구를 능멸할 처지는 못 되지만, 그의 아버지가 비록 무반이라도 반열에 들어감을 이용후가 자주 깨우쳐 마음 한구석에서는 간혹 체통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더구나 유 숙 과 같은 스승 밑에서 그림뿐만 아니라 인성교육까지 받은데다가 해사 안건영, 석연 양기훈, 유 숙의 아들 유영표 등과 교유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은 바 있었 다. 술에 취하면 그와 같은 결심이 자주 깨지기는 하나 이튿날이면 곧잘 후회하 였다. 게다가 건달이나 진재없는 양반집 자제들이 와서 거들먹거리는 꼴이 더욱 보기 싫었다. 오원이 잠시 붓을 놓고 술잔을 기울리고 있는데, 개똥이가 호들갑스럽게 들어 와 서찰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웬 서찰이냐고 물었더니 홍세섭 나으리 댁에서 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홍세섭의 이름은 오원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임진생으로, 호를 석창이라 하고, 본관은 남양이었다.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홍 서봉의 후손으로 정묘년에 이미 진사가 되었다. 그는 수목과 영모, 절지 등으로 이름을 날리는 중이었고, 담묵과 대담한 농묵으로 감각적으로는 시대를 초월한 듯하고, 그림의배경은 추상적인 면이 강해 동물의 동작 묘사까지도 간략하고 속 도감 있는 필치를 보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화격에 감탄하였다. 오원은 서찰을 펴 보지도 않고 "서찰 내용이 무엇이네?" 하고 물었다. 그러자 개똥이가 글을 배우지 못해 내용을 모른다고 하였다. 그러자 오원이 갑자기 눈 을 부라려 서찰 가져온 놈을 들여 보내라 하였다. 곧 머슴 꼴의 사내아이가 들 어왔다. "서찰 내용이 무엇이네?" "소인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나으리께서 그냥 전하라고만 하셨습니다요." "기래? 나으리께 가서 아뢰어라. 내래 글을 몰라 읽을 수가 없으니까니, 네놈 귀에다 서찰 내용을 담아 달라고 말씀드리라우. 알갔네?" "네, 나으리." 오원은 그를 돌려 보내고 나니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장승업이 글을 배우 지 못해 일자무식인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인데, 홍세섭이 서찰만 달랑 보냈 음은 짐짓 우롱하자는 뜻으로 단정하였다. 한참 만에 홍세섭 머슴이 다시 왔다. "나으리를 모셔오라는 분부이옵니다." "와 나를 오라고 하시네?" "소인은 그저 말씀만 전할 뿐입니다요." "기렇갔구나, 기럼. 돌아가서 아뢰라우. 내래 바빠서 갈 수 없으니 까니, 나한 테 볼일이 있으면 친히 오시라고 하라우. 알갔네?" 그리고는 방문을 거칠게 닫아 버렸다. 생각할수록 홍세섭니 괘씸하였다. 비록 양반 출신에 나이가 위라고는 하나, 같이 예술을 하는 처지에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처사가 불쾌할뿐더러, 이름자나 겨우 쓰는 장승업이 세간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꼴이 가소로워 능멸하고 싶은 저의를 드러낸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한 것이 다. 오원이 아직도 분을 삼키지 못하고 있는데, 그 머슴이 또 왔다. 이번에는 틀 림없이 사과의 말을 전할 것이라 생각하였다. "와 또 왔네?" "...나으리께서 좋아하시는 주안상을 마련햇다는 말씀을 아뢰라고 하셨습니다 요." "기거이 정말이가?" "네, 나으리." "가서 다시 아뢰라우. 내래 양반집 술은 마시디 않는다고 말하라우." "허지만 나으리..." "날래 돌아가라우." 오원이 소리를 버럭 질러 머슴을 쫓아 보냈다. 그리고는 개똥이를 시켜 술 한 동이를 더 가져오게 하였다. 도대체 장승업을 뭘루 보는 기야. 오원은 분이 안 풀려 거의 바닥이 드러난 술 항아리를 들어 벌컬벌컥 들이마 셨다. 오원이 글을 배우지 못한 점을 늘 안타까워 했던 이용후 얼굴이 갑자기 떠올랐다. 오원이 자진하여 글 배우기를 거부하였지만, 만약에 그때 이용후가 때 려서라다 글을 배우게 하였더라면 지금즘 사정이 달라졌을 것 같은 생각이 후회 처럼 들었다. 곰곰히 생각할수록 홍세섭이 괘씸하였다. 아무리 술을 좋아한다고 해도, 겨우 술로 사람을 유인하겠다는 발상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때 마침 양기훈이 나타났다. 그가 언젠가 예고한 것처럼 조석진을 달고 왔 다. 조석진의 외모는 키가 훌쭉하고 얼굴은 갸름한 편이었다. 굳게 다문 입이 말 수가 적을 듯하였으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쾌활한 성품이 틀림없을 것 같았다. 오원이 본 첫인상으로는 매우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양 기훈의 소개로 조석진과 인사를 나눈 오원이 갑자기 표정을 침울하게 바ㄲ다. 눈치 빠른 양기훈이 오원과 술동이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오원, 이 시간에 웬 술입네까?" "내래 언제 시간 가려서 술 마십네까? 모처럼 습작을 하니까니 술 없이는 허 전하디 뭡네까... 사실은 조금전에 기분 나쁜 일이 있었시오." "...뭡네까? 또 건달패가 행패를 부렸시오?" "기런 게 아니라..." "오원은 조석진을 흘끔흘끔 곁눈질하며 홍세섭 얘기를 사족 없이 간략하게 전 하였다. 얘기를 다 듣고 난 양기훈이 뜻밖에 박장대소하는 것이었다. "석연, 와 기럽네까?" "오원. 석창이 워내 짓궂은 사람입네다. 일부러 기런 기야요. 그 사람이 오원과 교유하고 싶어서 장난을 친거디요." "설마..." "내 생각이 맞을 겁네다. 원체 호방해서 양반 상놈 가리디 않고 농을 잘하는 사람이외다." "아무리 기렇다 해도, 면식도 없는 사람한테 기러면 씁네까?" "오원도 석창과 술을 마셔 보면 알게 될 거구만요." "기럼, 내래 실수한 겁네까?" "아니야요, 오원답게 잘 하신 거외다. 아마 석창도 지금쯤 배를 잡고 웃을 거 구만요. 틀림없시요." "석창이 몹쓸 양반이구만요. 사람을 기런 식으로 놀리다니..." "석창을 만나 보면 오원도 마음에 들 겁네다." "꼭 귀신한테 홀린 것 같습네다. 어쨌든 귀한 손님이래 오셨으니까니, 술부터 시작하자우요. 소림도 술 하시디요?" 오원이 비로소 마음이 풀어져 조석진에게 방향을 돌렸다. 조석진은 처음 대하 는 오원을 탐색하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선 사람답지 않게 동공이 노랗 고 코 밑 수염이 듬성듬성 난 것이 우습기도 하고, 술 항아리를 끼고 앉은 모습 에서 금세 친금감을 갖게 하였다. "황해도 동향이라 반갑습네다. 내래 안악에서 나서 거게서 자랐지요." "말씀 들었습네다. 앞으로 지도받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라요." "기거이 무슨 말씀입네까? 내래 누구를 지도합네까. 당치도 않아요. 소림이래 조부님께 깊이 배웠다는 얘기를 석연한테 들었시오." "오원. 오늘은 어리둥절한 날인가 봅네다." "화풍을 서로 교환하면서, 습작하면 기거이 배우는 거 아닙네까. 어렵게 생각 지 마시라요." "기렇다면 몰라도..." 오원은 홍세섭에 대한 오해도 다소 풀리고 조석진을 새로 알게 되어, 입이 저 절로 벌어질 만큼 기분이 좋았다. 조석진과 화담을 나누는 동안 그가 매우 총명 하고 그림에 대한 논리가 정연한 데 놀라고 있었다. 어릴 때 조부한테 배운 가 학으로는 넘치는 실력을 가진 것 같았다. 잘은 모르지만 문장도 꽤 있는 것 같 고, 조목조목 캐내는 이론이 매우 박식하였다. 이래저래 오원은 기분이 좋아 술을 마치 물 마시듯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개똥이 말마따나 그 동안 소피 한 번 보러 간 적이 없이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 "오늘 기분 좋구만요." "오원이 좋다 하시니, 내래 따라서 좋구만요. 소림은 어떱네까?" "여부가 있습네까. 이리 환대해 주시니까니, 몸둘 바를 모르갔시오." 9 아침나절부터 마시기 시작한 술이 오후가 되면서 머리꼭지 까지 오르자 오원 은 앉은 자리에서 사지를 있는 대로 벌리고 누워 버렸다. 인사불성이 되어 콜ㄹ 드르렁드르렁 골아, 그 소리와 함께 술냄새가 진동하여 방 안은 온통 역겨운 악 취로 가득하였다. 코에 주독이 빨갛게 올라 마치 상한 딸기를 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 문 밖에서 "이리 오노라." 하는 고성이 두어 번 터졌다. 그러나 오원은 듣지 못하고 개똥이가 후다닥 뛰어나갔다. "오원 화백 안에 계시느냐?" 몸피가 웬만한 남자가 문턱을 넘어서면서 눈을 부리부리하게 번뜩였다. 단정 한 풍모로 보아 학식 높고 성질이 꼬장꼬장한 선비가 틀림없었다. "계시긴 하옵니다만, 지금은 주무십니다요." "냉큼 들어가서 손님이 왔다고 이르거라." "누구시라고 여쭈옵니까?" "홍 진사이니라... 아니다. 석창이라고 이르라." 개똥이가 '홍진사'와 '석창'을 번갈아 외며 방으로 들어갔다. 오원은 그때까지도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지경이었다. 개똥이는 대자 로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봉두난발에 옷섶은 있는 데로 벌어져 꼭항아리처럼 통통한 배가 온통 드러나고, 코를 골 때마다 문풍지 가 푸르르 떨었다. "나으리, 나으리. 일어나셔요." "개똥이가 몸을 아무리 흔들어도 오원은 전혀 느끼지를 못하였다. 차라리 배 위에 올라앉아 한바탕 요동을 치고 싶었다. "나으리. 빨리 일어나셔요. 손님이 오셨습니다요." 개똥이가 그의 몸을 때리다시피 하여 수없이 흔들어 대자 비로소 오원이 입을 쩝쩝거리며 눈을 떴다. "나으리, 손님이 오셨습니다요." "누구래 와?" "진사 석창이라는 분이 오셨습니다요." 그러자 오원이 상체를 비스듬히 세웠다. "누구래? 진사 석창? 기거이 누구가?" "소인은 처음 뵙는 분입니다요." 오원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흩어진 옷매무시만 대충 고치고는 문을 열었다. 허 우대 좋은 선비 차림의 사내가 서서 빙긋이 웃고 있었다. 그러나 오원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누구...십네까?" "실례하오. 나는 안국동 사는 홍세섭이라 하오." "홍세섭...? 기럼 석창선생입네까?" "그렇소이다. 내가 오원의 단잠을 깨운 것 같은데... 미안하오." "아닙네다. 누추하디만 들어오시라요.... 개똥아. 날래 방 좀 치우라우." 그제서야 오원이 정신을 수습하고자 나귀처럼 입을 투르르 털더니 허겁지겁 외모를 단속하였다. 오원 자신이 둘러봐도 방 꼴리 영락 없는 거지 소굴이라 전 에 없이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오원은 십년이나 연상인 석창에게 예의부터 깍듯하게 갖추고, 지난번의 무례 함에 대하여 정중하게 사과하였다. 그러자 홍세섭이 걸걸걸 웃으면서 무례는 자 신에게 있었음을 고백하였다. "오원의 심지가 대쪽 같다는 얘기를 듣고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던 것이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하세요." "석창 선생이래 호방한 분인 줄 모르고, 거저 양반의 허세로만 알았디 ㅁ네까. 용서하시라요." "오원의 소문은 진작에 알고 있는 터라, 오래 전부터 한 번 만나 보고 싶었소 이다. 장안에 떠도는 그림을 몇 점 보았소만, 요즘엔 어떠한 화재로 그림을 그리 시오?" "제 그림이래 보잘 것 있습네까. 석창 선생이래 그리신 유압도가 있는 병풍을 한 번 봤으면 좋갔습네다. "그야 어려울 것 있겠소? 오원이 내 집을 찾아 주신다면 광영으로 생각할 것 이오. 헌데, 오원은 혜산 선생한테 사사하셨다구요?" "유 숙 선생님하고 정학교 선생님힌테 배웠습니다." "혜산께서 일찍 타계하신 것이 몹시 안타까운 일이오. 그분의 작품 가운데, 매 와 꿩이 마주 바라보는 모습의 영모는 정말 뛰어난 것입니다. 휘늘어진 고목 가 지에 앉아서 꿩을 내려보는 매의 눈매와 깃털의 섬세한 필치는 누구도 다라갈 수 없는 필법이 아닐 수 없소." "기렇습네다. 공필도 뛰어나디만, 매와 꿩을 상하로 배치한 대칭구조가 그림에 안정감을 주고 있디요. 기런데, 그분의 대쾌도는 어드렇게 보십네까?" "글쎄요... 오원은 어찌 보고 계시오?" "감히 외람된 말씀이디만, 인물의 용모나 표정이 다른 인물의 그림보다는 필의 가 약할 뿐만 아니라, 특히 성곽이 주위 산수와 조화를 이루지 못한 듯합네다." "옳게 보시었소, 인물이 많이 등장시켜 인물마다 섬세한 필치를 가하기는 했으 나, 성곽을 철선묘로 쓰는 바람에 주위 산수와 위화돼 있소이다. 허나, 혜산 나 름대로 특징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소." "기건 기렇고, 모처럼 찾아 주셨는데 대접하는 것 잊었습네다. 비록 박주산채 디만, 술잔은 나누고 가져야디요." "허허, 마침 목이 컬컬한 중에 있었소이다." 그러자 오원의 입이 또 길게 찢어지며 그 즉시 개똥이를 불렀다. 개똥이가 얼 굴을 디밀고는 "주안상 말씀입죠?" 하였다. "기래. 아주 귀한 분이래 오셨으니까니, 여주댁한테 잘 전하라우." "그러실 줄 알고 소인이 벌써 주안상 갖다 놓았습니다요." "이놈아, 귀한 손님이래 오셨다니까니." "헤헤, 소인도 그리 알고 맛있는 안주로만 가져왔습니다요. 나으리께 오신 손 님은 모두 귀하신 분 아닙니까요. 그래서 술도 동이로 가져왔습니다요." "기특하구만기래. 날래 개져오라우." 석창과 오원은 서로 술잔을 주고받기 시작하면서, 마치 죽마고우처럼 격의 없 이 화담을 나누었다. 석창이 자꾸 오원의 최근 그림이 보고 싶다고 하여, 마지못 해 내보인 것이 그의 송풍유수도였다. 석창이 넋을 잃고 그림을 보는 동안 오원은 술만 마셧다. 쑥스러워하는 듯하 였으나 실은 석창의 견해가 궁금하였던 것이다. "신통치 않디요?" "별말씀을... 대체, 어디를 다녀와 그린 것입니까? 본 듯도 하고 아니 본 듯도 해서..." "북한산에 다녀오긴 했디만, 사실대로 그리디 않고 내 멋대로 그렸시오." "허어, 이 힘찬 필치 하고... 정말 놀라운 일이오. 과연 장안에 소문이 날 만도 하구요." "과찬이십네다. 개지고 있긴 하디만, 마음에 차디를 않아요." "아니올시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필법이오. 내가 오원과 인사트기를 참으 로 잘한 것 같소이다." 홍세섭은 오원의 그림을 보고 또 보고 하였다. 그리고는 오원의 얼굴을 빤히 응시하였다. 출생도 분명치 않은 일자 무식이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지,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소문대로 신이 내린 재주가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 라 단정하였다. "헌데, 여기 화제는 누가 쓴 것이오?" 오원이 문자 배운 적이 없는 사실을 뻔히 알고 묻는 것이다. 그러나 오원은 낯을 붉히거나 무안한 표정도 짓지 않았다. "내래 문자를 모르니까니, 해사 안건영이 써 줬디요." "그렇소이까? 두 분의 우의가 돈독했던 모양이오." "아까운 사람, 너무 일찍 죽었시오." "그렇소이다... 오원은 술을 대체 얼마나 마시면 양이 차시오? 내 집에 오실 것 에 대비해서 술을 준비할 생각이오만." "헤헤. 다다익선 아니갔시오?" "과연 그렇소... 조선 화단에 최북과 임희지가 있었소이다. 최 북은 임진생이고, 임희지는 을유생으로, 다 같이 영정조때 활동한 화가였소. 최북은 성격이 특히 대쪽 같았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한 세도가가 위협을 하며 글미을 그리라고 하자, 노한 나머지 '내 몸은 오직 나만이 마음대로 할 수 있소' 하고는 눈을 찔렀다지 않소. 그래서 늘 한쪽 눈을 가리고 다닐 만큼 기인이었다오. 그리고 임희지는 쌍 상투에다 거위털로 옷을 해 입고는 맨발로 월야를 거닐었다 하니, 두 사람이 다 기인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소. 요즘에 와서는 오원이 바로 기인으로 통한다 하 는데, 어찌 생각하시오?" "내 소문이래 기렇게 났습네까? 술 많이 마신다는 소문은 내 귀에도 닿았디만, 최북과 임희지와 비교할 만큼 기인 축에는 들지 못합네다. 어림도 없시오. 그분 들은 신선의 경지에 든 사람이야요." "앞으로 오원도 그리 도리지 누가 알겠소." "어림없시오. 석연은 어찌 지내는지... 요즘은 통 발걸음을 안합네다. 자주 왔댔 는데." "그저께 내 집에 왔었소이다. 머지않아 광주에 있는 사옹원 분원으로 간다고 합디다만." "기래요? 거게는 뭣 하러 갑네까? 도자기 굽갔다고 했시오?" "도화서에서 그리로 보내는 듯한데, 가서 하는 일이 뻔하지요, 도자기에 문양 을 그녀 넣는 일밖에 더 있겠소?" "기럼, 이미 떠났습네까?" "그런 것 같지는 않소만... 한 번쯤 들르지 않겠소?" 홍세섭이 술이 거나해지면서 곧 일어날 몸짓을 보였다. 오원과 오래 대작을 했다가는 인사불성될 것이 뻔하여 일찍 피할 생각이었다. 오원도 장차 최 북이 나 임희지와 같은 기인이 되고 말 것 같은 예감이 들면서, 자꾸 웃음이 나오려 는 것을 겨우 억눌렀다. "오늘은 이만 일어서야 되겠소이다. 일간, 아이를 시켜 오원은 모셔오도록 할 터이니, 지난번처럼 사양치는 마시오." "술이 아직 남았는데, 벌써 가십네까?" "곧 만나게 될 것이오. 그때 또 마십시다. 그럼..." 홍세섭이 굳이 가겠다고 하여 더는 붙잡지 않았다. 오원도 전주과 과했던 차 라, 눈과 혀가 진작에 풀어져 있었다. 그런에도 석창이 떠나고 나니 또 마음이 허전하였다. 인생의 즐거움을 술과 벗에 두고 있는 오원으로서는 당연한 것이었 다. 금준에 가득한 술을 슬카장 거후르고 취한 후 긴 노래에 즐거움이 그지없다 어즈버 석양이 진다 마라 달이 조차오노매 오원이 뜰을 서성거리며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는데, 석연 양기훈이 불쑥 들어왔다. 오원은 그를 볼 때마다 마치 오래 떨어져 있던 형제가 갑자기 나타난 것만큼이나 반가웠다. 그렇지 않아도 그가 오기를 며칠 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석창 홍세섭이 귀뜀한 말로는 그가 광주 사옹원 분원으로 내려간다고 하여, 가지전에 꼭 들를 것으로 믿고 있었다. "오원. 무슨 생각을 기리 합네까?" "석연을 기다리고 있었시오." "허허, 오원한테 천리안까지 있는 줄은 미처 몰랐습네다." "정말 광주로 내려갑네까? 며칠 전 석창한테 들었시오." "허허, 석창이 기어코 왔었구만요. 거럼, 거럼. 오원의 고집 앞에서는 무릎을 꿇어야디 석창인들 별수 있갔소." 오원은 석연을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 여기저기에 그리다만 그림들이 어 지럽게 흩어져 있어 정신이 산란할 지경이었다. 오원은 조심하는 법도 없이 그 림들을 마치 파지를 버리듯 아무렇게나 밀어 놓았다. "어째, 오늘은 술의 흔적이 아니 보입네다." "석연을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습네까. 정말 가십네까?" 오원은 마치 그와의 영원한 이별을 예감한 것처럼 얼굴에 초조한 빛까지 드러 내고 있었다. "내래 가고 싶어서 가는 거이 아닙네다. 도화서에서 가라고 하니까니, 마지못 해 가는 기야요." "아니 가갔다면, 포도청에 가둡네까?" "허허허... 그렇디야 않갔디만, 도화서 화원은 기럴 수밖에 없시오." "기럼, 나한테도 기러갔구만요." "기거야 모르디요. 경복궁 중건 때 오원도 이미 화원이었으니까니, 모를 일입 네다. 오원이라면 어카갔습네까?" "...내래 멀리 도망가갔시오." "예조판서의 명을 거역하갔다는 말입네까?" "포도청에 가두디만 않는다면 기렇게 하갔시오." "어쨌든 두고 볼 일이외다. 그 얘기는 나중에 또 하기로 하고 우선 목이나 축 입세다." 오원이 곧 개똥이를 불렀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다시 소리쳐 불렀는데도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요놈의 아새끼래 어데를 갔누..." "서두를 필요 없시오. 곧 오디 않갔습네까." 잠시 후, 개똥이가 왠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승업이 눈을 부라려 호통을 치려고 하자 "나으리." 하고 말을 가로 막았다. "여주댁한테 귀한 손님 오셨으니, 주안상 준비하라 이르고 왔습니다요." "내래 시키디 않았는데, 네놈 멋대로 핸?" "나으리 말씀이 뻔하지 않습니까요." "저 아새끼래 조둥이 놀리는 것 좀 보라우." "허허허... 저 녀석이 오원의 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습네다." "귀한 손님이래 오셨다구 핸?" "여부가 있습니까요. 소인 빼 놓고는 모두 귀한 손님 아닙니까요?" "아새끼 하고는... 주인 머리 꼬지에 올라않았구만. 허긴 기래야 밥술이라두 얻 어 먹을 수 있디." 오원은 술이 오기를 기다리며 잠시 사옹원 얘기를 화두를 삼았다. 사옹원은 원래 사옹방이었던 것을 개칭한 것으로, 궁중의 음식을 주관하던 이 조의 아문에 속한다. 궁중에서 쓰이는 곡류, 술, 간장, 기름, 채소, 과일을 조달하 고, 내연과 직조 등의 일도 맡는다. 그리고 여러곳에 어소를 두어 여기서 잡은 어물을 공상하였다. 그러나 사옹원에서 궁중 음식의 재료만 조달하는 것이 아니라, 경기도 광주에 분원을 두어 자기요에서 좋은 도자기를 굽게 하고는 이를 궁중에 공급하였다. 이때 도화서 화원들이 동원되어 도자기에 문양 그려 넣는 일을 맡아 하였다. 더구나 지난해 11월, 경복궁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전각 등 830여 칸이 소실 되었다. 그 바람에 수라간을 포함한 사옹원에도 화마가 덮쳐, 궁중에서 쓸 그릇 들을 급히 조달해야 했기 때문에 광주 분원의 자기요 일이 더욱 바빴던 것이다. "기럼, 석연을 한동안 보지 못하갔구만요." "글쎄요... 설마 기렇기야 하갔시오? 광주 땅이 여게서 과히 멀디 않은 곳이니 까니, 오원이 한가할 때 한 번쯤 내려오실 수도 있디요." "기렇게라도 해야 석연을 만날 수 있갔구만요. 이거야 원..." 오원은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내내 서운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였다. 그러자 양 기훈이 그를 위로할 뜻으로 슬쩍 운을 띄웠다. "기러면, 오원도 함께 가도록 청을 넣는 거이 어떻갔습네까?" "아닙네다. 내래 기딴 일에 묶이기는 싫습네다. 화가가 항아리나 밥그릇 따위 에 문양이나 넣어서 되갔시오? 첫째 답답해서 못할 일입네다. 지난번 경복궁 중 건 때도 몇번이나 도망칠 생각을 했댔시오. 혜산 선생 때문에 차마 기러디는 못 했디만." 오원이 그때를 돌이켜 진저리를 쳤다. 일생을 유유자적하며 살기로 결심한 그 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양기훈 앞이라 차마 입 밖에 낼 수는 없지만, 그 당시 고관대작들의 독려를 받으며 멸시당한 것을 생각하면 양반들만이 득실거리는 관청 일이 더욱 싫은 것 이다. 게다가 화원들이 애써 문양을 넣어 구운 도자기들이 권세 있는 사대부 집 으로만 들어간다는 사실에서는 화가 치밀기도 하였다. 성종 때만 하더라도 금은 기는 왕가에서만 사용하도록 못을 박았고, 유기와 백자는 세도 있는 양반집에서, 분청사기는 양반이나 부유한 중인들만 사용하였다. 결국 서민이나 농민은 기껏 해야 질그릇이나 목기를 ㅆ을 뿐이었다. 식생활의 필수품인 식기를 가지고도 신 분을 가려야 하는 그릇된 사회제도에 분노를 가지고 있는 승업이로서는 당연히 품을 만한 오기였다. 오원과 석연이 권커니 작커니 하면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개똥이가 들어왔다. 안국동에서 심부름 온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 "나으리를 모시러 왔다고 합니다요." "나를 모시러 와?" "안국동에서 왔다면 석창이갔디요. 언제 약조를 했습네까?" "석창의 유압도를 보고 싶다고 했더니, 한 번 부르겠다는 말은 했댔시오." "기렇다면 가야 되갔구만요." "석연도 함께 갑세다." "글쎄요... 불청객이라서 내키지 않는구만요."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기렇게 생각할 거 뭐 있습네까?" 오원이 하도 떼를 쓰듯이 권하여 결국 양기훈도 함께 갈 수밖에 없었다. 뜰로 내려서니 뜻밖에 홍세섭 머슴이 나귀의 고삐를 잡고 있었다. "나귀는 와 가져왔네?" "나으리 모시려굽쇼." "이런... 두 사람이 탈 수 있네?" "한 분밖에는 타실 수가 없습니다요." "기럼, 너나 타고 가라우. 우리는 걸어가갔어." "제가 어찌 탈 수 있갔습니까요. 두 분 중에 한 분이 타십시오." "기럼, 석연이래 타시라요." "석창이래 부른 사람은 오원이니까니, 오원이 타시라요." "번갈아 타면 되갔구만요. 기럼, 석연이 먼저 타시라요. 중간에 차례를 바꾸면 되니까니." "사람들이 웃갔습네다." 오원과 석연이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가 두 사람이 걸어가기로 합의하여 결국 나귀 등만 가볍게 하였다. 그러자 양기훈이 시조 한 수를 읊었다. 꽃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으면 술 생각하고 꽃피자 달 밝자 술 얻으면 벗 생각하네 언제면 꽃 아래 벗 데리고 완월장취하려뇨. 안국동 홍세섭의 집은 그리 호화스럽지는 않지만 솟을대문에 중문이 따로 있 는 전통적인 양반들의 가옥이었다. 정원과 후원이 모양 있게 꾸며져 있고, 한쪽 에 정자도 있었다. 홍세섭은 뜻밖에 양기훈이 동행한 것을 보고 얼굴에 놀라움과 반가움을 같이 담느라 분주한 표정이었다. 또 석연은 석연대로 불청객이 되어 쑥스러운 마음을 감추려고 애써 변명을 늘어놓았다. "불청객은 불청객이로되, 나한테는 반가운 손님이니 괘념치 마시오. 먼 길 오 시느라 고단하실 터이니 어서 안으로 드십시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오원의 눈길을 끈 것은 8폭 병풍이었다. 비단에 수묵화를 특히 물오리 그림이 눈길을 끌었다. 세로 넉자, 가로 자반의 상하 긴 폭에다 수 묵만으로 처리한 작품이었다. 두 마리의 오리가 위에서 아래로 늪의 물살을 빠 르게 가르며 헤엄치는 모양인데, 특히 물살이 부채꼴을 이루면서 화면 가득하게 퍼져 넘치게 한 것은 매우 대담한 구조였고, 부감법을 씀으로써 자연의 생동감 이 넘쳐 흘렀다. 단지 수묵인데도 담채보다 더 큰 효과를 내었고, 게다가 물결을 따라 곳곳에 찍어 놓은 묵점들이 주변의 수초와 어울려 조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이는 깊고 오랜 관찰이 없이는 그릴 수 없는 그림이었다. 오원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넋을 잃고 있었다. 소문대로 과연 일 품이었다. 오원은 그의 대담하면서도 독창적인 구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면 날타로우면서도 호방한 그의 성격이 제대로 반영된 듯하였다. 이미 술상이 들어와 있는 것도 모른채 그림 앞에서 물러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오원, 술이 곧 쉬겠소이다. 그리 오래 볼 것이 못 됩니다." "아닙네다. 내래 오늘처럼 탄복한 적이 한 번도 없었시오. 정말 놀라운 그림입 네다. 어드렇게 하면 저리 그릴 수 있습네까?" "어허, 듣기 민망하구료. 졸작을 놓고 그리 칭찬하시니, 마치 놀리는 것 같지 않소." "아닙네다, 아닙네다. 정말 훌륭합네다. 중국화나 조선화 중에서 여백 없이 화 면을 꽉 채운 것을 본적이 없는데, 여게서 처음 봅네다." "어허, 오원. 이제 그만 하시고 술이나 듭시다." "내래 혀가 짧아서 뭐라 더 말씀을 못 드리갔구만요." "신기를 가진 오원한테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구료. 오원을 위해 특별히 담근 술이니 맛을 한 번 보시구료. 술맛이야 오원 아니면 누가 평가를 하겠소. 잘 익은 것 같기는 한데..." "내래 술만 넉넉하면, 기거이 제일 좋습네다." 그래도 석창이 술맛 감정을 연해 구하자, 오원이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음 미하느라 눈을 지그시 감았다. "술맛이 어떻소?" "술맛도 일품입네다." "오원이 좋다고 하니 다행이요. 자아, 그럼 밤을 새워 마셔 봅시다." 안주도 상다리가 휘도록 차렸다. 말 그래도 대탁방장에 수륙진미였다. 오원으 로서는 난생 처음 대하는 음식이 더 많았다. "안주를 많이 준비하셨습네다. 말 그대로, 용미봉탕이구만요." "조선화단의 거목을 모신 자리에, 무차저처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네다. 내래 미천한 출신이라서, 이런 음식은 모두 처음이야요." "아무쪼록 많이 드시기를 바라오. 술도 마음껏 드시구요." "내래 유압도를 감상한 것만으로도 이미 취한 것 같습네다." 오원한테는 석창의 여덟 폭 병풍그림 가운데 유압도가 단연 압권이었다. 기타 영모나 기명절지도는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하였다. 나름대로 독창성을 발휘한 것은 틀림없으나, 왠지 오원의 마음에는 차지 않았다. 세 사람이 해질 무렵부터 미시기 시작한 술은 밤을 새워, 동창이 희붐하게 밝 아 오고 닭이 홰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한 사람씩 나가 떨어졌다. 그 바람에 머 슴과 찬모도 술 나르고 안주 대느라 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10 하루, 개똥이를 데리고 남대문 저자로 나간 오원은 오직 닭 파는 곳만 골라 다녔다. 그리고는 내내 구경만 하는 것이었다. 거렇게 한나절을 보냈다. 개똥이는 다리고 아프고 배고 고픈데다가, 닭은 사지도 않고 구경만 하는 주 인의 의중을 몰라 심술이 곧 곪아 터질 지경에 이르렀다. "나으리, 닭은 사지 않고 왜 구경만 하십니까요? 닭 처음 보십니까요?" "아새끼래... 배고프네?" "나으리는 시장하지 않습니까요?" "기러구 보니까니 배가 고프구만기래. 주막에 가서 국밥이나 먹자우." 개똥이가 바로소 기운을 얻어 입이 길게 찢어졌다. 오원이 개똥이 머리에 알 밤을 먹이며 비로소 주막으로 들어갔다. 주막은 장 보러 나온 남정네들로 몹시 북적거렸다. 오원은 국밥 두 그릇에 술 한 되를 시켜 놓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개똥이는 그 모습이 또 궁금하여 안달이 났다. 장안에 소문이 자자한 유명한 화가가 한낱 닭을 구경하는 데 잡아 먹은 시간과, 닭은 사지 않고 요리조리 뜯어보기만 하는 그 속내를 도무지 깨달을 수가 없었다. "나으리. 닭을 사러 오신 겁니까요, 아니면 구경하러 오신 겁니까요?" "사러 왔디." "그런데, 왜 사지는 않으시고 온종일 구경만 하시는 겁니까요?" "기거이 궁금하네?" "물론입죠." "좋은 놈으로 살라고 기러는 기야. 기런데, 닭이 모두 시들시들하잖네." "어차피 잡아막을 건데, 왠만하면 사지 않으시구요." "아새끼래... 잡아먹으려구 사는 거이 아니야." "그럼 달걀 빼먹으려고 사시는 겁니까요? 그럴려면 암탉 수탉 두 마리를 사여 야 되겠습니다요." 마침 국밥과 술이 탁자에 내려졌다. 개똥이가 입술을 ㅎ으며 숟가락을 뚝배기 에 꽂았다. "너는 몰라도 되니까니, 날래 밥이나 먹으라우." 오원은 술부터 따라 연거푸 두 잔을 담숨에 들이켰다. 개똥이가 한창 밥을 먹 다가 흘끔 밖으로 시선을 돌리는가 했더니 돌연 주막 뒤쪽으로 뛰어가는 것이었 다. 놈이 뒷간에 가는가 싶어 오원은 그저 빙긋이 웃고 말았다. 개똥이가 한참 만에 나타났다. 앉아서도 왠지 밖을 자주 곁눈질을 하였다. "아새끼래... 똥통에 빠딘 줄 알았잖네." "갑자기 배가 아파서 그랬습니다요." "기러니까니 천천히 먹으라우. 누구래 너 잡으로 오네?" 오원이 개똥이 머리에 또 알밤을 먹이며 자신의 그릇에서 밥을 반이나 덜어 주었다. "나으리는 왜 안 잡수십니까요?" "너나 많이 먹으라우." 이때 개똥이가 갑자기 탁자 밑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었다. 오원은 영문을 몰 라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와 기러네? 누구래 너 잡으로 완?" 그러자 개똥이가 식지를 입에 붙였다. 그제서야 오원이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 다. 웬 거렁뱅이 하나가 문턱에 발을 걸어 놓고 눈을 바삐 굴렸다. 누군가를 찾 는 눈치였다. 오원은 말없이 그의 동정을 살폈다. 거렁뱅이가 한참을 군시렁대다 가 슬그머니 등을 돌렸다. 그제서야 개똥이가 탁자 밑에서 나왔다. "너 쫓기고 있는 거디? 사실대로 말하라우." "나으리, 닭은 내일 사고 얼른 집으로 가십시다요." "대체 와 기러네?" "...우리 왕촙니다요. 그 왕초한테 잡히는 날이면, 그날로 소인 장사 지내는 날 입니다." "기럼, 청계천 모래산에서 도망쳤네?" "그렇습니다요." "와 도망쳤네?" "왕초가 너무 못 살게 굴어서 도망쳤습니다요. 자기는 가만 앉아서 우리보구 밥 얻어 와라. 도적질 해 와라 하면서 툭하면 마구 때리지 뭡니까. 밥 얻어 오는 건 어렵지 않지만, 매 맞는 건 못 참겠습니다요." 개똥이가 눈물을 뚝둑 떨어뜨리며 한참을 서럽게 울었다. 오원은 개똥이를 바 라보면서 잠시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개똥이처럼 왕초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거지 패거리를 만나면 영락없이 몰매를 맞곤 하였다. 같이 빌어 먹는 처지인데도 자기들 영역에 들어왔다고 하여 ㅇ어사정 보지 않고 개 패듯 하였다. "못된 놈이구만기래. 나한테 걸리면 혼을 낼 테니까니 염려 말라우." "나으리가 아무리 천하장사라도 거지패한테는 못 당합니다요. 수 십 명이 떼를 지어 달려 들기 때문에 어림도 없습니다요. 어서 닭을 사 가지고 집으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염려 말래두 기러는구나, 왕초 눈에 띄면 나를 아버지라고 하라우. 기러면 놈 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기야." "감히, 나으리한테 그래도 됩니까요?" "왕초 앞에서만 기러면 될 거이 아니가." "알았습니다요." 개똥이가 그제서야 눈물을 닦고 남은 밥을 마저 먹었다. 오원은 그를 내려보 며 자꾸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부모를 여읜 고아가 장차 누구를 의지하며 이 모진 세상을 살 것인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오원으로서도 개똥이를 마냥 데리 고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앞으로 뜬구름처럼 흘러흘러 떠돌 자신의 인생 여정을 생각하면 개똥이가 마음에 걸렸다. 어디 머슴자리라도 구해 줄 수 있으 면 다행이겠지만... 오원이 주막을 나서자 개똥이가 그의 허리춤을 단단히 움켜잡고는 왕초 눈에 띄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였다. 불안에 떠는 개동이를 생각해서도 빨리 저잣거리를 떠나야 될 것 같았다. 오 원은 서둘러 닭 장사가 몰려 있는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개똥이는 여전히 오우 너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었다. 종자가 다른 수탉 두 마리와 암탉 두 마리를 골라 막 셈을 치르려는데, 아까 주막 문턱에 버티고 섰던 그 거지가 주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개똥이는 이미 사색이 되어 몸을 사시나무 떨 듯 하였다. "무서워하디말고, 내가 이른 대로만 하라우. 알갔네?" "네, 나으리." 오원은 일부러 왕초라는 놈한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유유히 저자를 걸어나 갔다. 그러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둘이서 저자를 막 빠져 나오는데, 왕초라는 놈이 오원의 앞을 딱 가로막는 것 이었다. 뿐만 아니라 놈의 주위에는 패거리인 듯한 거지 대여섯 명이 이미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무슨 일이네? 나한테 볼일 있네?" "그 아이를 내 놓으슈." "뭐이 어드래? 남의 아들을 와 내놓으라는 기야?" "어째서 그 아이가 댁의 아들이란 말이우?" "그럼 네 자식이네?" "자식은 아니지만, 내가 티운 아이유." "고맙구만. 기런데 이자는 아바지를 만났으니까니 간섭하디 말라우. 알간?" "정말 댁의 자식이우? 야아 개똥아, 이 사람이 정말 네 아비냐?" "정말 우리 아버집니다요." "...정말이지?" "그렇다니까요." "이보라우. 내 말을 믿디 않네? 기렇다면 포도청에 가서 시비를 가려 보갔어? 남의 자식이래 빼앗으면 그 죄가 무엇인지 모르네?" "개똥이가 정말 댁의 자식이우?" "어허, 기렇게 믿지 맛하갔으면 날래 포도청으로 가자우. 네놈들이래 곤장 맛 을 봐야 정신을 차리갔구만기래. 포도대장 나으리래 내 한테 사촌 형님인 걸 모 르는 모양이니까니, 가서 보여 주갔어. 날래 가자우." "...그렇다면 좋수다. 그 동안 우리가 키워 준 값이나 내시우." "허허. 네놈이 언제 야를 키워 줬네. 야가 제 발로 걸어다니며 밥 얻어먹은 기 야. 닙은 삐뚫어졌어도 말은 바르게 하라우. 허디만 네놈들 꼴이 하도 불쌍하니 까니, 몇 푼은 주갔어." 오원은 놈들과 오래 대거리하기가 싫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왕초라는 놈이 침을 삼키며 오원의 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오원이 엽전 열 냥을 던져 주자 놈이 연신 굽신거리며 물러갔다. "나으리. 재주가 정말 훌륭하십니다요." "이놈아, 입 조심하라우. 누군가 엿들을지도 모르는 기야." 오원은 주위를 몇 차례 살피고는 방향을 엉뚱하게 안국동 쪽으로 잡았다. 개 똥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오원은 바싹 따라붙었다. "수표교는 이쪽이 아니잖습니까요."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하라우." 그리고는 뒤를 자주 돌아보았다. "놈들 중에 우리 뒤를 밟는 놈이 있을 기야. 우리가 곧장 딥으로 가믄, 놈들이 래 네놈이 있는 곳을 알 거이 아니가, 기렇게 되면 내래 딥에 없을 적에 네놈을 또 붙들어가고 말아." "정말 그렇습니까요?" "놈들이 내래 한 말을 믿을 것 같네? 어림두 없어야." "그런데, 돈은 왜 주셨습니까요?" "놈들을 빨리 떨쳐 버려야 하잖네." "고맙습니다요.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네놈 장래가 참으로 걱정이구만." "소인은 나으리만 따라다닐 겁니다요." 오원은 먼 길로 우회를 거듭한 끝에 따라 붙는 놈이 없음을 확인하고서야 거 처로 돌아왔다. 개똥이는 그제서야 안심이 된 듯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털썩 주 저앉았다. "닭한테 모이 좀 많이 주라우. 양잿물 먹은 놈처럼 닭이 여엉 시들시들하구나. 저래서야 어디 그림값 하갔나." "그림 그릴려구 닭을 사 오신 겁니까요?" "기럼, 네놈 보신해 줄라구 산 줄 아네?" "헤헤, 나으리 잡수실 때 날개 한쪽 얻어먹을까 했습니다요." 오원은 이튿날부터 온종일 쪼그려 앉아 닭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수탉의 벼슬 을 만져 봤다가, 혹은 눈을 들여다봤다가, 혹은 깃을 쓰다듬으며 감촉을 느껴 보 기도 하였다. 그렇게 관찰하는 일로 연사흘을 허비하였다. 나흘째 되는 날, 오원은 상의를 활활 벗어던지고 비로소 닭 그림의 구도를 잡 기 시작하였다. 그 옆에 술상이 놓여 있음은 불문가지다. 첫날 그림은 고목 그루터기에 수탉 한 마리가 다리 하나를 들고 서서 아래를 굽어 보는 모양으로 화폭 중앙을 채워 놓았고, 오른 쪽 상단에 잎이 듬성듬성 달린 나뭇가지를 그려, 허전하다 싶은 여백을 자연스럽게 장식하였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자 오원은 또 닭을 소재로 그림에 착수하였다. 이번에는 비단을 화폭으로 삼았다. 그는 화폭 왼쪽에다 괴석을 육중하게 앉히고, 그 위로 긴 대나무가 화폭 끝까지 닿도록 뻗쳐 놓았다. 그리고 괴석 밑으로는 각종 화초 와 잡초들을 배치하여 수탉과 암탉 한 쌍이 풀을 뜯으며 노니는 구도였다. 먼저 그린 계도에서는 수탉에 입힌 담채가 주황색 일색이어서 벼슬을 붉게 채색하지 않았으나, 이번의 죽원양계는 현란한 채색을 도모하여 사실성에 역점을 두었다. 닭의 영모는 말할 것도 없고, 화초와 잡초들에 대한 자상한 세필은 오원의 호방 한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 오원은 두 그림을 벽에 걸어 놓고 몇날 며칠을 가필하였다. 본인으로서도 특 별히 애착이 가고 제법 만족하는 표정이었다. 개똥이도 주인 옆에 쪼그리고 앉 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나으리, 우리 집에 닭 세 마리가 더 생겼습니다요." "닭이 더 생기다니, 거거이 무슨 말이가?" "그렇지 않습니까요? 밖에 있는 것말고 나으리 방에 도 세 마리가 더 있지 않 습니까." "아새끼래... 네놈 눈에도 저거이 닭처럼 보이네?" "그럼 닭이 아니고 오립니까요? 꼭 살아 있는 모양이어서, 언제든지 뛰쳐 나올 것 같지 않습니까." "기렇게 보인다니, 다행이구만. 너는 날래 가서 술을 더 개져오라우. 오늘밤은 술로 새워야 되갔구나." "기분이 좋으십니까요?" "기래. 기분이 나쁘디는 않구만, 이럴 때 술을 마시디 않을 수 없디." 오원은 대자로 누워 노랫가락을 흥얼흥얼 읊으면서 벽에 걸어 놓은 그림을 보 고 또 보고 하였다. 잠시 후 개똥이가 들어오면서 새로운 인기척이 덧붙은 것을 보니 누군가 방문 객이 온 듯 싶었다. 그가 누구든 술 대작할 사람이 왔으니 오원으로서는 더없이 반가웠다. "나으리 손님 오셨습니다요." 개똥이까지 신바람이 나서 주인을 부르는 목청이 매우 호들갑스러웠다. 오원 이 문을 열고 목을 빼자 뜻밖에 소림 조석진이 서 있었다. "오원 선생님. 그간 안녕하셌습네까?" "소림. 어서 오시라요. 마침 대작할 사람이래 없어서 심심했시오." "올 적마다 환대해 주시니까니, 황송합네다." "이자 그딴 인사는 그만두시라요. 그림 그리는 벗끼리 번번이 인사치레는 당치 않아요." 소림은 자리에 앉자마자 벽에 걸린 두 그림에 눈길을 모았다. 그는 마치 눈이 침침한 것처럼 눈을 닦고 또 닦고 하였다. "이 그림은 언제 그린신 겁네까? 채색이 아직 마르지 않은 걸로 보면, 붓을 놓 은 지 얼마 안 된 것 같습네다만." "소림이 바로 보았시오. 방금 붓을 놓았시오." "소생이래 감히 외람된 말씀입네다만, 가히 일품입네다. 정말 놀랍습네다. 주 작품이래 후대에 길이 남을 것이구만요." "어허, 소림이 자꾸 기러니까니 내래 민망하구만요. 술이나 듭세다." 오원이 무안감에서 벗어나려고 조석진을 억지로 술상 앞으로 끌어 앉혔다. 그 런데도 조석진은 마치 그림에 취해 정신이 몽롱해진 것처럼 표정이 잔뜩 굳어져 있었다. "하나쯤은 화제를 넣는 것이 어떻갔습네까?" "기래요? 내래 문자가 없으니까니, 소림이 넣는 것이 어떻갔소?" "제가 감히 선생님 작품에 손을 댈 수 있갔습네까. 당치 않습네다." "기렇디 않아요. 우리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의미에서 소림이 하나 넣어 주시 구래. 왼쪽 것은 아직 마르디 않았으니까니. 오른쪽 것으로 합세다." 오원은 조석진의 사양을 무시하고 그 즉시 그림을 떼어 왔다. 고목 위에 수탉 한 마리 홀로 서 있는 그림이었다. 조석진의 난감해 하면서도 화제를 생각하느라고 고심하는 눈치였다. 그리고는 자신이 화제를 넣어도 되겠느냐고 다시 물었다. "기렇대두요. 소림 마음대로 화제를 넣으시라요." 오원이 벼루와 붓을 조석진 앞에 갖다 놓았다 그는 또 한참을 생각하더니 비 로소 붓을 들었다. 그리고는 그림 왼쪽 하단 구석에다 '오원 장승업이 임양거사 법을 따르다'을 일필휘지로 써내렸다. 임양은 중국 명나라 선덕연간의 화가로 수 묵의 기러기 영모를 잘 그렸는데, 오원이 그린 닭의 영모가 임양의 셈리한 필법 과 버금간다는 의미로 화제를 넣은 것이다. "괜히 화제 말씀을 드렸다가, 선생님 작품을 망가뜨린 것만 같습네다. 너그럽 게 용서하시라요." "기거이 무슨 말씀입네까. 나를 감히 임양한테 견주었으니, 오히려 빛이래 나 디 않았습네까." "기렇게 용서해 주니까니, 마음이 조금 놓입네다. " "기런데 와 소림의 그림은 보여 주디 않습네까? 어해와 산수가 뛰어나다는 소 문이래 났는데, 한 번 보여 주시라요." "오원 선생님 앞에 감히 보여 줄 만한 것이 못 됩네다. 후에 기회가 닿으면 딥 으로 모시갔시오." "꼭 보여 주시라요. 약조했시오?" "...알갔습네다." "자아, 오늘은 술이나 실컷 마시자우요." 오원은 조석진으로부터 그의 조부인 임전 조정규에 대한 얘기와 조석진이 조 부한테 가학으로 배운 얘기 등을 주로 들었다. 그러면서 오원은 자신의 불우한 시절과 이용후, 변 주부, 이응헌 등을 만나 은혜 입은 얘기를 들려 주었다. 이용 후를 만난 대목에서는 코를 훌쩍거리며 눈물을 자주 찍어 내기도 하였다. 오원은 자신의 그림에 차츰 격을 높여야 된다는 결심을 세우면서 당시 장안에 서 이름을 내고 있는 화가들과 자주 교유함은 물론, 조선 화단으로 하여금 남종 문인화의 영향을 받게 한 중국의 동기창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관심을 가졌다. 특히 그가 주창한 '고화의 임면사상'에 절대적으로 수긍하였다. 동기창은 문인화가로서, 중국 명나라 말기 제일의 인물이었다. 그의 화풍과 소 론은 후대 문인화가에게 큰 영향을 입혔고, 그의 저서 '화선실수필'을 통해 남종 화가 북종화보다 더 정통적인 화풍으로 한다는 상남폄북론을 주창하였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스스로 고아수윤이라 불렀고, 그의 먹물 빛깔의 변화가 무궁한 가운데 간명한 산수화를 많이 남겨, 실제 화업과 화론을 병행한 화가였 다. 오원은 동기창의 화론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독창성을 개발 하기 위해 먼저 실물을 깊이 관찰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로 결심을 ㄱ 혔고, 그러기 위해서는 조선 팔도강상을 두루 다니며 자연을 근본적으로 이해하 여야 한다는 지론을 세워 놓고 있었다. 그는 옛날 이응헌 집에 머슴으로 있으면 서도 습작을 위해 정원이나 후원의 나무와 꽃과 연목의 고기들을 관찰하는데 많 은 시간을 허비하였다. 그 바람에 집사한테 엉덩이도 숱하게 걷어차였고 구박도 많이 받았다. 오원이 혼자 술잔을 기울이면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때로는 흥분도 했다가, 때 로는 우울하기도 했다가, 때로는 기분이 좋기도 한 속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밖 에서 "이리 오노라." 하고 누군가 고함을 질러 대는 것이었다. 그럴 때 개똥이가 먼저 뛰어나감은 물론이다. 오원은 고함이 양반의 것이 틀림없다는 판단이 들면 서 까닭 없이 심사가 뒤틀렸다. 잠시 후 개똥이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놈의 얼굴 이 마치 호랑이를 목격하고서 놀라 들어온 표정이었다. "나으리, 나으리, 어서 나가보셔요. 아주 지체 높은 분이 오셨습니다요." "누구래 와?" "사인교를 타고 오신 걸 보면, 어느 대감쯤 되는가 봅니다요." 그가 사인교를 타고 왔다는 말에 궁금하기는 했지만, 아까부터 불편했던 심사 가 채 가라앉지 않아 짐짓 태연해 하였다. 개똥이만 몸이 달아 오도방정을 떨었 다. "나으리, 어서 나가 보셔요." "아새끼래..." 오원은 그제서야 옷매무시를 대충 단속하고 예전처럼 문사이에다 목만 끼워 넣었다. 개똥이 말대로 그의 지체가 높긴 높은 모양이었다. 사인교 앞에 떡 버티 고 서 있는 모양새가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십네까?" "자네가 장승업이라는 화원인가?" 오원은 그가 대뜸 하대하는 모양에 더욱 구역질이 나서 어떻게든 그에게 망신 을 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오원은 여전히 문 사이에다 목을 끼운 채. 마 치 거지 대하듯 떨떠름한 표정을 고수하였다. "기렇습네다만, 댁이래 누구신데 남의 뜨락에까정 사인교를 들여 놓습네까? 조 선에 기런 법도래 있시오?" "어허. 내가 누군지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그러자 옆에서 내내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머슴인지 졸개인지 하는 놈들 중 에 하나가 불숙 나섰다. "이 어른은 홍문관 박인구 대감이시오. 친히 화백을 보러 오셨으니, 나와서 예 를 갖추시오." 그가 주인 대신 제법 위엄을 부리며 오원은 꾸짖는 태도였다. 순간, 오원은 부 아가 더욱 치밀어 욕이 목구멍을 들락날락하였다. 생각 같아서는 대뜸 '대감인지 꽂감인지는 모리디만...'을 내뱉고 싶었지만 왠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대신 싸움 꾼처럼 숨만 씩씩거렷다. "대감이래 와 나를 찾아왔습네까?" "어흠... 자네 그림이 좋다는 소문이 있어, 한 점 얻으러 왔네?" "그림은 밥이 아닙네다. 얻으러 왔다고 해서 거냥 주는 거이 아니야요." "보아하니 소문대로구나. 아무리 문자가 없기로서니, 예의도 갖출 줄 모르는 가?" "예의는 문자 있는 양반이래 먼저 갖추시라요. 양반은 처음 상면에 하대를 해 도 되는 기야요? 내래 기런 양반한테는 그림을 줄 수가 없시오." "어허, 저런 못된 것이 있나. 주리를 틀어도 단단히 틀어야 되겠구만." "주리를 틀든지 사지를 찢든지 마음대로 하시라요. 내래 그림은 줄 수 없으니 까니." "오원은 더 이상 대거리할 값어치도 없다 싶어 문을 쾅 닫아 버렸다. 그러자 개똥이가 발을 동동 구르며 "나으리 나으리" 만 외쳐 댔다. 잠시 후, 그들이 나가는 인기척이 부산하게 들리고, 곧 이어 개똥이가 뛰어들 었다. 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나으리. 그분이 누구신데, 그토록 박대를 하십니가요. 나으리보담 지체가 가마 득하게 높으신 분 아닙니까. 이러다가 봉변을 당하시면 어쩔려구 그러십니까요. 어이구, 답답해라." "개똥아. 날래 가서 술 더 개져오라우." "나으리. 지금 술 드실 때가 아니옵니다요. 곧 사단이 날 일인데..." "아새끼래 말이 많구나야. 날래 술 개져오라우." "조금 전에 가져온 술을 그새 드셨습니까? 소인이 보겠습니다요... 아직 반이나 남았습니다." "미리 개져다 놓으라우." "알았습니다요. 그런데 나으리께서 왜 그리 와가 나셨습니까요?" "...기거이 알고 싶네?" "네. 나으리" "방금 그 양반이래 내 그림을 얻으러 왔다지 않았네? 기러믄, 제놈이 먼저 예 의를 갖춰야 될 거 아니가. 기런데, 오히려 큰소리를 치니가니 내래 화 안 나게 생겼네? 오원 장승업이래, 만만하게 보면 안 되는 기야. 내 그림을 기렇게 함부 로 주는 건 줄 아네? 어림두 없어야. 저런 양반한테 주느니 차라리 개똥이한테 주구 말갔어. 양반이래 뭐이가. 백성들 피 빨아먹고 사는 놈들 아니네. 기딴 놈 들이 누구 앞에서 거드름을 피우네? 개똥아, 내 말이 틀렸네?" "나으리 말씀이 맞습니다요. 그렇지만 나으리처럼 감히 그런 생각이나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요. 그랬다가는 당장 목을 벨 겁니다요." "시끄럽다. 네놈하고 기딴 얘기는 해서 뭐 하갔네. 그 대신, 나한테 긴난봉가나 배우라우, 기것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남은지도 모르갔어." "나으리께서 가르쳐 주시면 기꺼이 배우겠습니다요." "기럼, 지금부터 따라 부르라우." 정방산성 초목이 무성한데 밤에나 울 닭이 대낮에 운다 에-에헤에에헤요 어림마 둥둥 내 사랑아 개똥이는 눈만 멀뚱거릴 뿐 입을 달싹대지 않았다. "뭐 하네? 따라 부르라지 않았네. 기래야 배우디." "그렇게 긴 걸 한꺼번에 부르시면 어떻게 따라 부릅니까요... 그런데 나으리." "...와아?" "왜 우십니까요?" "...내래 울었네?" "지금 눈물을 흘리시잖습니까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구만 기래." "울지 마셔요. 나으리께서 우시면 소인도 웁니다요." "괜찮아, 사람이래 울고 싶을 때 실컷 울아야 되는 기야." "나으리도 슬플 때가 있습니까요?" "아새끼래... 사람은 누구나 슬플 때가 있는기야." 거어럼, 인생은 누구나 슬픈 기야. 11 10월이 되면서 세상이 온통 가을빛으로 뒤덮였다. 산등성과 계곡은 붉고 노란 단풍들로 일색을 이루었고, 바람이 서늘한 기운을 몰고 다닐 때마다 퇴색한 나 뭇잎들이 마치 눈발처럼 휘날려 떨어졌다. 그 밑으로는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가는 곳마다 발목이 깊이 잠기곤 하였다. 바위에 올라앉아 높고 청명한 하늘을 올려보려 오원은 자주 한 숨을 내쉬었 다. 쓸쓸한 계절 탓도 있고, 낯선 곳에 묻혀 있을 일이 가슴을 짓눌러 마음이 스 산하였다. 그러한 오원의 마음을 나는지 모르는지 개똥이는 토끼를 잡겠다고 계 곡을 오르락내리락 가로세로 뛰어다녔다. 며칠 전 도화서 관원이 느닷없이 들이닥쳐, 10월 초닷새까지 광주 사옹원 분 원으로 내려가라는 말만 던져 놓고 갔다. 오원이 관원을 멀거니 바라보는 사이 에 그는 아무런 사족도 달지 않고 훌쩍 가버렸다. 이러구저러구 변명을 늘어놓 을 새도 없었다. 그날부터 오원은 갈 등에 빠졌다. 가기는 싫고, 그렇다고 사옹원의 명을 무시 할 처지도 아니었다. 언젠가 양기훈한테는 분원에서 썩느니 차라리 도망을 가겠 다고 큰소리를 치기는 했지만, 막상 명을 받고 보니 차마 그럴 수가 없었던 것 이다. 일개 화원이 상급 관청인 사옹원의 명을 뚜렷한 명분도 없이 함부로 거역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원은 깊이 생각한 끝에 양기훈도 볼 겸 해서 광주로 내려갈 결심을 하고 말 았다. 문제는 개똥이였다. 놈을 떼어 놓고 갈 경우 다시 거지로 떠돌 것이 분명 하고, 결국 왕초한테 붙잡혀 곤욕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데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개똥아. 내래 나라의 명을 받아 먼 곳으로 떠날 판인데, 너는 어카갔네? 네놈 을 데리고 갈 수가 없는 처디야." "가시는 곳이 어딥니까요?" "경기도 광주 땅이야. 거게 가면 사옹원 분원이래 있어, 도자기를 굽는 곳인데, 화원들이 도자기 문양을 그려 넣는 기야." "저도 나으리를 따라 가겠습니다요." "답답하구만, 거게 가면 여게처럼 내래 혼자 있을 수가 없는 기야. 기렇게 되 면 네놈 있을 곳이 없디 않네." "차라리, 거기 가서 거렁뱅이 노릇 하는 것이 낫습니다요. 여기 혼자 있다가는 왕초한테 붙들리고 맙니다. 왕초한테는 죽어도 못갑니다요. 그러니, 나으리가 계 신 근처에만 있게 해 주시어요." "...답답하구만." "저를 떼어 놓고 가시려면 차라리, 죽이고 가시어요. 그것이 왕초한테 붙들리 는 것보담 백 배 낫습니다요." 개똥이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벌써 훌쩍훌쩍 울기 시작하였다. 오원은 그날 밤 장고한 끝에 결국 개똥이를 동행키로 마음을 굳혔다. 황해도 에서의 어린 시절, 애걸하며 이용후를 따라 붙었던 장면을 떠올려 개똥이를 차 마 버려 둘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과부 사정 과부가 안다고, 자신이 개똥이를 보 살펴 주지 않으면 거렁뱅이 고아를 누가 돌봐 주겠는가 싶어 마음이 약해졌다. 거기 사정을 봐서 분원 잡일이라도 맡길 수 있을 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 고 있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면서 서늘했던 기온이 갑자기 쌀쌀하였다. 시장하기도 하고 다리 기운도 없어 오원은 개똥이를 앞세워 주막으로 들어갔다. 개똥이는 마냥 즐거운 표정이었다. 옛날 이용후를 따라다니며 촐랑대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오원은 주막에 들어서자마자 우선 술 한 대접부터 들이킨 다음 국밥 두 그릇 을 시켰다. 외딴 주막이라 그런지 방과 마루에 나그네들로 득시글거렸다. 일단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난 오원은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마치 밥 들 어갈 배 따로 있고 술 들어갈 배가 따로 있는 사람처럼 술이 끊임없이 들어갔 다. 이때 중인 복색의 웬 사내가 다가와 오원한테 아는 체를 하였다. 생소한 얼굴 인 것도 같고 어찌 보면 낯이 익은 얼굴인 것도 같은데, 좀처럼 기억을 끄집어 낼 수가 없었다. "혹시 오원선생 아니시오?" " 기렇습네다만..." "나를 알아보지 못하시는 것 같소이다." "글쎄올시다래... 어디메서 만난 듯도 한데 기억이 나지 않습네다. 누구십네 까?" "경복궁 중건할 때 화원으로 일했었지요. 그때 오원께서는 사정전 벽에 쌍룡을 그리셨잖소." "...기렇디요." "그때 나도 선생 근처에 있었소이다. 나는 이수복이라 하오만." "아아. 이자 생각이래 납네다. 그 동안 세월이 많이 흘러서, 얼른 알아뵙지 못 했습니다. 용서하시라요." "용서랄 것가지야...세월 탓인걸요. 헌데, 여기는 어인 이이시오?" "광주 땅으로 가는 길에 하룻밤 묵을 생각입네다만. 선생께서는..." "나도 광주로 가는 길올시다. 혹시 분원에 가시는 길 아니시오?" "기렇습네다. 기럼, 선생께서도 거게 가십네까?" "그렇소이다. 분원으로 가라는 명을 며칠 전에 받았지요. 선생의 처지도 나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기렇구만요... 앉으시라요. 마침 대작할 벗이래 없어서 적적했댔시오." "저엉 그러시다면 앉겠소이다." 그가 술상 앞으로 다가앉자 오원은 금세 기분이 좋아 호기 있게 주모를 불렀 다. 그리고는 술잔과 안주를 더 주문하였다. "오원 선생은 소문은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소이다. 어찌 그림에 그토록 능하 신지 매우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이 있잖습네까. 거저 소문만 기럴 뿐입네다. "그렇지 않아요, 나도 우연하게 오원 선생의 그림을 볼 기회가 있었소이다. 기 명절지도와 노안도였던 것 같습니다만, 대단한 필력이었소." "칭찬을 하시니까니 민망합네다. 자아 술이나 마시자우요." 오원은 심심하던 차에 그가 나타난 것이 마치 소식 두절된 죽마 고우를 다시 만난 것만큼이나 마음이 즐거웠다. 오원은 분원에 도착하자마자 양기훈부터 찾았다. 그는 다른 화원들과 둘러앉 아 백자호상이나 회청색,회황색 등의 분창사기에다 각종 문양을 넣고 있는 중이 었다. 문양도 각양각색이다. 백자는 청화로 하여 산수, 십장생, 모란, 매화 등의 화초와 용, 새 따위를 그리고 분청사기에는 상감 을 써 각종 무늬를 넣는다. 양기훈은 오원은 보자 파안대소하며 달려나왔다. 그리고는 오원이 올 줄로 예 상하고 있었다고 했다. "정말, 내래 올 것을 알았습네까?" "분명 오실 줄로 믿었시오. 화원이 부족해서 사옹원에 상소 올리는 걸 보았습 네다. 오원도 명을 받고 오셨디요?" "자취를 감출 생각도 했디만, 석연이래 그리워서 왔시오." "잘 오셨습네다. 차차 아시갔디만, 분원 주변에는 주막도 맣고 계집이래 제법 있시오, 오원이 심심하디는 않을 겁네다." "기거 다행이구만요, 주막이 없으면 어카나 걱정을 했시오." 분원 앞에는 남한강이 흐르고 그 주변에는 온통 채마밭이었다. 남한강 수로를 통해 도자기와 여기서 재배되는 각종 채소가 뚝섬으로 보내지고, 거기서 다시 궁궐로 운송되었다. 그래서 나루터에는 사옹원 관원들과 상인들로 항상 북적대, 자연 주막과 객주집이 자꾸 들어설 수 밖에 없었다. "기런데, 해지기 전에는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분원에서 규제하고 있습네다. 저냑에 나가도 오원처럼 밤을 세워 술 마실 수는 없시오." "와 기럽네까?" "화원들의 일이 많다 보니 통제하는 거디요." "어허, 술도 망므대로 못 마시게 하다니, 기거이 문제구만요." "염려 마시라요. 기래도 재간 있는 화원들은 슬쩍슬쩍 나가서 한잔씩 마시고 옵네다. " "한 잔 개지고야 성이 차갔습네까?" "기렇기는 하디만, 설마 방법이래 없갔시오?" 이튿날, 오원은 분원의 일과를 설명 듣는 것부터 시작해서 곧바로 문양 작업 에 들어갔다. 분원 관리들도 오원의 유명도를 이미 알고 있어, 그에게 거는 기대 가 매우 큰 것 같았다. 그러나 오원은 관원들의 감시와 간섭이 벌써부터 비위에 거슬렸다. 무엇보다고 음주에 대한 통제가 제일 불만스러웠다. 네놈들이 아무리 기래도, 이 장승업이한테는 어림도 없어야. 오원은 분원에 들어온 지 열흘이 지나고부터 드디어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하는 일이 따분하여 손에 잡히지도 않고, 시장기를 느끼면서도 밥은 먹기 싫고, 오로지 술 생각만 간절하였다. 집에서처럼 술동이를 끼고 앉아 마냥 퍼마셨던 지난날이 그리워, 이대로 지내다가는 조만간 발광하고 말 것 같았다. 개똥이는 마침 도자기 재료나 장작 나르는 일을 하여 우선 침식은 해결할 수 있었다. 문 제는 자신이었다. 술이 거나하게 올라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데 그럴 처지가 못 되나, 자연 울화병만 쌓여 갔다. 분원 관리들이 어찌나 꼬장꼬장하고 까다롭 게 구는지, 그들 얼굴만 봐도 울화가 치밀곤 하였다. 그래도 양기훈은 잘 참고 견디는 눈치였다. 오원처럼 짜증도 부리지 않았다. 항상 걸걸걸 웃는 낯이었다. 오원은 그의 무던한 성격이 부러우면서도 자기와 뇌동하지 않고 있는 그가 야속 할 때가 있엇다. 그렇기는 오던 길에 주막에서 만난 이수복도 마찬가지였다. 그 도 말술을 사양하지 않을 만큼 애주가인데도 분원 생활에 늘 고분고분하였다. 안달복달하는 것은 자기뿐이었다. "석연이래 갑갑하디 않습네까?" "와 갑갑하디 않갔시오, 거저 참을 뿐이외다. 나한테 주어진 일인 걸 마다할 수는 없지 않습네까." "석연이래 수양이 잘 돼서 참디만, 내래 정말 죽갔시오." "오원의 마음, 이해합네다. 기러나 조금만 참고 견디시면 매사 익숙할 수 있시 오." "익숙해디지 전에, 내 명이래 끊어디고 말갔수다래, 관리놈들 눈밖에 나면 어 드렇게 됩네까? 포도청에 처넣습네까?" "화원한테 기렇게야 하갔시오? 다만, 사옹원에 상소하여 처신이 난처할 뿐이디 요." "내래 처신이 난처해딘다...? 기럼, 겁낼 필요 없갔구만요, 처신이 난처해 봤자 장승업한테는 기게 기거 아니갔시오?" "기렇기는 합네다만, 마음이 매우 불편하갔디요." "마음이래 불편하기로 말한다면, 이보다 더하디는 않을 거구만요," 양기훈이 보건대, 오원이 무엇인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해 놓고 있는 눈치였 다. 자유분방한 그의 낙천적인 성격으로 미루어 필시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석연은 그의 마음에 동참할 수 없음이 안타깝고 미안하지 만, 분원의 규칙이 있는 만큼 자기로서는 차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오원은 일은 않고 말없이 쪼그리고 앉아 무엇인가 한참 궁리에 빠진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양기훈은 그의 표정을 곁눈질로 흘끔흘끔 살피면서 다음 행동을 지켜 보고 있었다. 잠시 후, 오원은 소피 보러 가는 몸짓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떳다. 그리고는 이 것저것 눈치 살필 것도 없이 곧장 분원을 빠져 나왔다. 이때 뒤에서 개똥이가 헐레벌떡 따라붙었다. "나으리, 어디 가십니까요?" "요 아래 볼일이 있어, 개똥이는 지낼 만하네?" "일이 많고 몹시 고됩니다. 나으리께서는 여기가 재미 있으십니까요?" "실은, 죽을 맛이야. 마음대로 술을 마시디 못하게 하는데 무슨 재미가 있갔 네." "그럼 다시 올라가시면 되지 않습니까요?" "기거이 마음대로 할 수가 없는 기야. 내 소임이 있잖네." "빨리 한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요." "개똥이도 기런 마음이네? 실은 나도 기래, 기렇디만, 당장은 갈 수가 없으니 까니, 저엉 가고 싶으면 너 혼자서 떠나라우." "나으리 아니 가시면 혼자서는 싫습니다요." "기런데, 일하다가 어드렇게 나왔네?" "장작 나르다가 나으리 모습이 보여거 그냥 달려왔습니다요." "기럼 날래 돌아가라우. 관원들이 알면 쫓겨나." 오원은 개똥이 손에 엽전 두 닢을 쥐여 주고는 등을 돌려 놓았다. 가면서 뒤 를 돌아보는 개똥이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아새끼래, 사람 마음 아프게 하누만, 오원은 마치 갈 길이 바쁜 사람처럼 빠른 걸음으로 언덕을 내려와 대뜸 주막 부터 기웃거렸다. 그리고는 되도록 분원과 멀리 떨어진 주막을 골라 들어갔다. 그리고는 주인인 듯한 중늙은이 가 오원의 아래 위를 연신 ㅎ어내리는 것이었 다. "와 기런 눈으로 봅네까? 뭐 훔치러 온 사람으로 보입네까?" "그게 아니라..." "목이래 마르니까니, 날래 술부터 개져오라요." "혹시 분원에 계신 화원이 아니신가 해서 보았습죠." "화원한테는 술을 안 팝네까?" "낮에는 술을 드리지 못하게 돼 있습죠, 순찰하는 관원들이 알았다가는 혼구녕 이 납니다요, 그러니 홀 화원이시면 그냥 돌아가십시오," "내래 화원이 아니니까니, 염려 붙들어매시라요." "그럼, 여기는 어떻게 오셨습니까요?" "..기냥 나그네니까니. 날래 술이나 개져오라요." 오원은 그렇게 시치미을 뚝 떼고 앉았다. 잠시 후 주인이 술 한 되와 술국을 가져왔다. 그러자 오원이 아예 동이로 가져오라며 술병을 도로 물렸다. "정말 동이로 잡수십니까요?" "마실라고 기러디, 누구래 헤엄치갔다고 했시오? 날래 개져오라요." 주인이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며 물러가더니, 두어 되짜리 작은 항아리를 안고 왔다. 오원은 그것이 또 못마땅하였다. "이보라요. 여게는 술동이가 모두 이리 작습네까?" "물론입죠, 더 큰 것은 여러 분이 자시는 한 말짜리 독입니다요." "기럼, 독에다 개져오라요." "그걸 어쩌시려구요?" "내래 다 마시갔다는데, 와 기렇게 말이 많습네까?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도 있고, 적게 마시는 사람도 있게 마련 아니갔소?" "그래도 그렇지, 혼자서 한 말을 어찌 마십니까요? 술장사 십년에, 아직 그런 손님은 보지 못했습니다요." "기러면 오늘 보시라요." 술이 정말 독으로 나오자 오원은 갑자기 상의를 훌렁 벗어 놓고 작정하여 마 시기 시작했다. 술잔도 필요없이 그냥 바가지로 퍼 마셨다. 이자 숨통이 좀 열리누만기래. 주인은 술을 들어붓듯이 마셔 대는 오원의 주량에 놀라서 마치 무슨 짐승을 보듯 하였다. 저렇게 마시다가는 결국 술이 입으로는 고사하고 콧구멍 귓구멍으 로 다시 넘쳐나올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오원은 꼿꼿하게 앉아서 술 한 방울 흘리는 법이 없었다. 주인의 눈에는 저것이 정말 사람인가 싶었다. 오원이 독을 거의 비우고 있는데, 뜻밖에 양기훈이 불쑥 나타났다. 오원은 게 슴치레한 눈으로 그를 한참 바라보다가 비로소 양기훈인을 알아차리고는 헤벌쭉 웃었다. "내래 이럴 줄 알았디요." "이 장승업을 잡으러 왔시오?" "허허허... 기렇소이다. 오원은 포박하여 포도청에 넘길까 합네다." "기럼, 포도청에 갇히기 전에 실컷 마셔야 되갔구만요. 어서 앉으시라요." "내래 발을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수다래." 오원이 주인을 불러 술을 더 시키면서 독으로 가져오라는 사족을 잊지 않았 다. 주인은 기가 꽉 막혀 놀랄 힘도 없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어디 다른 세상에서 왔으려니 싶어 가져오라는 대로 또 독째 주었다. 양기훈도 술이 몇잔 들어가자 새삼 용기를 얻었는지 그도 옷을 벗어 놓고 술 상 앞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오원, 관원들이 가끔 순찰을 도는 듯한데, 어찌하갔습네까?" "이 장승업이 관원쯤 무서워하갔시오? 기러고, 그 사람들이 내래 화원일 걸 아 직은 잘 모를 기야요. 그저 나그네라고 하면 되지 않갔시오?" "기거이 아주 좋은 방법입네다. 헌데, 이 양기훈이래 어찌하면 되갔소?" "기거이 간단하디요. 관원이 나타나면 날래 벽장에 숨으시라요." "허허허..." 아니나다를까. 늙수그레한 관원 하나가 어슬렁어슬렁 뒷짐을 지고 주막 안을 기웃거리는 것이었다. 동정을 살피러 온 것이 틀림없었다. 화원의 숫자가 뻔한 데, 두 사람이 자리를 비웠으니 찾아 나서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는 정학연이라 는 종8품의 봉사직으로, 사옹원에서 파견된 자였다. 오원과 양기훈은 갑자기 난감하였다. 규칙상 금하고 있는 한낮의 음주를 직통 으로 발각됐으니 달리 변명할 방법이 없었다. 술잔을 막 입에 붙이려던 양기훈 은 술을 마실 수도, 잔을 내려놓을 수도 없는 어정쩡한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오원은 관원을 흘끔 곁눈질만 한 번 했을 뿐 모른 척하 고 그냥 마셔 댔다. 그러자 관원이 헛기침을 두어 번 뱉으면서 느럭느럭 다가왔 다. "어허, 두분은 마음도 편하시오, 다른 화원들은 한찬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어 찌 두분만 이리 태평하시오?" "면목없습네다." 양기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정쩡하게 예를 갖추었다. 그러면서 오원에게 연 신 눈짓을 하였다. 그러나 오원은 못 본 체하고 짐짓 엉뚱한 소리를 하였다. "저분이래 누구십네까?" "분원에 몸담고 계신 사옹원의 정학연 나으립네다. 인사 여쭈시라요." "어이구, 인사가 늦었습네다. 어서 들어오시라요." "낮에는 음주를 금하거늘 이러시면 어찌하오." "잠시 목 좀 축이고 있는데 석연께서 나를 데리러 오셨다가 붙들렸시오, 규칙 을 어긴 사람은 납네다." "그런 줄 아셨으면 어서 일어들 나시오, 다른 화원들과 형평을 맞추어야 하지 않겠소," 관원이 혀를 차면서 슬그머니 물러갔다. 그러자 주인이 남자가 납빛으로 달려 와 발을 동동 굴렀다. "화원이 아니라고 하시구선,.. 소인의 입장이 난처하지 않습니까요?" "화원이라고 했으면, 님자래 술을 주었갔소?" "소인만 혼쭐이 납니다요?" "이 주막에는 다시 오디 않을 테니까니, 염려 말라요." "물론입죠." 양기훈이 채근하는 바람에 오원이 마지못해 일어났다. 그러나 술 한 독을 혼 자서 마신 터라,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고 분원까지 내내 비틀거렸다. 이래저 래 양기훈만 죽을 맛이었다. 오원은 간신히 작업실에 데려다 놓기는 했으나, 그는 일은커녕 그 자리에 벌 렁 누워 버렸다. 그리고는 이내 코를 드르렁드러렁 골기 시작했다. 12 분원의 관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구수회의를 열었다. 장승업 화원의 불성실한 근무자세를 성토하는 자리였다. 장승업이 오만불손하여 분원의 규칙을 무시하는 태도는 마땅히 징계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들 중에는 사옹원에 상소하여 엄중한 처벌을 내리게 하자는 강경론자도 있었다. "분원에 들어온 이상 마땅히 규칙에 따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벌써 두 차례에 걸쳐 이를 어기고 있소이다. 이는 우리 관원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겠소, 정공 께서 한 차례 관용을 베풀었음에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만큼, 다른 화원에게 미 칠 영향을 생각해서 이번에는 엄중한 문책이 있어야 될 줄로 압니다." "그렇소이다. 장승업은 안하무인에다가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으니, 이번 기회 에 엄중한 문책이 있어야 합니다." "옳소이다. 그냥 두었다가는 다른 화원들한테 그릇된 영향을 입힐 것이 분명하 니, 사옹원에 상소를 올리도록 합시다." "지강급미라는 말도 있지 않소이까. 차후 더 큰 낭패를 당하기 전에 미리 나쁜 버릇을 깨닫게 함이 옳을 듯합니다. 반찬 단지에 고양이 발드나들 듯 될까 우려 됩니다." 그러나 정학연만큼은 왠지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다른 관원들이 그의 의견을 듣고자 해도 눈을 감은 채 앉아서 입을 열지 않았다. 생각하는 바가 다른 것 같 은 눈치였다. "정 공께서는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까? 장 화원의 비해을 바로 목격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나도 장 화원의 방자함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있소이다. " "그러시다면 우리와 의견이 같지 않소이가." "허나 반드시 징계가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유독 술을 좋아 하다 보니 자미 본분을 망각한 것 같소이다. 그러니 한 번즘 기회를 더 줘 보는 것이 어떨까 하오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매우 완강하였다. 이번 기회에 장승업의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더 큰 화를 자초함은 물론, 다른 화원들과도 형평을 맞춰야 하는 의미에서도 징계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도 정학연이 간곡 하게 설득하는 바람에 기회를 한 번 더 주기로 합의를 보았다. 정학연이 특별히 오원을 비호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오원이 한때 사사했던 향수 정학교와 인척 관계였다. 그는 이미 정학교로부터 오원에 대한 얘기를 몇 번 들은 바 있고, 오원의 그림이 뛰어남도 알고 있는 터라, 그를 아끼고자 하는 마음이 앞섰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관원들에게 전혀 내색하지 않았고, 물론 오원에게도 귀띔조차 하지 않았다. 실은 오원을 분원으로 보내도록 상소한 사람도 바로 정학연이었다. 그렇게 해서 오원의 재주를 곁에서 볼 수 있 는 기회를 갖고자 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정학연은 오원을 기방으로 은근히 불러냈다. 말이 기방이지, 어설 프기 짝이 없었다. 장안의 웬만한 주막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단지 여느 주막에는 없는 계집들이 있을 뿐이었다. 오원은 웬일인가 싶어 그의 뜻밖에 제안에 의구심을 가졌다. 낮에 관원들이 구수회의가 있었음을 떠올리며, 술을 먹여 놓고 따끔하게 경고를 하거나 회유할 목적으로 불러내는 것이려니 하였다. 오원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정학연이 나이도 연상인데다가 인품을 갖춘 사람이어서 하는 수 없이 따라나섰다. 술상이 나오자 정학연은 오원에게 술부터 따랐다. 그리고는 "오늘은 나랑 취해 봅시다." 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이러시니까니, 어리둥절합네다." "그렇게까지 생각하실 필요는 없소이다. 나도 마침 출출하던 참이라, 오원 생 각이 나서 불러낸 것 뿐이오." "정말이십네까? 정말 다른 뜻이래 없습네까?" "있기는 해도, 별 얘기는 아니올시다." "오늘 낮에 제 문제로 회의가 있었다고 들었습네다. 어드렇게 합의가 됐습네 까? 쫓아내기로 했습네까?" "허허허... 오원 생각은 어떠시오? 혹시 쫓아내기를 바라시는 건 아니시오? 술 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게 통제를 하니..." "사실은 기렇습네다. 하루하루 죽을 맛이야요." "허허. 매우 섭섭한 말씀이오. 나는 오원과 가까이 지내고 싶은데.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니..." "술이라고 마음대로 먹게 하면 기런 대로 견딜 만하갔시오. 옆에 술이 없으니 까니 일이 손에 잡히질 않습네다." "낭패로군요." "주벽이 기러니 내래 어카갔습네까?" "오원. 우리도 웬만하면 오원의 청을 들어주고 싶지만, 다른 화원들과의 형평 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소이다. 오원께서 이해할 수 밖에 없을 줄로 아오. 그렇다고 여기서 평생을 지낼 것도 아니지 않소. 내년 봄까지만 참고 견디시면, 그때는 다른 화원으로 교체가 될 것이오." "내년 봅이라 하셨습네까?" "아마 넉넉잡아 그리 될 것이오." "어이구. 이 장승업이래 숨넘어가갔구만요. 내년 봄이라..." 하루 견디기가 십년과 같은 오원으로서는 기절할 노릇이었다. 내년가지 이 짓 을 어떻게 견디나 싶어 벌써부터 숨이 탁 막혔다. 오원이 고개를 떨어뜨려 죽을 상을 하고 있자 정학연도 따라서 한숨을 내쉬었다. "실은 오원한테 숨긴 것이 있소이다." "...기거이 무엇입네까?" "오원께서 정학교 대감한테 사사하셨지요?" "기렇습네다만..." "내가 그분과는 인척 관계여서 오원에게 대한 얘기는 이미 들었소이다." "기거이 정말입네까? 정말 스승님과 친척이십네까?" "그렇다니까요." 그러자 오원이 대뜸 무릎을 꿇더니 넙죽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부끄럽다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하였다. "오원, 갑자기 왜 이러시오?" "스승님한테 큰 죄를 지었습네다. 내래 기런 줄도 모르고..." "그분이 스승이지 내가 스승은 아니지 않소. 내가 심히 민망하구료." "어쩐지 함자가 비슷하다 했었시오. 스승께서 이일을 아시면 크게 실망하실 겁 네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오. 그분도 이미 오원의 성품을 알고 계시는데, 설마 실망 까지야 하시겠소." "나으리한테 정말 면목이 없습네다. 진작 말씀을 해 주셨더라면 내래 이렇디는 않았을 기야요." "그렇다고, 그리 좋아하는 술을 끊었을 리는 없지 않았겠소?" "기렇기는 합네다만..." "해서 드리는 말씁이오만, 앞으로 일과시간에는 술을 삼가심이 좋을 듯싶소이 다. 관원들 얘기도 다른 화원들과의 조화를 우려하는 것입니다. 허니. 내 말을 과히 섭섭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고맙겠소이다. 그 대신 오늘 밤은 대취하셔 도 좋습니다." "내래 부끄럽구만요. 돌이켜 생각해 보니까니 다른 화원들한테도 미안한 일입 네다. 당장 혈서를 써 약속은 못하갔디만 행동을 각별히 삼가갔시오." "고맙소. 오원, 호방한 성품이라 역시 대범하시오." 정학연은 오원을 불러낸 보람을 느끼면서 다소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오원으 나름대로 마음이 무거웠다. 정학연이 스승과 인척이라는 사실이 몹시 부담스러 워 마치 덜미를 잡힌 기분이었다. 이때 문이 열리면서 기녀가 들어왔다. 나이가 제일 어린 계집은 아니지만 제 법 자태가 고운데가가 용모 또한 아름다운 편이었다. "인사드리거라. 오원 장승업 화원이시니라." "인사드리옵니다. 성은 명가이옵고 이름은 자운이라 하옵니다. 부족함이 많사 오나 어여삐 보아 주시면 정성껏 보시겠사옵니다. " 오원은 그녀의 인사를 받으면서, 옛날의 연홍과 옥수와 미향의 얼굴을 떠올렸 다. 연홍은 죽고, 옥수는 이미 퇴기가 되어 기방에서 물러났고, 미향은 시집을 가 세 자식의 어미가 되었다. "오늘밤, 장 화원을 잘 모시거라."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나는 먼저 갈 터이니, 오원은 천천히 오시오." "술이래 많이 남았는데, 와 벌써 가십네까?" "오원이 자실 양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술을 내가 축내서야 되겠소? 천천히 많 이 드시오." 정학연이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려는 의도인 줄을 알아 오원은 굳이 붙들지 않았다. 게다가 자운의 미색에 은근히 마음이 동하면서 단둘이만 있고 싶었던 것이다. "자운이래 몇 살이네?" "...열 여덟이옵니다." "열여덟이라... 문장은 배웠네?" "감히 문장이랄 것은 없사옵니다." "내래 그림을 그리면 화제를 넣을 수 있갔네?" "저 같은 계집이 감히 화제를 붙이겠습니까마는..." "기러면. 지필묵을 개져오라우." 자운의 마음을 그림으로 녹여 볼 셈이었다. 그녀가 문을 열고 나가자 오원은 상의를 벗어 놓고 술상을 바싹 끌어당겼다. 관원이 마시라는 술이니 배가 터지 도록 마실 작정이었다. 자운이 이내 지필묵을 가져와 먹을 갈기 시작하였다. 오원은 술잔을 기울이면 서 그녀의 자태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먹 가는 솜씨가 제법 손에 익은 것으로 보아 평소에 글씨를 자주 써 왔음이 틀림없었다. 오원은 공연히 마음이 흐뭇하 였다. 지금까지는 그다지 여색을 탐한 적이 없었으나. 오늘은 이상하게도 신경이 온통 그녀에게 빨려 가면서 자꾸 가슴이 뛰었다. 자운이 먹 갈기를 마치고는 오원 앞에 필가를 당겨 놓았다. 오원은 이내 화선 지를 펴고 붓을 잡았다. 오원이 순식간에 완성한 그림은 영모 그림으로, 국화와 나비가 조화롭게 어우 러진 것이었다. 매우 빠른 속도로 그리면서도 정교함을 조금도 잃지 않은 그의 솜씨에 놀라 자운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다 됐으니까니, 자운이 마음대로 화제를 넣으라우." "가슴이 떨려서 미처 문장이 떠오르지 않사옵니다." "기렇게 ㄱ아할 필요 없어야." 오원이 자운에게 붓을 넘겨 주자 그녀가 한참을 머뭇거렸다.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만들어 낸 그림에다 감히 필을 가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오원이 채근하 자 마지못해 붓을 받았다. "좋은 필체가 아니라고 탓하지는 마십시오. 그럼..."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에 네 홀로 피었는가 아마도 오상고절은 너 뿐인가 하노라 자운이 화폭 오른쪽 상단에다 실비처럼 하늘하늘 써내려가자 오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였다. 필체도 제법이지만 정성을 쏟는 그 자태다 더욱 고워 잠 시 넋이 빠졌다. "낭낭한 목소리로 읽어 보라우." 그러자 자운이 꼭 구슬이 구르는 듯한 청아한 목소리로 읽어 내렸다. 오원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녀에게 붓을 넘겨 받았다. 그리고는 그림 하단에다 "오원 장승업"이라 썼다. "이 그림은 자운에게 주는 선물이야. 화대라고 생각해도 좋갔고." "정말 소녀한테 주시옵니까?" "내래 와 거짓말을 하갔네." 그러자 자운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림을 제 앞으로 당겨 놓고는 한참을 들여 다 보았다. 오원은 그 모습이 흐뭇하여 술맛이 더 당겼다. "자운아." "네, 나으리." "....오늘밤, 나와 운우의 정을 나누자우. 내래 너한테 홀딱 반하고 말았어야." "...심히 민망하옵니다." "거절하간?" "미천한 것이 어찌 나으리 같은 분을 모실 수가 있사옵니까?" "기렇디 않아. 자운이래 훌륭해." "과찬을 하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미천한 계집이라도 굳이 원하시오 면 취하소서." "내래 기분이 좋구만." "부족한 것이 많은 계집이오나. 정성을 다해 모시겠사옵니다." "기래 기래." 오원이 뛰는 가슴을 달랠 수가 없어 술만 연신 마셔 댔다. 한낱 기생 앞에서 이토록 긴장하고 조바심이 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여자와 살을 섞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아 더욱 긴장이 되는 것 같았다. "자운아." "네, 나으리" "밤도 깊어 가니까니, 자리를 펴는 거이 어떻갔네?" "술시를 겨우 넘겼을 뿐이옵니다." "내래 자운이를 빨리 품고 싶어서 기래." "...아직 이목이 있사옵니다." "설마 누구래 엿보갔네? 날래 자리 깔으라우." 오원은 아까부터 남성이 뻣뻣하게 부풀어 욕정을 더는 누를 수가 없었다. 게 다가 긴장과 초조가 온통 머리로 뻗쳐 혈관이 곧 터지고 말 것 같았다. 자운이 그제서야 술상을 한쪽으로 밀어 놓고 이부자리를 폈다. 오원이 침을 꼴깍꼴깍 넘기며 급히 옷을 벗어던지고는 자리로 가 벌렁 누웠다. 그러자 자운 이 불을 껏다. 그러고도 한참을 말없이 앉아 있는 것이었다. 오원의 애간장만 탔 다. "자원아. 날래 오라우." "...나으리." "와아?" "...손이 떨려서 옷고름을 풀 수가 없사옵니다." "기럼 내래 풀어야 되갔구만." 오원이 또 침을 삼키며 자운의 뒤로 다가앉았다. 그녀의 몸에서 피워 내는 향 기가 사르르 날아와 정신이 아득하였다. 오원이 열기를 훅훅 뿜어 내며 자운의 옷고름을 잡아당기고는 저고리를 거칠게 벗겨 버렸다. 그러자 자운이 어깨를 바 르르 떨었다. 자운이 치마 끈을 풀자 오원이 그녀의 유방을 우악살스럽게 움겨쥐었다. 여자 의 가슴을 난생 처음 만져 보는 오원은 안타까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푸우푸 바람 빠지는 소리만 질러 댔다. "내래 죽갔구만." "... 그만 자리에 누우셔요." 자운이 오원의 손을 풀려고 하자 오히려 더욱 꼭 죄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운이 숨을 새근거리며 몸을 비틀자 오원이 그녀의 속곳마저 홀랑 벗겨 버리고 는 마주 앉았다. 문 창호지가 온통 푸르도록 물을 들인 달빛이 희붐하게 들어와 그녀의 알몸을 모밀꽃처럼 하얗게 비추었다. 오원은 그녀를 바싹 조여 안더니 유방을 압에 가득 물었다. 자운이 진저리를 치며 "아아, 아아~" 하고 코맹맹이 소리를 내자 오원이 코로 열기를 훅훅 토해 냈다. "...이제, 자리에 누우셔요." "내래 이것두 좋아야... 정말 미치갔구만." 오원이 자운을 자리에 눕혀 급히 그녀의 몸으로 올라가더니 쉭쉭 소리를 내며 여자의 샅을 허겁지겁 벌려 놓았다. 자운이 몸을 바들바들 떨며 새근 거리자 그 가 남성을 사정없이 밀어 넣엇다. 자운이 도리질을 치며 숨이 끊어지는 듯한 비 명을 지르자, 오원은 으엉으엉 짐승 우는 소리를 토하며 자지러졌다. 자운이 죽은 듯이 널부러져 있는 동안 그녀에게서 내려온 오원은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천장을 가물가물 올려 보았다. 정신이 몽롱하여 방금전의 일이 꿈 인 것도 같고 생시인 것도 같아 무엇이라 단정할 수가 없었다. "자운아." "네, 나으리." "내래 귀신한테 홀린 것 같구만." "...소녀는 그만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파서 기랜?" "죽는 것도 이토록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요에 피가 낭자한 듯싶사옵 니다." "기렇게 아팠네?" "...그러하옵니다." "에미나이는 다 기렇네?" "처녀들만 그렇다 하옵니다." "기럼, 자운이래 이거이 처음이가?" "그러하옵니다." "나도 기래, 내래 여자를 통 모르고 살았댔어. 오늘 자운이래 안은 거이 꿈인 지 생시인지 잘 모르갔어. 이래서 사내들이래 장가를 가는 거구만기래." "...소녀는 이제 나으리 계집이옵니다." "기럼, 내래 자운이 서방이네?" "혼례만 갖추지 않았을 뿐이옵니다." "...기렇구만." 계집이 좋기는 좋구만기래. 내래 이제사 사내 구실을 했어. 13 오원이 모처럼 마음의 안정을 얻어 작업에 몰두하였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자운한테 달려가 한바탕 뒹굴고 싶지만, 그녀의 간곡한 당부가 떠올라 애써 마 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오원이 하루에도 두어 차례씩 분원을 빠져나와 욕정을 풀곤 하자, 어느 날 자운이 정색을 하고 오원을 타일렀다. "소첩도 서방님을 늘 곁에 모시고 싶사옵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에게나 본분 이 있듯이, 서방님한테도 화원의 본분이 있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듯 하시면 도리가 아닌 줄로 아옵니다." "자운이래 보고 싶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걸 아카갔네." "그래도 참으셔야 하옵니다. 관원들의 눈 밖에 나서 좋을 것이 뭐 있겠습니까. 그 사람들 눈 밖에 나면, 결국 분원에서 나가라 하지 않겠습니까." "기럼 더 좋지 않네. 자운이와 종일 붙어 있을 수 있으니까니." "그렇지 않을 것이옵니다. 소첩이 알기로는, 분원에서 쫓겨나면 곧장 제 거처 로 보내질 뿐만 아니라, 문책을 당한다 하옵니다. 몇해 전에 그런 화원을 보았습 니다. 그리하면 소첩은 어찌하옵니까." "염려할 필요 없어야, 자운이래 나랑 한양으로 가면 되잖네." "사람의 일이란 마음먹은 대로 쉬 되는 것이 아니옵니다. 하오니, 화원의 본분 을 잘 지키시어 광주 땅에 오래 계시도록 하십시오." "자운이래 그리 당부하니까니, 말을 들어야 되갔구만." "서방님께서 그리 작정하시니, 소첩의 마음이 한결 놓입니다." 자운이 나이 어린 기생의 신분이기는 해도 오원 앞에서 언행이 분명하고 사리 가 있어, 함부로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자신이 벌서 계집의 생각에 놀아나는 가 싶어 은근히 반발심이 생길 때도 있었느나, 사리가 있어 차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오원은 작업 중에 자운한테 가는 짓을 삼가고 꼭 일과를 마친 후에 가곤 하였다. 그렇게 열흘이 되었다. 누구보다고 정학연이 제일 흐뭇해 하였다. 오원을 자운과 맺어 주기를 잘하였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계집한테 빠져 자 유분방한 그의 성격이 개조된 것을 생각하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그런 생각은 양기훈도 마찬가지였다. 그 나이를 먹도록 계집의 품을 모르고 살아서 그렇다고는 해도, 그토록 사람이 달라질 것으로는 상상하지 않았었다. 오원이 잠시 일손을 놓아 무엇인가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양기훈이 그 를 슬그머니 문 밖으로 불러냈다. "오원, 무슨 생각을 기렇게 하십네까? 자운이래 생각했디요?" "어찌 알았습네까? 내 얼굴에 기렇게 써 있었시오?" "물론입네다." "헤헤, 석연한테 들키고 말았구만요, 그 아이를 생각하면 공연히 감슴이래 뛰 디 뭡네까. 내래 이래도 되는 겁네까?" "자운이한테 폭 빠디셨구만요." "기런가 봅네다. 이러다가 발목이라두 잡히면 어캅네까?" "허허, 이미 잡힌 발목 아닙네까? 잡혀도 단단히 잡혔시오." "공연히 겁이래 납네다. 저 아이래 평생을 살자고 하면 그때 가서 어드렇게 하 디요?" "허허, 머리래 파뿌리 되도록 살아야디요. 천생배필이 아닙네까?" "기러디 마시라요. 이 오원이래 어드렇게 여자와 평생을 삽네까? 차라리 포도 청에 갇혀 있갔시오." "기럼, 자운을 버리갔시오?" "기런 말은 아니디만..." "기것 보시라요. 버리디 않겠다면 함께 산다는 뜻이 아닙네까." "평생을 함께 산다는 거이 아니야요, 다만 분원에 있는 동안만 기러갔다는 뜻 입네다." "계집이래 마음에 독을 심으면 한여름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시오. 자운이래 기렇디 않는다고 볼 수 없시오." "와 자꾸 겁을 줍네까. 석연이래 기렇게 말씀하시니까니 갑자기 자운이래 정나 미 떨어딥네다." "벌써 정나미래 떨어디면 어캅네까. 내래 괜히 농담한 거야요." 이때 정학연이 헛기침을 내며 두 사람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왠지 그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 번져 있었다. "두 분이서 무슨 얘기를 그리 정답게 나누시오?" "오원과 잠시 바람 좀 쏘이고 있었습네다." "요즘 오원의 표정이 아주 밝아 보입니다만..." "기렇게 보셨다니 다행입네다. 모두 나으리 덕분이라 생각합네다." "허허... 그렇다면 내가 매패 노릇을 톡톡히 한 모양입니다. 석연, 아니 그렇 소?" "기런 것 같습네다." "...나으리한테 청이 있습네다." 오원이 갑자기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면서 정색을 하였다. 아무래도 차마 들어 줄 수 없는 부탁일 것 같아 정학연의 마음이 금세 무거웠다. "...말씀해 보시오." "처자래 있는 관원은 저냑에 집으로 돌아가디 않습네까?" "그럴 수밖에요." "거러면, 저한테도 외박을 허락하시라요. 내래 자운이라는 계집이 있디 않습네 까?" "허면, 그 계집과 정식으로 혼례를 치르셨다는 말씀이시오?" "기렇디는 않디만, 살을 섞었으니까니 제 계집이 아닙네까." "글쎄올시다... 사내대장부가 기방의 여자와 잠자리를 갖기란 예사인지라, 오원 의 생각이 과연 타당한지 모르겠소이다. 석연의 생각은 어떠하시오?" "두 분 말씀에 모두 일리가 있습네다. 오원이래 저리 간곡하게 청을 드리니, 거저 지나칠 수가 없갔습네다." "허허, 낭패로군요, 어쨌든 다른 분들과 상의를 해 보긴 하겠습니다만..." "기러면, 분원 일을 더 정성껏 할 수 있을 것 같습네다." "청을 들어주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겠다는 뜻과 같으니, 마치 협박하는 것 같 지 않소." "기런 거이 아닙네다. 거저 부탁하는 겁네다." "오원의 뜻을 알고말구요." 그로부터 사흘 후 장학연이 오원은 따로 만나 결국 저녁마다 외박을 허용했 다. 그러자 오원이 남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넙죽 절을 올렸다. "고맙습네다. 이 은혜를 어드렇게 갚습네까?" "그 대신, 일과시간을 엄수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내 체면이 설 것 같아서 드 리는 말씀이오." "명심하갔습네다." 그날부터 오원은 매일 밤 자운과 동침하고 아침에 분원으로 출근하였다. 오원 은 비로소 새롭게 삶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했다. 이런 재미를 왜 여태 모르고 살았는지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욱이가 결혼을 할 때도 오원은 그를 이 해하지 못했다. 여자한테 속박을 당할 것이 뻔한데도 굳이 장가를 들겠다는 그 를 어리석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중국 속담에 '백 사람의 남자가 하나의 숙박 소는 만들 수 있지만,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 사람의 여자가 필요하다'라고 한 모양이다. 오원이 그렇게 매일 저녁 자운에게 돌아와 술 마시고 욕정을 불 태우는 일로 세월을 허비하였다. 마치 그것만이 인생의 보람인 것 처럼 생각하는 사람 같았 다. 그림은 팽개치고 오로지 술과 색욕만 탐하였다. 자운을 잠시도 곁에서 떠나 지 못하게 하였다. 어느 날, 자운이 또 정색을 하고 오원 앞에 다가앉았다. "서방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뭐이가? 말하라우." "서방님은 조선 사람 모두가 흠모하는 화가시온데 어찌하여 요즘은 그림을 그 리지 않으시옵니까?" "또 훈계하네?" "감히 훈계하니요. 소첩이 너무 안타까워서 드리는 말씀이옵니다." "염려 말라우. 그림은 내래 죽을 때까지 그릴 텐데, 기렇게 서두를 거이 뭐 있 네, 앞으로 차차 그리면 될 거 아니가." "서방님, 일일난재신이라는 말이 있사옵니다. 하룻동안에 아침은 또 오지 않는 다는 뜻으로, 이미 지나간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뜻인 줄 아옵니다. '진서' 에도 촌음을 아끼하 하였잖습니까." "자운이래 아는 거이 많구만기래. 기딴 걸 언제 다 배웠네?" "당구풍월이라고 기방에 있다 보니 이리 말만 늘었습니다. 소첩은 서방님께서 그림 그리는 모습 뵙는 것이 소원이옵니다. 제 소청을 들어주시어요." "기래? 정말 내 그림이 기렇게 보고 싶네?" "그러하옵니다. 그러니 소첩의 청을 마다하지 마시어요." "...기럼, 당장 보여 주갔어." "오늘 뿐이 아니옵니다. 매일 보여 주셔야 하옵니다." "기래 기래. 자운이래 그토록 소원이면 매일 그려 주갔어." "정말이옵니까?" "날래 지필묵 개져오라우." 그러자 자운은 기회는 이때다 싶어 서둘러 지필묵을 준비하여 먹을 갈기 시작 하였다. 오원은 자운의 생각이 기특하였다. 기생의 몸인데도 오로지 요염하게 굴 지 않고 사내의 본분을 깨닫게 함이 가상하였다. 자운이 먹 갈기를 마치고 화선지를 펴 놓자 오원이 지체 없이 붓을 들었다. "무엇을 그리면 좋갔네?" "서방님 뜻대로 하시어요." "기럼, 연꽃을 그려 주갔어." 오원은 화선지에 붓이 닿자마자 연꽃 가지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는 모습을 눈 깜작할 사이에 그려 내는 것이었다. 그러자 자운이 지난번처럼 도 눈물을 글 썽대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서방님, 신기가 아니고는 이리 그릴 수 없사옵니다." "정말, 기렇게 보이네?" "물론이옵니다. 소첩한테도 그리는 법을 가르쳐 주시어요." "예능은 배워서 되는 길도 있디만, 타고난 재질이 있어야 되는 기야. 재질이래 없으면 발전하기가 힘들어." "그러니까, 소첩한테 재질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해 주시어요." "기래. 자운이래 재주가 많으니까니 또 모르디." 오원은 그녀 앞에 화선지를 펴 주고 무엇이든 마음대로 그리라고 하였다. 자 운이 처음에는 사양하더니 오원이 채근을 하자 소재를 생각하느라고 한참 뜸을 들였다. "흉은 보지 마시어요." "기래, 내래 구경만 할 테니까니, 마음놓고 기리라우." "그럼 매화를 그려 보겠습니다." 자운은 화선지 중앙을 고목으로 느릿느릿 채우더니, 거기에 네뎃개의 가지를 뻗쳐 놓고는 세필로 꽃을 빼곡하게 그녀 넣었다. 비록 구도는 엉성하지만 제법 솜씨를 부린 그림이었다. 틀림없이 단원 그림의 모작이었다. "단원의 그림을 구경했구만기래." "...용케 아시었습니다." "모작이래도 솜씨래 있어. 제법이야." "소첩,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기런데, 그림을 그릴 때는 사물의 본질을 알아야 되는 기야." "...무슨 뜻이옵니까?" "여게 고목이래 늙어 보이디를 않아. 기건 명암이래 잘못해서 기런 거야. 나무 껍질이래 너무 곱디 않네. 이런 고목 봤네? 뿐만 아니라, 밑둥치와 끝이 굵기래 똑같잖네. 가지 굵기도 같고. 기건 처음에 구도를 제대로 잡지 못했기 때문에 기 렇고, 사물을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남의 그림을 보고 흉내를 내는 건 좋디만, 남의 것도 관찰을 잘 해야 되는 기야." "소첩은 역시 재주가 없는가 보옵니다." "기렇디 않아. 재주래 아주 없딘 않아. 다만, 남의 그림을 흉내내더라도 관찰을 깊이 해야 되고, 그걸 자기 것으로 소화시켜야 되는기야. 기래야 그림이 발전해." "그럼, 소첩은 서방님께서 그린 것을 자꾸 관찰하겠습니다." "기것도 중요하디, 허디만, 실물을 오래 관찰하는 버릇을 기르라우. 기러면, 자 운이도 잘 그릴 수 있어." "정말이옵니까?" "내래 와 거짓으로 말하갔네." "서방님." "와 기러네?" "앞으로는 소첩을 서방님 계집으로만 보시지 말고, 소첩으로 하여금 서방님을 스승으로 모시도록 허락하시어요." "재이없어야. 계집은 계집이고, 제자는 제자다. 자운이처럼 예쁜 계집을 놓고 어드렇게 마음을 겸할 수 있갔네." "...그럼, 이렇게 하시어요." "어드렇게?" "초저녁에는 서방님 제자이고, 깊은 밤에만 소첩이면 어떻겠습니까?" "기럼, 초저냑에는 자운이를 품지 못한단 말이가?" "...그러하옵니다." "내래 기렇게는 못해야. 자운이 몸에서 풍기는 향기가 코를 찌르는데, 어드렇 게 참는단 말이가." "잠깐인데 그것도 참지 못하십니까?" "내래 못 참아. 지금도 날래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어카네." "서방님은 오로지 소첩의 몸만 취하시렵니까? 소첩의 갸륵한 생각도 함께 취 하시어요." "사람 애간장 태우누만, 제발 기러디 말라우. 내래 그림은 가르쳐 주갔어. 대 신, 초저냑이 어드렇고 밤이래 어드렇고는 따지지 말라우." "그럼, 초저녁에 소첩을 취하시고 한반중에 그림을 가르쳐 주시렵니까?" "야래 말하는 것 좀 보라우. 한밤중에는 온갖 만물이 자도록 돼 있는데, 거꾸 로 살라는 말이가?" "그러니까 소첩 생각이 맞지 않습니까." "듣기 싫어야. 내 생각대로 할 테니까니, 왈가왈부하디 말라우." 오원은 흩어진 지필묵을 서둘러 한쪽으로 밀어 놓고 옷을 훌훌 벗었다. 그리 고는 자운의 허리를 안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자운이 이리저리 앙탈을 부렸 다. 오원은 강간을 하듯이 자운의 옷을 거칠게 벗기고는 말처럼 숨을 훅훅 내쉬 면 다짜고짜 젖무덤부터 움켜쥐었다. 그제서야 자운이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오 원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제 됐다 싶었는지 오원이 자운의 샅을 슬그머니 벌려 놓더니 음모와 국소를 번갈아 쓰다듬으며 손장난을 쳤다. 그러자 자운이 숨을 쌔근거리면 오원의 남성 을 슬그머니 잡아당겼다. 그럴수록 오원은 짐짓 여유를 부리며 자운의 몸으로 올라갔다. 오원이 남성을 서서히 밀어 넣자 자운이 그의 허리를 바싹 조여 안았 다 . "어리구. 내래 죽갔구만." "...소첩도 그러하옵니다." 오원이 쉭쉭 소리를 내며 공격을 가하자 자운이 눈을 흰자위로 가득 채우고는 코 막힌 소리를 내지르며 요분질을 해 댔다. 내내 구름을 타고 떠 있던 두 사람이 동시에 한숨을 내뿜더니 아래로 툭 떨어 졌다. 그래도 오원은 아직도 구름을 타고 있는 착각에 빠져 자운에게서 내려올 줄을 모르고 있었다. "서방님." "...와?" "아무래도, 아이가 생길 것 같사옵니다." 자운이 아직도 코가 뚫리지 않은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 "아이래 생겨?" "결국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새끼래 낳아서 뭐 하갔네. 귀찮아." "저절로 생기는 걸 어찌하옵니까." "...생기디 않도록 해야디." "섭섭하옵니다." 자운이 금세 샐쭉해 가지고 엉덩이를 비틀자 오원이 "어어어..." 소리로 당황해 하며 자운을 바싹 조여 안았다. "알았어, 알았어. 아새끼 낳으라우. 쑥쑥 낳으라우." "...정말이옵니까?" "자운이래 낳고 싶으면 낳아야디." "서방님은 몇이면 좋으시어요?" "아새끼를 내래 낳네? 자운이래 낳는 거디." "아들 딸, 둘만 낳을까요? 아니면 아들 둘을 낳을까요? 셋을 원하시오면 셋도 낳겠습니다." "자운이 마음대로 하라우. 열을 낳고 싶으면 열을 낳고 싶으면 열을 낳아야 디." 오원이 그제서야 자운에게서 떨어져 천장에 대고 한숨을 쏘아올렸다 .어쩐지 한숨 소리가 무게를 잔뜩 실은 듯하였다. "목이래 마르구만, 술 좀 개져오라우." "또 드시옵니까?" "목이래 말라서 기래." "머리맡에 자리끼가 있지 않사옵니까." 자운이 엉덩이를 천장으로 뻗친 채 기어가 물그릇을 집어 왔다. 그러자 오원 이 그녀의 손을 밀어 내며 짜증을 부렸다 . 잠시 후 자운이 호리병에 술을 담아 오자 오원은 마치 여름 뙤약볕에 있다가 온 것처럼 꼭지를 입에 대고 벌컥벌컥 마셔 댔다. 술이 넘어갈 때마다 목울대가 오르락내리락하였다. "아새끼를 꼭 낳갔네?" "그건 소첩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옵니다. 남녀가 합방을 하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옵니다." "기럼, 내래 아새끼 씨를 부렸단 말이가?" "소첩이 곧 밭이 아니옵니까." "그놈의 밭은 가뭄도 안 타네?"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여자의 몸 속에서는 샘이 마르지 않사옵니다." "기럼, 아새끼래 벌써 생겼단 말이네?" "장차 그리 될 것이옵니다." "장차... 기럼, 내래 씨를 뿌리디 않아야 되갔구만." "서방님께서는 아이가 싫으시옵니까?" "이리저리 떠돌 놈이 아이는 개져서 뭐 하갔네?" "이리저리 떠도시면, 소첩은 어찌하옵니까?" "기걸 내래 어찌 알갔네? 사람의 일이란 한치 앞을 못 보는 기야." "섭섭하옵니다. 소첩의 장래를 정 모르신다 하오면, 소첩은 은장도로 목숨을 끊겠사옵니다." "야래 말하는 것 좀 보라우. 목숨을 와 끊네?" "서방님이 떠나신 세상을 홀로 어찌 산단 말씀이옵니까. 무정하시옵니다." "보라우. 내래 언제 자운이를 버리갔다고 했네? 사람의 앞날은 누구도 점칠 수 없다는 뜻이야." "소첩은 모르옵니다. 모르옵니다." 자운이 발버둥을 치며 훌쩍훌쩍 울음을 터뜨리자, 오원이 난감에 빠져 어찌할 바를 몰라 그녀을 멀뚱히 바라보기만 했다. 자운이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자 오원이 그제서야 자운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을 안았다. "울디 말라우. 자운이를 버리갔다는 말은 안 했어야. 내래 요렇게 귀여운 자운 이를 어드렇게 팽가치갔네. 안 기러네?" "모르옵니다. 모르옵니다." 에미나이는 역시 성가시구만기래." 14 1883년 계미년을 맞으면서 오원도 어느덧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불혹의 나이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속세에 살고 있 으면서도 그에 편승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었다. 범부들처럼 편히 안주하거나, 안 온한 미래를 꿈꾸거나, 출세를 탐색하거나, 명예를 높이거나, 자신을 휘장하여 허세를 부리거나 하는 다위에 무고나한 중에 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삶 과 죽음에도 항상 초연하였다. 사람의 출생은 한 조각 구름이 뜨는 것과 같고 죽은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의 허무주의적인 인생관은 축복받지 못한 출생과 춥고 배고팠던 어린 시절 과 늘 멸시 속에서 성장했던 서러운 젊은 시절 등의 우울한 역정에 기인한 것이 었다. 오원은 근래에 와서 거암 오경연 집에 자주 드나들었다. 오경연은 청나라 역 관인 오경석의 동생으로, 한때 고람한테 그림을 사사할 만큼 산수화에 능한 화 가였다. 오경연은 그의 형이 청나라를 왕래할 때 가져온 대가들의 그림을 ㅁ낳 이 소장하고 있었다. 오경이 마침 오원의 재주를 알고부터 그와 친하게 되었고, 오원은 자연 그의 집에 있는 중국 대가들의 그림들을 낱낱이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절지와 기면의 그림들을 깊이 관찰하였고, 이를 토대로 지금가지 그려 왔던 자신의 기명과 절지에 관한 화법에서 과감하게 ㅂ서어나 나름대로 독 창적인 예술세계를 이루어 갔다. 이처럼 오원은 새로운 소재나 기법을 대충 보는 법이 없고, 항상 깊이 연구하 여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데 탁월하였다. 오원은 오경연과 같은 연배여서 늘 편안한 마은으로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오경연 역시 오원이 자유분방하기는 해도 일단 그림앞에서는 매우 진지하여, 그 러한 모습을 볼 때마다 감동을 받곤 하였다. 그는 오원이 방물할 때마다 꼭 주 안상을 푸짐하게 마련하였다. 그러나 대가들의 그림 앞에서는 술을 마시기는커 녕 거들더보지도 않았다. 마치 그리메 넋을 빼앗긴 것처럼 미동도 않고 장시간 그저 들여다보기만 하였다.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때로는 한숨을 짓기 도 하였다. 주인인 오경연쯤은 안중에도 없었다. "오원. 그렇게 장시간 보시면 그림에 구멍 나지 않겠소이까." "내래 지금가지 그림을 헛그렸시오." 오원이 그제서야 그림에서 시선을 거뒤들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오경연이 당 치않은 겸손이라고 해도 오원은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대체 무엇을 보고 그러시오?" "이것 좀 보시라요. 청나라나 조선이나 다 비슷한 기명인데도 그림 속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습네까. 같은 사물을 그리는 기법이나 색채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습네까?" "그거야 그린 사람의 마음 탓 아니겠소." "바로 기겁네다. 우리는 거저 실물과 똑같이 그려 내는 일에만 매달렸는데, 이 사람들이래 다릅네다. 사물을 자기 뜻에 다라 마음대로 변형을 시키고 있습네다. 이는 바로 사물의 본질을 깊이 꿰뚫었다는 것이디요." "바로 보셨습니다. 오원의 뜻이 저와 같소이다. 우리는 그저 사물의 겉만 보았 을 뿐이지만, 저들은 그 속까지 들여다 보았다는 말입니다." "기건 관찰력이래 특별한 탓입네다." "그렇고말구요. 그건 사람의 인품을 겉으로만 봐서는 아니 된다는 이치와 같습 니다." 그렇게 말문이 트기 시작하면서 밤을 꼬박 세워 술을 마시곤 하였다. 오원은 그림을 감상하는 일과 술 마시는 일만큼은 시간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리고 는 마치 제 집처럼 며칠씩 묵기도 하였다. 주인한테 폐가 된다는 생각은 아예 떠오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기렇습네다. 무엇이든 그 본질을 깨달아야 되는 기야요." "범은 그려도 뼈다귀는 못 그리는 이치가 바로 그거 아니겠소." "기렇습네다. 화가는 호랑이의 뼛속가지 들여다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가져야 합 네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누구나 치지격물하는 정신을 가 져야 될 것입니다. '대학'에 '고지욕명 명덕어천하자 선치기국 욕치기국자 선제기 가 욕제기가자 선수기신 욕수기신자 선정기심 욕정기심자 선성기의 욕성기의자 선치기기 치지재격물'이라는 말이 있소이다. 옛날, 명덕을 천하에 밝히려는 자는 먼저 나라를 다스렸고, 그 나라를 다스리려는 자는 몬저 그 집안을 바로잡았고, 그 집안을 바로잡으려는 자는 먼저 그 몸을 닦았고, 그 몸을 닦으려는 자는 먼 저 그 마음을 바르게 했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려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성실하 게 했고, 그 뜻을 성실하게 하려는 자는 먼저 그 앎을 철저하게 했으니, 앎을 철 저하게 함은 곧 사물을 구명함에 있다고 했소이다. 이처럼 옛 성현들도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그 본질을 밝히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습니다. 허니, 오원 의 뜻은 이미 그 깊이를 깨닫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래 워낙 배움이 없어서 성현들의 말씀까지는 깨닫지 못합네다. 기러나 학문 과 예술이 그와 같은 이치를 외면할 수는 없디 않습네까." "이르다 뿐입니다. 오원께서 학문이 없다 하셨지만, 이미 그 이치를 터득하고 계시니 학문을 하신 것이나 다름이 없소이다. 많은 사람들이 옥하가옥하고 있지 만, 오원께서는 양옥부조와 같이 천부적인 재주를 가지셨으니, 그 부러움을 어디 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내려 준 것이지요." "기렇디 않습네다. 거암과 같은 분이 곁에 계시니까니, 내래 오늘에 와 있는 것 입네다. 기렇고말고요." "저야 소장하고 있는 전적들응 오원께 보여 드렸을 뿐인걸요." "거암을 만나디 않았다면, 이런 작품을 어케 봅네까. 감사하고 있시오." "그나저나 석창의 작고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좋은 그림을 더 남겨야 하는데..." "정말 좋은 사람이댔시오. 양반 티를 조금도 내디 않은데다가 성격이래 호방해 서 상대방 마음을 아주 편하게 했디요. 그림도 좋디 않습네까." "그렇고말구요. 그분의 영모나 산수도 좋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유압도는 단연 압권이지요." "그 독창성은 당연히 독보적입네다. 재주 있는 사람이래 와 오래 살디 못하는 지 안타깝습네다. 해사래 죽었을 때도 충격이 컸댔시오. 서른 다섯이면 요절한 거이 아닙네까. 이제 석창마저 잃었으니 인생무상이 실감납네다." "오원 말씀처럼 인생은 뜬구름이지요." "기래서 인생을 아웅다웅 살 필요가 없는기야요." 오원이 거처의 뜰을 거닐며 사색에 잠겨 있는데, 소림 조석진이 웬 청년 하나 를 데리고 나타났다. 조석진은 양기훈한테 이미 오래 전에 소개를 받아 친교를 맺었다. 오원이 그의 재주를 매우 아끼고 있는 터라, 왕래가 자연 잦을 수밖에 없었다. "오원 선생님, 그간 별고 없으셨습네까?" "항상 잘 지내고 있디. 오랜만에 왔구만기래." "자주 찾아뵙디 못해서 죄송합네다." 조석진이 오원을 스승으로 모시겠다고 한 이후부터 예의가 항상 깍듯할 뿐만 아니라, 오원으로 하여금 하대토록 간청까지 하였다. "저분은 처음 보는데, 누구시네?" "오원 선생님께 소개할 사람입네다." "기래? 날래 안으로 들라우." 오원이 먼저 방으로 들어가고 이어서 조석진과 청년이 따라 들어갔다. 오원이 좌정을 하자 청년이 무릎 꿇은 자세로 앉앗다. "어르신께 인사 올리겠습니다. 이른은 안중식이라 하옵니다. 순흥이 본관이옵 고, 신유생이옵니다." "어드렇게 오셨습네까?" "말씀을 낮추십시오.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자 청을 넣으러 왔습니다. 하오니, 부디 거절하지 마십시오." "기럼, 그림을 배우갔다는 말입네까?" "그렇습니다. 선생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터라, 소림께 오래 전에 부탁을 드렸습니다." "나한테 배울 거이 뭐가 있갔시오." "아니올습니다. 선생님의 화격을 진작부터 흠모하고 있었습니다. 부디 저를 받 아 주시면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소림이래 어드렇게 이분과 알게 됐네?" "삼년 전 제가 관비공학도로 천진에 갔을 때 동행이었댔습니다." "삼년 전이면 겨우 스무 살인데, 거기에 끼였구만기래. 공학도로 뽑혔으면 도 화 시험에도 합격된 거이 아니가. 그림에 재주가 있갔구만." "그림에 재주가 있을 뿐만 아니라, 머리래 아주 명석합네다." "기렇갔구만." 조선이 서양과 수교하여 개항하고부터 조정에서는 1881년 청나라 천진에 있는 서양식 기기창에 관비로 공학도를 보내 각종 기계 제조법과 조작법을 배워 오도 록 하였다. 서양문물이 들어오면서 과학의 필요성을 자각한 조정이 한양과 의주 에서 중인계급의 영리한 청년 38명을 선발하여 천진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때 28살의 조석진과 20살의 안중식이 선발되어 서로 친하게 되었고, 천진에 함께 머무는 동안 조석진으로부터 오원에 대한 얘기를 자세히 듣게 된 것이다. 안중식의 아명은 원래 욱상이었다. 가난한 중인 집에서 태어난 그는 여덟 형 제 중 막내로, 12살 때 이미 양친을 잃었다. 그가 소년 시절을 불우하게 보내긴 했으나, 그림에 천부적인 재주가 있어 일찍부터 주위 서화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면서 당연히 장승업과 비교가 되었다. 어린 시절의 불우한 환경이나 천부적인 재주가 서로 비슷하였기 때문이다. 안중식이 특별히 오원은 존경한 데에는 그의 화격에 있었지만, 그보다는 오원의 출생과 자라 온 환경이 자신과 너무 흡사한 데 있었다. 더구나 안중식이 양친을 여의고부터 서화가들의 집을 전전하며 그림 을 익혔다는 점까지 오원과 비슷하였다.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오원이 일자무 식인 데 비하여 안중식한테는 학문이 있다는 것이다. 조식진으로부터 안중식의 이 같은 얘기를 듣고 난 오원이 매우 감동하여 동병 상련으로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오원과의 만남 이후로 안중식은 자주 스승의 집을 방문하였고, 오원 역시 안 중식을 친아우처럼 반기곤 하였다. 뜻밖에 개똥이가 찾아왔다. 그는 오원이 광주 분원에서 빠져 나올 때 함께 따 라나섰다가, 오원의 주선으로 지금은 미욱의 주막에서 일을 거들며 기숙하고 있 는 중이었다. 왠지 개똥이가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쩐지 심상치 않은 일을 겪 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원이 웬일로 왔느냐고 물어도 선뜻 대답하지 않고 한참을 우물쭈물하였다. "답답하구만, 와 기러네? 주막에서 쫓겨났네?" "그런 게 아닙니다요." "기럼 와 기렇게 서 있기만 하네? 날래 들어오디 않고." "실은, 나으리한테 난처한 일이 닥쳤습니다요." "난처한 일이 닥치다니, 기거이 무슨 말이가?" "...자운이 아씨께서 오셨습니다요." "뭐이 어드래? 누구래 왔다고?" "자운 아씨께서 오셨다니까요." "에미나이래 와 또 왔네?" "소인이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혼자 오신 것도 아니고, 도련님하고 같이 오신 걸입죠." "미치갔구만... 지금 어디메 있네?" "주막에 계십니다요." "미치갔구만. 다시는 오디 않갔다고 했는데." "어떻게 할깝쇼. 모시고 올깝쇼?" "무작정 데꾸 오면 어카네." "주막에 마냥 계시게 할 수는 없잖습니까요." "내래 칵 죽어 없어져야 되갔구만." "함께 사시면 되지 않습니까요." "야래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기야? 살림을 차리란 말이네?" "처자를 박대하시는 건 옳지 않습니다요. 도련님이 불쌍치도 않으십니까요?" "기래두 살림은 못 차리갔어." "그리하시면, 살아갈 방도라도 마련하심이 옳을 듯싶습니다요." "기렇기는 하디만... 알았어. 당장 가서 데꾸 오라루." "참말이십니까요?" "...기래." 당시 오원이 자운이와 동거를 하는 동안 기어코 아이가 생겼다. 자운이가 입 덧을 하는 중에도 오원은 설마설마 했었다. 그러나 달이 지날수록 자운의 배가 눈에 띄게 커지자 비로소 현실로 받아들였고, 그때부터 오원은 고민에 빠졌다. 아이 아버지가 된다는 기쁨따위는 눈꼽만치도 없었고, 위기의식에 빠져 오로지 도망칠 궁리만 하였다. 오원의 속내를 까맣게 모르고 있는 자운은 잉태한 여자 가 흔히 부리는 어리광만 늘어 갔다. 오원은 그 꼴부터 보기 싫어 밤마다 술만 퍼마시거나 아예 분원에서 나오지 않는 날이 허다했다. 이때 마침 분원에서 오래 머물렀던 화원들을 교체하는 시기가 왔다. 그러나 오원은 교체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것은 정학연의 생각으로, 오원이 자운에게 빠져 깨가 쏟아지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낭패에 빠진 오원은 그 길로 정학연을 만나 분원에서 떠나게 해줄 것을 간청 하였다. 그러자 정학연은 의외라는 듯이 오원의 뜻을 의심하였다. "허면, 자운이와 헤어지겠다는 말씀이시오?" "기건 나중 문제고, 우선은 광주 땅에서 벗어나고 싶습네다." "듣기로는 곧 아이를 생산한다는데, 어찌하시려오?" "기것도 나중 문제야요." "어허... 이런 변이 있나. 계집이 오원은 순순히 보내 줄지 모르겠소." "어쨌든 여기를 벗어나고 싶습니다. 좀이 쑤셔서 못 견디갔시오." "오원의 생각이 저엉 그러시다면야..." 오원은 분원을 떠날 때까지 자운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궁금해진 자운이 사동 을 시켜 오원을 불러내려고 해도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는 며칠 후 말없이 한양으로 줄행랑을 쳤다. 오원은 성가신 혹을 마침네 떼어 버렸다 싶어 전처럼 여유로운 마음으로 다시 그림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세상 일이 다 그렇듯이 오원의 마음이 마냥 편하도 록 두지는 않았다. 오원이 한양으로 돌아온 지 일년쯤 되는 어느 날, 느닷없이 자운이 아이를 업고 나타난 것이다. 그때 오원은 마음은 마치 포졸에게 들킨 도 둑의 심정이었다. 자운이 아이를 안고 앉아서 애고애고 울음을 터뜨리며 원망을 퍼부었다. 뜻밖의 낭패에 빠진 오원은 자운에게 죄책감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 는 그녀를 돌려 보낼 궁리만 하였다. 자운은 자운대로 어떻게든지 오원의 마음 을 돌려 놓을 양으로 아이를 앞세워 다시 살림을 꾸릴 계획을 하고 있었다. 자 운의 속을 휜히 꿰뚫고 있는 오원은 무슨 수를 쓰든 그녀를 다시 내려보낼 생각 이었다. 그 첫째 방법으로 돈을 쥐여 주고 감언이설로 자운의 마음을 달래는 일 이었다. 오원이 그 동안 그림값으로 받아 놓은 돈에다가 달리 융통한 것을 합하여 자 운에게 건네 주며, 광주에 가서 장사나 하라고 하였다. 자운이 처음에는 물러서 지 않을 듯이 눈을 하얗게 되집어 악을 바락바락 쓰더니, 오원이 집을 나가 종 적을 감추자 하는 수 없이 광주로 내려가 버렸다. 그리고는 여지껏 소식을 끊다 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한참 만에 개똥이가 자운이와 그새 불쑥 커 버린 사내아이를 달고 돌아왔다. 오원은 자운을 보자마자 대뜸 소리부터 질렀다. "다시는 오디 말라고 했는데, 와 또 왔네?" "아비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 어찌 근본 없는 자시으로 크도록 둔다는 말씀입 니까." "기럼, 날보구 아이를 키우라는 말이네?" "소첩 혼자서 키우기에는 힘에 부치는 일이옵니다." "기래서 어카갔다는 기야." "달리 살아갈 방도를 마련해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장사 해먹으라고 돈을 줬잖네. 다 까먹었네?" "장사를 했지만, 잔뜩 손해만 보고 말았습니다." "...돈을 마련해 주면, 다시 내려가갔네?" "서방님께서 그리 원하신다면, 소첩인들 별 도리가 있겠습니까. 서방님 편하실 대로 해 드려야지요." "알았어, 서두러 마련해 줄 테니까니, 당분간 기다리라우." 오원은 그려 둔 그림을 그 당장 몽땅 팔고도 또 부지런히 그리는 족족 돈으로 바꿨다. 그렇게 해서 마련한 돈이 며칠 새에 삼백냥이 되었다. "이보라우. 내래 보통 남정네처럼 가정을 꾸려 살 수 없는 놈이야. 기러니까니 힘이 들어도 님자 혼자서 아이 데리고 살라우." 오원은 아이한테도 타이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너는 아바지래 없는 놈이니까니, 오마니 말 잘 들어야 하는 거야. 오마니한테 글 배워서 장차 훌륭한 사람 되라우. 알갔네?" 그러자 아이가 훌쩍훌쩍 눈물을 짜내더니 갑자기 고개를 반짝 들었다. 그 눈 동자에 아비를 원망하는 빛이 역력하였다. "아버님이 엄연히 계시는데, 어째서 없다고 말씀하십니까?" "...아비 노릇을 해야 아바지래 되는 기야. 내래 아비 노릇을 할 수가 없어서 기래." "어머님 말씀이, 아버님은 조선에서 이름을 날리는 화가라 하셨습니다. 그토록 훌륭하신 분이 어째서 아버지가 될 수 없다 하십니까?" 아이는 뜻밖에 당돌하였다. 오원은 아이가 구슬을 뱉듯이 또랑또랑하게 던지 는 항변을 듣는 동안, 마치 예리한 칼이 가슴을 긋는 것처럼 섬뜩해지면서 갑자 기 죄책감에 빠져 버렸다. "내 말 잘 들으라우. 내래 장돌뱅이ㅊ 여게저게 떠돌기를 좋아해서, 다른 집처 럼 좋은 아바지래 될 수가 없어 너한테 글도 배워 줄수 없고, 우리래 함께 살 만한 거처도 없는 몸이야. 기러니까니, 너는 아바지래 없다 생각하고 다시는 나 를 찾아오디 말라우. 알갔네?" 오원은 차마 아이와 더는 마주 앉아 있을 수가 없어 그 길로 집을 나와 버렸 다. 그리고는 평소 자주 찾던 관수동 기방에 파묻혀 며칠 동안 밤낮으로 술만 마셔 댔다. 그렇게 모자를 매정하게 쫓아 버리긴 했으나, 아이 모습이 눈앞에 자 꾸 아른거려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인생을 생멸 하는 구름으로 마음에 새기고 있는 그로서는 자식에게 미련을 가질 수가 없고, 가져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오원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간혹 울다가 웃다가 하며 사흘 밤낮 오로지 술 만 마셨다. 그에게 들여보낸 술동이가 열 개도 더 되었다. 소실처럼 구는 기생이 아무리 말려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술 먹지 마자하고 중한 맹세 하였더니 잔 잡고 굽어보니 맹세 둥둥 술에 떴다. 아이야 잔 가득 부어라 맹세풀이 하리라. 15 오원이 오랜만에 거암 오경연 집에 들렀다. 자운이 아이를 데리고 느닷없이 나타나는 바람에 산란한 마음으로 열흘도 넘게 술독에 빠져 있었다. 그렇게 밤 낮없이 취중에 있으면서 이러다가는 정신이 마비되어 그림도 그리지 못하고 죽 겠구나 싶어, 며칠 만이라도 술을 멀리해야겠다는 작심을 하였다. 게다가 소실로 자청하고 있는 기녀 진향이 어찌나 어깃장을 놓는지, 그녀가 귀찮아서도 잠시 피하고 싶었다. 말이 좋아 소실이지 오원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역할이었다. 본처 를 둔 적이 없는 오원한테 소실이란 당치도 않았다. 비록 자운이가 있기는 해도 정식으로 혼인한 관계가 아니므로 진향이를 소실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도 오원이 자식이 있는 남자라 하여 진향이 쪽에서 스스로 소실로 생각하였다. 기녀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진향이도 자운이 못지않게 서화를 익히고 있어 기 특한데가가, 얼굴이 옛날 연홍이를 빼닮아 오원이 첫눈에 빠져 버렸다. 그너나 겪어 보니 마음은 그다지 곱지 않았다. 어깃장 말고도 요염한 기생 티를 자주 낼 뿐만 아니라, 소유욕이 강해서 오원 은 자주 귀찮게 하였다. "서방님, 소첩을 언제까지 기방에 처박아 두시렵니까?" "기럼, 날보구 어카란 말이네." "이제 기생질에 신물이 났사옵니다. 더군다나 서방님 소실이 되고보니 기생질 이 더욱 싫어지지 뭡니까." "내래 어드렇게 해 주면 좋갔네? 나한테 시딥 오갔다는 말이네?" "집이라도 한채 얻어 주시어요. 그래야 서방님 모시고 깨가 쏟아지게 살지 않 겠어요?" "기러다가 아새끼래 생기면 어카네?" "아이가 생기면 당연히 낳아야지요." "기딴 소리 하디 말라우. 내래 이미 얘기했잖네. 나한테 아새끼래 있디만 키우 디 못한다구." "그럼 아이는 낳지 않구, 서방님만 모시고 살겠어요." "잉태를 니 마음대로 하네? 기건 하늘이래 점지해 주는 기야." "그건 염려 마시어요. 아이를 잉태하고 아니 하는 것은 여자 하기 나름이옵니 다. 그러니까 더도 말고 누옥이나 한 채 얻어 주시어요." "나한테 그 만한 동이 어디 있갔네." "나으리 그림 몇 점이면 넉넉할 것이옵니다." "기럼, 날보구 그림 팔아 오라는 말이네?" "그럴 수는 없사옵니다. 저한테 몇 점 그려 주시면 살 사람한테 제가 다리를 놓겠습니다." "...옳은 일인지, 생각 좀 해 보자우." "그림만 그려 주시면 될 일이옵니다." "일이란 기렇디 않아." 오원은 진향의 생각을 그 정도로 미루어 놓고 기방을 빠져나왔다. 자운한테 크게 덴 적이 있는 그로서는 여자와 또 살림을 차리는 일이 귀찮은 데다가, 그 림을 팔아야 하는 일이 찜찜하였다. 그렇잖아도 오원이 그림을 너무 남발하고, 자주 돈과 바꿔먹는다는 조소가 항간에 돌고 있어 마음이 불쾌한 중에 있엇다. 여자와 살을 섞는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여자한테 묶이는 것은 귀찮았다. 툭하면 어깃장이고 강짜라, 여자란 참으로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오경연은 오원의 방문을 받고 몹시 반가워했다. 그간 적조했던터라 오원의 근 황을 궁금하게 여기던 차였다. 오원이 기방에 처박혀 술로 나날을 보내고 있었 음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그로서는 여간 반갑지 않았다. "오원께서 하도 소식이 없어, 멀리 떠나신 줄 알았소이다." "술독에 오랫동안 들어가 있었시오." 이때 문 밖에서 하인이 "큰댁에서 도련님이 오셨습니다요." 하였다. 큰댁이라 함은 오경연의 형 오경석을 말하는 것이다. "들라 해라." 이내 문이 열리며 청년 하나가 들어왔다. 그는 오경연에게 인사를 넣은 다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인사 올리거라. 오원 장승업 화백이시다." 그러자 청년이 매우 놀라 표정으로 서둘러 오원한테 인사를 차렸다. "세창이라 하옵니다. 뵙게 되어 광영이옵니다." "오원, 제 조카올시다." "기럼, 형님의 자제분입네까?" "그렇습니다." "서도에 능하다는 그 청년이구만요." "능하다 하심은 너무 과한 말씀입니다. 겨우 붓이나 잡는 처진걸요." "형님께서 이런 자제분을 두셨으니, 흐뭇하시갔습네다." "글쎄올시다." "훌륭한 청년한테 인사를 받았으니 거냥 있을 수가 없갔습네다." "무슨 말씀이시오?" "그림이나 한 점 줘야갔구만요." "허허, 이런 광영이 어찌 또 있겠소이까. 세창아. 그렇지 않느냐?" "그러하옵니다. 평생 잊지 못할 광영이옵니다." 오경연이 대뜸 오원 앞에 지필묵을 내놓았다. 세창이 서둘러 먹을 갈기 시작 했다. 그러나 오원이 소재를 생각하느라 눈을 지그시 감더니 왠지 입가에 웃음 을 싣는 것이었다. 오원이 오세창에게 그려 준 것은 어해절지였다. 물고지와 게가 수초 사이에서 노니는 그림이었다. 오세창이 그림을 한참 들여보다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경연이 왜 그러느냐고 물었다. 오원은 시침을 떼고 빙그레 웃기만 하였다. 마 땅히 두 개이어야 할 게의 집게발을 세 개로 그려 놓은 것이다. "어른신의 깊은 뜻이 매우 궁금하옵니다." 그러자 오원이 걸걸걸 웃었다. "다른 모양이 있어야디, 모두 똑같이 그리면 재미가 없디 않갔어?" "하오면, 실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변형하여도 상관없다는 말씀이옵니까?" "기건 사물을 보는 사람의 마음이 기렇다면 할 수 없는 기야. 같은 사물이라도 관찰하는 사람에 다라서 얼마든지 다르게 볼 수 있디, 사물을 제 아무리 똑같이 그리려고 해도 실물과 같을 수 없는 것 아니갔어?" "하오면, 어르신께서는 게의 집게발을 세 개로 보신 적이 있사옵니까?" "기렇디는 않고, 발가락이 세 개였으면 더 좋갔다는 생각은 했디, 사람한테도 팔이 한 개쯤 더 있었으면 좋갔어, 기럼, 그림도 한꺼번에 두 장씩 그릴 수가 있 으니까니." 오원이 또 걸걸걸 웃으며 혼자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오세창은 소문대로 그 가 얼마나 호방하고 자유분방한 사람인가를 사실로 깨닫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를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저류에 깔리기 시작하였다. 오세창은 후에 박문국의 주사로 있으면서 '한성주보'의 기자를 겸임하였고, 우 정국 통신국장을 역임했다. 또 1896년에는 일본 문부성의 초청을 받아 외국어 학교 조선어 교사가 되어 일본에서 1년간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그 후 '만세보' 와 '대한민보' 사장을 역임하였고 1913년 3,1운동때는 민족 대표 33인 중에 한 사람이 되어 독리선언서에 서명하고 3년간 투옥된 적이 있을 만큼 애국하는 일 로 일생을 보낸 인물이었다. 오원은 진향의 요구를 끝내 물리치지 못하고 관수동에다 두 칸짜리 집 한 채 를 얻어 주었다. 그녀의 유혹을 물리찰 방도를 이리 저리 생각했으나 여자가 부 리는 아양에는 당할 재주가 없었다. 진향은 신접살림을 차리듯 분주하게 몸을 놀려 이것저것 자질구레한 것들을 마구 들여놓았다. 오원은 그러한 장면에서부터 질리기 시작했다. 자잘한 생활 품 목들이 마치 자신을 얽어매기 위한 흉기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자 옛날의 자운이처럼 진향이도 본격적으로 아내 티를 내기 시작하면서 사사건건 간섭하려 들었다. "서방님, 이제 살림 맛도 왠만큼 드셨으니 술 좀 그만 드시어요. 밤낮으로 술 독에 빠져 계시니 옥체 상할 까 우려되옵니다." "기딴 소리 말라우. 술 없이는 살디 못하는 사람이야. 나 같은 몸뚱이를 두고 옥체가 웬말이가, 기건 지체 높은 양반들한테나 쓰는 말이야." "서방님이 어째서 지체가 없다는 말씀입니까. 조선의 유명한 화가시온데, 서방 님 같은 분이 지체가 높지 않으면 누가 높다는 말씀입니까." "기렇디 않아, 지체가 높은 집안은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온 지위난 문벌이 있 어야 하는 기야. 우리래 집안은 이렇다 할 지위도 없고 문벌도 없어, 기러니까 니, 우리래 거저 쌍놈처럼 마음 편하게 살면 되는 기야." "서방님 건강도 우려되지만 그토록 술만 드시면 소첩이랑 언제 정분을 쌓습니 가. 서방님 체취를 느껴 본 지가 언제인지 까마득하옵니다." "암내 풍기누만." "암내가 무엇이옵니까. 듣기 망측하옵니다." "짐승도 아닌데, 맨날 교미만 하네? 잊을 만할 때 가끔씩 하는 거이 좋은 기 야, 귀찮아." 그러자 진향이 이내 뾰로통해서 눈물을 자내기 시작했다. 오원은 이래 저래 성가셔 어느 대는 며칠씩 들어오지 않고 다른 기방에서 술을 마셨다. 그러자 이 번에느 진향이 눈가지 뒤집으며 강짜를 놓았다. 여자가 그럴수록 오원은 그녀를 멀리 하여 외박을 다반사로 하였다. 그렇다고 다른 계집을 취하는 것도 아니었 다. 오로지 술만 마셔 댈 뿐이었다. 근 열흘을 외박으로 떠돌던 어느날, 진향을 너무 박대한다 싶어 오늘만은 거 처로 들어갈 작정을 하였다. 마침 달빛이 교교하게 흐를 즈음에 오원은 몸을 비틀거리며 관수동으로 향했 다. 오랫동안 집을 비우자 여자가 아예 문을 굳게 잠가 놓고 있었다. 문을 흔들 어 볼까 하다가 그래도 미안한 생각이 들어 담을 타고 들어갔다. 오원이 진향을 놀려 줄 셈으로 숨을 죽이고 섬돌에 막 발을 올려 놓는 순간 남정네 신발을 발견하였다. 취중에도 예사롭지 않아 헛기침을 두어 번 뱉었다. 그러자 불도 밝히지 않은 방 안에서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여 자가 당황하는 음성도 새나왔다. 오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마루로 성큼 올라 방 문을 확 열어제쳤다. "누, 누구시어요?" "이 에미나이 좀 보라우. 서방도 몰라보네?" "에그머니나!" 진향이 놀라서 뒤로 발랑 넘어가는 사이에 사내 하나가 옷도 챙겨 입지 못한 꼴로 뒷문을 열고 있는 모습이 달빛으로 훤히 보였다. 사내는 문을 밖으로 민다 는 것이 안으로 당기고만 있었다. "이보라우. 그 문짝은 밀어야 열리는 기야. 기러고, 아무리 급해도 옷은 입고 가야디, 기런 꼴로 어케 가겠네. 날래 옷부터 입으라우." 그러자 사내가 속옥 차림으로 납작 엎드리더니 두 손을 머리꼭지에 올리고 불 이 나도록 빌었다. 그 사이에 진향은 치마를 두르고 저고리를 꿰느라고 정신을 못 차렸다. "나으리,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요. 제가 여자에 그만 눈이 뒤집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요. 죽여 주십시오." "이보라우. 계집 좋아하는 거이 뭐가 잘못이가, 님자래 잘못이 없어." "나으리. 당치않은 말씁이옵니다. 차라리 목을 쳐 죽이십시오." "기렇디 않아. 계집은 사물이고, 주인이 따로 없는 기야. 눈에 차면 가지는 거 이 님자야. 이왕 왔으니까니 천천히 놀다 가라우." "나으리..." "서방님..." 남녀가 앞다투어 오원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그러나 오원은 그들의 손을 부리 치고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그러자 진향이 울며불며 따라나와 오원의 장딴지를 껴안았다. "서방님. 차라리 소첩을 죽이고 가셔요." "기럴 필요 없어야. 네 짝을 만난 것뿐이야." 오원이 진향의 팔을 가볍게 물리쳤다. 그리고는 또 걸걸걸 웃음을 날렸다. "서방님, 이리 가시면 아니 되옵니다. 소첩을 죽이고 가시어요." "기렇디 않아. 천한 것은 천하게 사는 거이 옳은 이치야. 내래 천하게 태어났 으니까니 쌍놈처럼 사는 거이 옳고, 네년도 천하기는 마찬가지니까니 지조니 뭐 니 찾디 말고 네 뜻대로 살라우. 기거이 잘 사는 기야. 놀던 계집은 결단이 나도 엉덩이 짓은 남는다는 속담도 있잖네. 진향이래 기렇게 살라우. 달걀 같은 세상, 호박처럼 사는 거이 좋은 거야. 잘 있으라우." "서방님, 제 잘못이 아니니, 소첩은 원통하옵니다." "암탉이 오리알을 낳고도 수탉한테 할 말이 있다더니, 네년이 기 짝이로구나. 원통한 것도 팔자디." 오원은 긴 말 더 늘어놓지 않고 서둘러 집을 빠져나오면서 풍월에 들었던 시 조 한 수만 떨어뜨렸다. 민남짐 그놈 자총벙거지 쓴 놈 소대서방 그놈은 삿벙거지 쓴 놈 그놈 민남진 그놈 자총벙거지 쓴 놈은 빈 논에 정어리로되 밤중만 삿벙거지 쓴 놈 보면 샐별 본 듯하여라. 오원은 이제 여자와 살림 차리는 짓은 다시 않기로 스스로 다짐하였다. 즐거 움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여자란 역시 성가신 존재였다. 자운이는 원하 지 않는 아이를 낳아 미래에 큰 짐을 지게 하였고, 진향은 자신의 욕정을 못 이 겨 배신과 실망을 안겨 주었다. 남자의 원수는 술과 계집이라는 말이 있듯이, 오 원도 결국 술 때문에 진향이와 어정쩡하게 정을 붙여 이 모양이 되었다. 밤이면 여자 있는 집에 벙거지 쓴 놈들이 들락거린다고 했다. 진향의 행실이 과히 좋은 편이 아니라 했더니, 기어코 딴 사내를 집 안으로 불러들이는 못된 짓거리를 하 였다. 그녀의 방정치 못한 품행이 마땅치 않아 술 먹고 크게 꾸짖은 적도 있었 다. 그러나 결과는 버릇 고치라니까 과부집 문고리 빼들고 엿장수 부른 셈을 진향 이 손수 실천한 꼴이었다. 허긴, 에미나이하고는 겨울 날씨는 믿디 말라고 했다. 오원은 갑자기 허무감에 빠져 휑하니 뚫린 가슴을 어느 술집에 가서 메우나 하고 이리저리 한참을 궁리하였다. 순라군들이 야경을 돌기 전에 아무 곳에고 몸을 숨겨야 할 시각이었다. 진향한테 집 얻어 주느라고 혼자 쓰던 거처마저 처 분하여 당장 누울 곳마저 잃은 신세가 된 그였다. 아무 집이고 들어갈 양으로 기방 몇 집을 기웃기러는 중에 마침 대문이 삐긋 열린 집이 있어 무작정 발을 넣었다. 분명 낯선 집이었다. 오원은 "이리 오너라." 하고 짐짓 양반 흉내를 냈다. 그러자 머슴인 듯한 젊은 사내가 느럭느럭 나타났 다. "술을 드실 생각이시라면 너무 늦은 시각입니다요." "이보라우. 술 마시는 시간이래 따로 있네? 아무 때고 마시고 싶으면 마시는 거디." "여기는 기방이라 벌써 장사를 마감했습니다요." "날래 들어가서 주인한테 고하라우." "주인 아씨께선 진작에 잠자리에 드신걸요." "어허, 들어가서 오원 장승업이 왔다고 이르라우. 기러면 깨어날기야." "...누구라굽쇼?" 이때 안채 방문이 열리며 여자 하나가 고개를 내밀더니 웬 소란이냐고 머슴을 나무랐다. "낯선 어른이 오셔서, 술상을 내라고 하십니다요." "누구신지는 모르오나 이 시각에 술상이 웬말입니까. 혹 상감이시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돌아가십시오." "상감이래 어드렇게 기방에 오시갔소. 내래 오원 장승업이란 사람이야요." "가만... 방금 누구라고 하셨습니까?" "장승업이라 하디 않았소." 그러자 여자가 문을 활짝 열어제치더니 황급히 대청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머 슴으로 하여금 오원에게 불을 가까이 밝히라고 하였다. "그럼, 소문이 자자한 그 화백 어른이시옵니까?" "기렇다니까니." "에그머니나. 얘 떡쇠야. 이 어른을 서둘러 모시어라." 여자가 새삼 옷매무새를 고치고 부산하게 돌면서 불을 있는 대로 밝혔다. 그 통에 당황한 쪽은 오히려 오원이었다. 이토록 환대를 하는 이유가 갑자기 궁금 하였다. 오원은 의구심이 들기는 하였지만 어쨌든 여자가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여자가 안내만 하고는 사라ㅈ다가 몸단장을 새로 하고는 다시 나 타났다. 그리고는 마치 고관대작을 대하듯 다소곳하게 인사를 차렸다. 불빛으로 본 그녀의 얼굴은 이미 사십은 넘긴 나이가 역력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나으리께서는 저를 알아보시지 못하시겠지만, 지금으로부터 이십년도 더 지난 시절에 뵈온 적이 있사옵니다." "기래요? 나를 어디메서 봤습네까?" "아뢰기 부끄러운 일이옵니다만. 한때 유곽에 있던 계집이옵니다. 나으리께서 당시 순라군한테 쫓기는 몸이 되어 저희 유곽에 몸을 숨긴 적이 있는 줄로 기억 합니다만... 마침 계집들한테 둘러싸여 봉변을 당하시다가 잠시 안으로 드신 적 도 있으시고요. 그때 애향이라는 계집한테 그림 한 점을 남기고 가셨지요. 제가 바로 그 계집이옵니다." "기래요? 오래 살다 보니까니 이런 인연도 있구만요. 그때 정말 그림을 그려 줬단 말이디요?" "그 그림을 지금껏 가지고 있는걸요. 보시겠습니까?" 말이 떨어지자마자 여자가 장롱을 열어 깊숙한 곳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 다. 그림은 전혀 기억에 없는 매화도였다. 뿐만 아니라 그림에 화제까지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새 한 마리 짝 잃어 외롭게 홀로 나니 네 짝 찾을 때면 나도 님 보련마는 짝 일고 그리는 한은 너나 내나 다르랴. "이거이 님자래 붙인 화제디요?" "성화에 못 이겨 감히 넣은 것이옵니다." "이제야 기억이 나누만요. 님자래 수줍음을 많이 탔더랬디요?" "유곽의 계집이 나으리 앞에서만 내숭을 떤 셈이지요." "기런데, 어드렇게 여게 와 있습네까?" "세월 따라 흘러흘러 여기까지 와 이 장사를 하게 되었지요. 그 동안 한 번쯤 뵙게 되기를 얼마나 학수고대했는지 모르옵니다." "내래 기토록 술을 마시러 돌아다녔댔는데, 어드렇게 이 딥만 모르고 지나쳤는 지 모르갔구만요." "연이 늦게 닿으려고 그런 것 같사옵니다." "기렇구만, 어쨌든 반갑구만요. 반갑고말구." "이처럼 뜻하지 않게 뵙게 되어, 저 같은 계집으로서는 광영이옵니다."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구만." 오원은 흐뭇한 기분에 빠져 잠시 추억을 더듬었다. 그때 애향은 양반집 규수 였으나 애비가 역적에 몰려 멸문지화하는 바람에 유곽에 던지는 몸이 되었다고 했었다. 그러더니 어느덧 나이 사십이 되어 기방가지 차렸다. 그때의 수줍고 곱 던 얼굴은 온데간데 없고 세월 따라 얼굴에 주름만 잔잔하였다. 주안상이 들어왔다. "기때는 머슴 처지라 술을 마시디 않았지만, 오늘은 밤새워 마시갔시오. 이런 기연을 맞은 날에 어드렇게 술을 마시디 않갔시오." "물론이옵니다. 저로서는 그저 광영뿐이오니 마음껏 드십시오." 젠장. 오늘은 희비가 엇갈린 날이구만. 17 야음을 틈타서 궁궐을 빠져나가는 재미에 맛을 들인 오원은 그후로도 두 번이 나 대궐을 탈출하여 배가 터지도록 술을 마셨다. 그러나 오래 앉아 있으면 새도 화살을 맞는다고 기어코 꼬리가 잡혔다. 무사할 수도 있었건만, 문제는 수 문군이 오원한테 받은 술병을 단속하지 못한 데에 있었다. 오원이 대궐을 빠 져나갔다가 돌아올때마다 군졸한테 술병을 안기곤 하였다. 군졸로서는 밤도 이슥한데다가 마침 배가 출출한 중에 있다 보니 감취 둔 술병 쪽으로 마음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었다. 군졸들이 처음에는 딱 한 병을 다 비우게 됐다. 당연 히 취할 수밖에, 수문장이 순찰을 돌 때까지도 깨어나지 못해서 결국 사건의 전말이 들통나고 말았다. 이튿날, 도제조가 오원을 불러들였다. 그때까지도 오원은 어젯밤에 일어난 사 건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림을 빨리 완성하라는 채근이 있을 것으로만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에 진척이 있소?" "아직 멀었습네다." "그 까닭이 무엇이오?" "술이 없으니까니 붓이 잡히질 않습네다. 술이라고 원 병아리 눈물만큼 주니까 니 감질이 나서 못 견디갔시오." "이보시오, 오원 그 나이에 어찌 그리도 경망하오." "...무슨 말씀입네까?" 그러자 도제조가 갑자기 안색을 바꿔 얼굴에 노기를 깔았다. 순간 오원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오원이 한 번도 아니고 무려 세 차례나 대궐을 빠져 나갔다는데, 어찌 된 일 인지 자초지종을 고하시오." "기걸 어케 아셨습네까?" "어허, 어떻게 알았든 오원이 상관할 바가 아니잖소." 일이 이쯤 되고 보니 오원으로서도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 의 행적이 모두 드러났으니, 오리발을 내밀어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갔습네다. 실은..." 오원은 비로소 그간에 있었던 일을 모두 털어놓았다. 문을 열어 줬던 군졸 들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도 차마 거짓을 말할 수가 없었다. "이보시오, 오원. 술을 하루에 석 잔만 주도록 엄명을 내린 분이 누군 줄이나 아시오? 주상전하께서 내리신 분부란 말이오. 주상께서도 오원의 주벽을 아시고, 나한테 친히 분부하신 일이오." "기거이 참말입네까? 정말 상감께서 기렇게 말씀하셨습네까?" "어허, 오원." "...알갔습네다. 내래 죽을죄를 지었습네다." "주상의 분부를 거역한 죄가 어떤 것인지 알기나 하시오? 기군망상하였으니, 그 죄가 어떠하리라는 것쯤은 잘 알 것이오." "'벌을 내리면 달게 받갔스네다." "그보다 더 급한 것이 어병이라, 이번만은 특별히 선처할 것이니 차후로는 이 런 일이 없도록 명심하시오. 그림을 빨리 완성하는 것만이 오원이 면죄받는 길이라는 걸 아셔야 하오." "...명심하갔습네다." 간신히 화를 모면한 오원의 마음은 참담하기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술과 분내 풍기는 계집이 곁에 있어야, 아니 술이라도 넉넉하게 있어야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오원으로서는 당연히 죽을 맛이었다. 도무지 그림에 진척이 없었다. 열 폭 그림에서 이제 네 점밖에 그리지 못했으니, 나머지 여섯 점을 그 려 낼 일이 참으로 아득하였다. 드디어 금단 현상까지 생겨 하루 종일 불안하 고 초조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불면증과 수전증에다가 동계와 동통까지 있어, 거의 반병신처럼 지내야 했다. 내래 이렇게까지 목숨을 부지해서 뭐 하네. 칵 죽고 말아? 도망을 가서 깊 은 산 속에 묻혀 살아? 오원이 그럭저럭 한 닷새는 버텼다. 그러나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다. 머리 속이 온통 술로 가득 찬 것은 몰론이고, 대궐 빠져나갈 궁이만 하다 보니 과 대망상증까지 얻었다. 홍길동처럼 담을 가볍게 넘는 장면, 신선처럼 구름을 불러 서 타는 장면, 자유롭게 출입이 허용되는 장면, 고종을 찾아가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도록 윤허를 받아 내는 장면 등을 꿈꾸며, 혼자 통쾌한 기분에 빠지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현실로 돌아왔을 때는 눈이 뒤집혀 발광 직전으로 자신을 몰 고 갔다. 드디어 오원이 또 꾀를 짜내기 시작했다. 그림 따위는 마음에도 없었다. 오로 지 대궐을 빠져나갈 궁리에만 젖어 있었다. 이튿날, 오원이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군졸들의 막사로 접근하였다. 그리고 는 수문군들이 교대하는 시간을 염탐하였다. 연이틀을 지켜보았다. 그의 계획은 근무자들의 교대 시간, 즉 다음 교대가 시작될 직전을 노리고 있었다. 마침내 계획을 실천에 옮길 시간이 되었다. 다음 근무자들이 아직 잠에 빠 져 있을 시간을 틈타 막사로 잠입하였다. 다행스럽게도 대궐을 순찰하는 순라 군 눈에 띄지 않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오원이 막사에 들어가 훔쳐 낸 것은 다름 아닌 군복이었다. 그것으로 변장을 하고 대궐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군복으로 변장한 오원은 지금까지 드나들었던 출구를 피해 대궐 뒷문으로 다 가갔다. 수문군 둘이서 오원을 보자 대뜸 허리부터 굽히는 것이었다. 오원은 그 제서야 자신이 입고 있는 군복이 상급자의 것임을 깨달았다. "문 열라우. 대감 심부름 가는 기야." "...어느 대감입니까?" "네놈들은 몰라도 돼야. 날래 문이나 열라우" 군졸 둘이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오원이 화급한 일인 것처럼 채근을 하자 지 체 없이 문을 열었다. 꽁지가 빠지게 달아난 오원이 이번에는 애향의 기방으로 가지 않고 전혀 낯선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머슴의 옷가지부터 빌려 군복을 벗 어 버렸다. 그리고는 역시 술을 항아리로 시켜 마셔 대기 시작했다. 연사흘을 머물러 밤낮으로 마셨다. 술에 대취하여 대궐 일은 새까맣게 잊 고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여기에 머무르게 되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였다. 한편, 대궐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오원이 군복으로 변장을 하고 궁궐을 빠져나 갔으니 당연하였다. 형조에서 포도청에 훈령을 내려 오원은 당장 잡아들이라 하였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고종임금도 크게 노하여 도제조와 각 수문장들 한테까지 책임을 물어 직위를 박탈하였다. 사태를 전혀 모르고 있는 오원은 그 이튿날에도 눈을 뜨자마자 어김없이 술을 마셨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날 즈음에 갑자기 와장창 문 부서지는 소리가 들 리면서 밖이 매우 소란스러웠다. 그러건나 말거나 오원은 술동이를 두드려 장단 맞춰 가며 노래를 흥얼 거리고 있었다. 이때 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포 졸 서너 명이 들이닥쳤다. "당신이 장승업이오?" "기래. 내래 장승업이야. 대체 무슨 일이네?" 그들은 대꾸도 않고 대뜸 오라부터 풀더니 오원을 사정하여 묶는 것이었 다. 그러자 오원이 몸부림을 치며 까닭을 대라고 고함을 쳤다. "까닭은 포도청에 가서 들으시오." "내래 뭔 죄를 지었네?" "몰래 대궐을 탈출한 죄, 군복을 훔친 죄를 정녕 모른단 말이오?" "...기건 맞아." 오원은 그 자리에서 압송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오원도 임금을 속인 죄 가 어떠하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 술이 깨면서 차츰 겁이 나기 시작해ㅆ. 형 틀에 매여 주리를 틀거나, 주상의 진노가 풀리지 않았다면 목 하나쯤 자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이르자, 아예 체념을 해 버렸다. 이래 죽으나 저 래 죽으나 어차피 뜬구름 같은 인생,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죽이면 죽 기로 체념하고부터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기래. 이 기회에 차라리 죽고 말디.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뜻밖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그 가 바로 민영환이었다. 오원이 비록 '기군망상죄'는 지었을망정 조선의 천재화 가가 대궐을 탈출하여 술 좀 마셨기로서니 그의 목이 베어지도록 관망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오원에 대한 고종의 노기가 풀리지 않아 아작은 감히 진언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어느 날 민영환은 고종을 단독으로 알현하는 자리를 갖 게 되었다. 그는 주상의 안색을 살피며 진언할 기회만 엿보았다. 이때 마침 고종 이 오원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먼저 물었다. "아직 포도청에다 감금하고 있사옵니다." "괘씸한 것, 어병을 지시한 것이 언젠데, 감히 대궐을 빠져 나가 술을 마시다 니... 게다가 군복까지 훔쳐 변장을 해?" "이번 일로 주상전하께서 심기 불편해 하심은 지당하옵니다." "허면, 형조판서는 저놈을 어떻게 할 셈인가?" "기군망상한 죄, 처형함이 마땅하옵니다. 그러나 전하." "...무엇인고?" "오원이 방약무인하고 주벽이 심하여 동정할 여지는 없사오나, 다만ㄴ 천재적 인 재주가 아깝사옵니다." "허면, 형조판서의 생각은 무엇인고?"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주상전하께서 진노하심을 푸시고 오원을 신에게 맡겨 주심이 어떠하오신지요. 윤허하오시면, 신이 잘 다스려 어병을 완성토록 하겠사 옵니다." "그놈이 궁궐도 벗어나는 놈인데, 하물며 민가 한가운데 있는 경의 집을 벗어 나지 못할까? 어리석은 생각이야." "신이 경계를 철저히하여 다시는 도망하지 못하도록 하겠사옵니다. 전하, 너 그러이 윤허하옵소서," "경의 생각이 저엉 그렇다면 재주가 아까운 사람을 한 번의 실수로 굳이 죽일 필요는 없겠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민영환 덕분에 오원이 처형을 면하였다. 민영환은 오원이 감옥에서 나오자 마자 곧장 그의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하인으로 하여금 그에게 몸을 깨 끗이 하고 새 옷가지를 입히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안상도 마련토록 지시 하고는 오원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한참 만에 오워니 들어왔다. 그는 들어서자마자 크게 예의를 갖추고,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그래, 감옥에 갇힌 기분이 어떠하셨소이까?" "죽을 죄를 지은 놈이래 무슨 할 말이 있갔습네까. 버러지 같은 존재, 차라리 죽기를 희망했시오. 그럼에도 저를 구해 주신 은혜, 백골난망입네다." "내 오원을 구해 드린 것은 어병을 조속히 완성토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를주 상전하께 약조하였으니만큼 나를 봐서도 앞으로 경거망동을 삼가는 것이 좋을 듯싶소이다." "여부가 있갔습네까." "오원이 술 없이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 하시니, 넉넉하게 드릴 수 없으나 웬 만한 양은 드릴 것입니다. 그 대신 어병을 속히 완성해 주시오. 그래야 주상전하 께서도 크게 기뻐하시고 오원은 용서하실 겁니다." "명심하갔습네다. 옆에 술만 있으면, 그림은 저절로 그려질 겁네다." 민영환은 오원은 너무 호언한다 싶어 왠지 미덥지 않은 구석이 있어 다소 불 안하기도 하였다. 그는 우선 오원이 올 때 입고 있었던 옷가지들을 깊숙히 감 쳐 놓고, 그가 거처하는 별당 출입구도 아예 자물쇠로 잠가 버렸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는 오원은 주인의 융숭한 대접에 마음이 흡족하여 어 떠한 불만도 품지 않았다. 끼니마다 음식도 다양했다. 오원의 입맛에는 궁중 음 식보다 양반댁 음식이 더 맞았다. 탕평채가 있는가 하면, 알젓찌개도 있고, 애 탕국도 올려졌다. 안주로는 자반굴비구이, 더덕무침, 암치지짐이, 미나리강회, 어 만두 드이 때마다 바뀌어 들어왔다. 이 같은 주인의 세심한 배려와 훌륭항 주 효는 오원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붓을 들게 하였다. 따라서 그림에 진척도 빨 라졌다. 이곳에 와서 그새 두점이나 그렸다. 오원 자신도 매우 흐뭇해 하였다. 민영환도 진척이 있음을 보고 흡족해 하였다. 이제는 장승업의 주벽을 걱정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하루는 오워닝 정색을 하고 민영환에게 청을 넣었다. 단 하룻방만 휴가를 달라는 것이었다. "어디를 가시게요?" "특별히 갈 곳은 없고, 다만 민가에 나가 술 한 번 크게 마시고 싶어서 기럽네 다." "술이 부족해서 그러시오?" "아닙네다. 좋은 술과 안주래 분에 넘칠 정도입네다." "기런데요?" "기방 계집의 향기를 맡고 싶어서 기럽네다. 원래 술과 계집이 곁에 있어야 그 림이 잘 되는 버릇이 있시오." "허면, 어병 그림을 기방에 가서 그리겠다는 말씀이시오?" "기런 게 아닙네다. 단지 계집의 화장 냄새를 몸에 묻혀 개지고 올 것입네다. 기러면, 그림이 더 잘 될 것 같아서 기래요." "허허허, 여기를 빠져나갈 궁리를 하시는 것 같소이다." "아닙네다. 하룻밤만 허락하시면 어병이 완성될 때까지 다시는 나가지 않을 겁 네다. 약조하갔시오." "글쎄요...? 차차 생각은 해 보겠소만, 당장은 허락할 수가 없소이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서편으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데, 뜻밖에 오세창이 찾아왔다. 오원은 그를 보자 눈을 등잔만하게 벌리더니 이내 눈물을 글썽거리는 것이었다. 오세창은 그 모습이 민망하고 측은하였지만 슬그머니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위창이래 여겐 웬일이외까?" "오원 선생님이 뵙고 싶어서, 판서 대감께 청을 넣었습니다." 그러자 오원이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반갑구만요, 반갑구만요"를 연신 되풀이하였다. "옥고까지 치르셨다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셨겠습니다." "말도 말라요. 내래 하마터면 목이 잘리 뻔했디, 판서 대감이래 구해 주시디 않았으면, 위창을 영영 못 볼 뻔했디, 대감의 은혜가 백골난망이디요." "불행 중 다행이옵니다. 주상의 노기가 탱천하셨다 하니, 지금껏 살아 계심 은 천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래서, 대감의 분부를 어기지 않기로 마음을 굳게 먹고 있시오." "그리하셔야 도리인 줄로 아옵니다." 이때 퇴청한 민영환이 방으로 들어왔다. 오원은 그의 안색부터 살폈다. 과연 그가 외박을 허락할지 어떨지를 탐색하였다. "오늘 주상전하를 알현하는 자리에서 어병의 진척을 물으시길래, 오원께서 개 과천선하여 그림에 열중하고 있음을 말씀드렸소이다." "잘 하셨습네다. 그림은 잘 돼 가고 있습네다." "해서, 며칠 전 오원께서 청하신 외박을 오늘 하룻밤만 허락하기로 마음을 먹 었소이다. 다만, 오원 혼자만 내보낼 수가 없어, 여기 위창과 포졸 하나를 따 라붙일 터이나, 행여 다른 마음은 먹지 마시오." "여부가 있습네까. 약조하갔습네다." 금세 오원의 얼굴에 화색이 돌면서 입이 하마처럼 찢어졌다. 오세창은 그 의 천진난만한 심정이 오히려 안타까워 콧들이 시큰하였다. 그날 저녁, 오원은 오세창과 포졸 한 명을 대동하고 곧장 애향의 기방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는 길을 걸으면서도 헤벌쭉 벌린 입으로 긴난봉가를 흥얼거렸 다. 마침 초가을이라 쪽빛 하늘이 까마득하게 높아, 오원의 흡족한 마음을 부추 기는데 한몫을 하였다. "오원 선생님. 그리도 기쁘시옵니까?" "두말하면 잡소리디요." "어병을 하루빨리 완성하시는 것만이 마음 고생에서 벗어나는 길일 것 같습 니다." "기거이 뜻대로 안 되니까니, 이 법석 아니갔소." 애향의 기방에 당도하자 오원은 "이리 오너라."를 우렁차게 떠뜨렸다. 목소 리 주인을 알아본 애향이 이내 버선발로 뛰어나왔다. "나으리... 포도창에 갇히셨다는 소문이 자자한데, 어찌 된 영문이옵니까. 이 계 집이 애가 타서 죽을 뻔하였습니다." "하늘이래 무너져도 솟아날 구녕이 있다고 하지 않았네. 오늘 귀한 양반을 모 시고 왔으니까니, 주안상을 잘 차리라우." "술은 항아리째 들여놓아야 되겠지요?" "물론이디, 기러고 저 포졸한테도 한 상 차려 주라우." 오원은 마치 제 집인 양 오세창을 데리고 방으로 성큼 들어섰다. 오세창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오원의 모습에 넋을 빼앗겨 오원을 지키라는 본분을 까 맣게 잊고 있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오원은 기녀를 시켜 지필묵과 채색감을 가져오도록 일 렀다. 그것은 오세창으로 하여금 자신은 술과 계집이 있어야 그림이 잘 된다 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시키고자 함이었다. 오원은 기녀에게 먹을 갈도록 시키고, 자신은 연신 술을 마시며 깊은 사색 에 빠졌다. 소재를 생각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기녀가 먹 갈기를 마치자 오 원이 비단폭 하나를 꺼내 바닥에 꺼내 바닥에 펼쳐 놓았다. 이미 작정하고 나 선 것이 들림없었다. 오원은 화폭 왼쪽 중앙에서 상단까지를 정자가 있는 기맘절벽으로 채우고 하 단에는 거위 두 마리가 물에서 한가롭게 노니는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거사 와 사동 둘이서 바위에 걸터앉아 거위를 내려보는 구도를 택하였다. 오세창과 애향과 기녀들은 이리저리 휘고 뻗는 붓의 놀림과 오원의 진지한 표정을 번갈 아 지켜보면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기본 구도를 마치자 오원은 항아리를 채우도록 하였다. 거의 혼자서 한 단 지를 다 비우고도 술이 바닥에 얇게 까려 있자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는 오세 창에게 술 권하는 것도 잊고 석 잔을 연거푸 자작하였다. 채색을 마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세창은 그가 이토록 오랜 시간에 걸쳐 그림을 완성하는 모습은 전에 본 적이 없었다. 그리는 속도가 항상 빨랐던 평소의 오원을 생각하면 의아하게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그림에서는 그만큼 정성을 쏟았다고 할 수 있다. 오세창이 소재의 출처를 묻자, 왕희지의 관아고사라고 하였다. 중국 진나라 때 서예가 왕희지가 한 쌍의 거위 에서 시의를 얻었다는 고사를 뜻한다. "화제를 넣어야 되겠습니다." "기래야디요, 헌데, 이 그림은 계정 대감께 드릴 거니까니 그분이 화제를 넣 도록 하는 거이 어떻갔소?" "좋으신 생각이옵니다." "화제는 무엇이 좋갔소?" "글쎄올습니다.... 관아도라 하심이 어떠신지요?" "관아도라... 기거이 좋갔구만기래요." 그림을 마친 오원이 그때부터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미 자시가 넘 은 시간이라 오세창은 졸음이 쏟아져 오원과 더는 대작할 수가 없었다. 방문 앞을 지키고 있는 포졸도 아까부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오로지 오원만이 바 위처럼 버티고 앉아 있었다. 이튿날, 민영환은 오원이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오세창과 포졸이 따라붙기는 했어도 오원의 꾀가 하도 기상천외하여 밤새 마음 을 놓지 못했다. "외박한 기분이 어떠하십니까?" "아주 좋았시오. 기래서 대감을 위해 그림을 한 점 그렸디요." "나를 위해서요?" "기렇습네다." 오원이 득의만면하여 민영환 앞에 그림을 펼쳐 보였다. 그는 그림을 보자마 자 넋을 잃은 표정이 되어 경탄의 소리를 신음처럼 쏟아냈다. "이 노인이래 왕희지야요." "왕희지가 한쌍의 거위를 보고 시의를 얻었다는 고사를 화폭에 담으셨군요. 헌 데, 왜 화제가 없습니까?" "기건 대감의 몫으로 남겨 둔 겁네다." "내가 감히 화제를 넣다니요. 화격을 더럽힐까 두렵소이다." "기렇디 않습네다. 고사에 맞게 좋은 문장도 넣으시라요." "이런 광영이 또 있을까... 당장은 문장이 떠오르지 않으니 화제는 다음에 넣겠 소이다." 민영환은 그림 얻은 기쁨을 감추지 못해 그 자리에서 하인을 시켜 주안상을 들이도록 하였다. 오원의 입이 금세 벌어졌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열흘이 지나자 오원의 병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좋은 술과 좋은 안주는 부족함이 없으나, 문 밖 출입을 할 수 없는 것이 불만 이었다. 별채에 가둬 놓고 밖에서 자물쇠를 채웠으니, 감옥에 갇힌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자신이 꼭 짐승처럼 사육당하는 기분에 빠지자 육신 여기저기서 열이 뻗치고 사지가 뒤틀려 잠시도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운 것은 술이 아니라 바깥 세상이었다. 범부들 속에 섞여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발 닿는 대로 정처 없이 떠도는 인생살이가 그리웠다. 노숙도 마다 않는 오원으로서는 당연하였다. 내래 와 이렇게 살아야 하네? 이 건 장승업의 모습이 아니야. 오원은 숨을 씩씩대며 자물쇠가 채워진 별당 문을 발로 냅다 걷어찼다. 그 러자 문지기 하인이 놀라서 달려왔다. "나으리. 어인 일이시옵니까?" "잔말 말고 날래 문 열라우." "아니 되옵니다. 문을 열지 말라는 대감마님의 엄명이 계셨사옵니다요." "이놈으 아새끼래... 당장 열디 않으면, 문을 부셔 버리갔어." "나으리, 제발 고정하십시오. 이러시면 대감마님께서 진노하실 것 입니다.요." "대감인지 땡감인지 내래 알 바 아니야." "쇤네를 살려 주시는 셈 치고 고정하십시오." "정말 열디 못하갔다는 말이디?" "쇤네 목이 달아날지언정 대감마님 허락 없이는 못합니다요." "아새끼래 민하게 노누만. 기렇다면 하는 수 없디." 왠지 더는 떼를 쓰지 않았다. 하인은 안심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구심 이 들었다. 그 정도에서 순순히 물러선 것이 이상했다. 하인이 문 틈에 이마를 붙이고 오원의 행동을 엿보았다. 그가 방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을 똑똑히 확인하였다. 도리가 없어 그가 체념한 것이라고 여겨 하인이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오원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하인을 윽박질 러 봤자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다른 방법을 궁리하였다. 문지기를 일단 안심 시킨 다음 담을 넘어갈 생각이었다. 해가 있는 시각에 월담을 했다가는 행인 들이 도둑으로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다. 저녁이 되자 오원의 처소에 술과 밥상이 들어졌다. 오원은 그때까지도 분 도 삭이지 못하고 있었으나, 하인한테는 시치미를 뚝 떼고 밥상을 받았다. "나으리, 쇤네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보잘 것 없는 신분이라 쇤네 마음대 로 할 수가 없습니다요." "알았어, 네놈이래 무슨 죄가 있갔네." "고맙습니다요." "알았으니까니, 날래 가라우." 오원은 서둘러 하인을 내보내고 술병을 들어 벌컥벌컥 나발을 불었다. 분노 가 이글이글 타고 있는데다가 술이 들어가자 심장이 곧 터질 것 같았다. 어병이고 염병이고 내래 알게 뭐이가, 이제 다시는 돌아오디 않갔어. 오원은 술병을 홀랑 비우고는 문 툼으로 밖의 동정을 살폈다. 얼씬거리는 자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행장을 꾸렸다. 오원이 빠져나간 것을 뒤늦게 알게 된 민영환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망연자실 에 빠졌다. 오원이 비록 천하의 기인이기는 해도 담을 넘어서까지 망야도주하 리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없어진 첫날 밤에는 설마 돌아오 겠지 하고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 사흘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제서야 오원이 작심하고 달아났음을 깨달았다. 노기탱천한 민영환은 포졸 3백 명을 풀어 장안 곳곳을 샅샅이 뒤지도록 엄명 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장승업을 잡아오는 포졸한테는 후히 포상하겠다고 공 언하였다. 민영환은 이러한 사실이 고종 귀에 들어갈 것을 제일 우려하였다. 오원이 대궐을 빠져나갔을 때 그를 엄벌에 처하라고 할 만큼 진노했던 고종의 얼굴을 떠올리면 간장이 토막토막 끊어지는 것 같았다. 오원을 집에 데려온 것부터 후회하였다. 열흘이 지나도 오원을 찾았다는 전갈은 오지 않았다. 민영환은 그가 한양 을 벗어난 것으로 단정하고 전국에 수배령을 내릴 참에 마침 오세창이 찾아왔 다. "위창, 오원을 찾아 낼 묘안이 없소? 주상 전하 뵐 낯이 없어요." "저도 오원이 갈 만한 곳은 모두 수소문했사옵니다." "내가 그토록 당부를 했건만,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야속하기 그지 없 소이다. 주상전하의 노기를 풀어 죽을 목숨을 구해 줬는데..." "원체 매어 있기를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그렇습니다." "그 자가 한양을 벗어난 것 같아 전국에 수배령을 내릴 생각이오..." "대감의 고충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사옵니다. 하오나..." "위창한테 다른 생각이 있소이까." "수배령을 내려 찾아 낼 경우 오원한테 가혹한 형벌이 내려질 것이옵니다. 엄 벌을 받아 마땅한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오나, 조선 화단에 큰 별을 잃는 안 타까움도 작지는 않사옵니다." "그래서요?" "저의 좁은 생각에, 전국의 수배령만큼은 멈추심이 옳을 듯싶습니다만..." "허면, 포기하라는 말씀이시오?" "포기한다기보다는 제 갈 길을 가도록 놓아 주시면 오원한테는 백골난망일 것이옵니다." "오원의 인품으로는 그러한 은혜조차 깨닫지 못할 사람이오." "본인은 깨닫지 못해도, 후세에 대감의 은덕을 높이 기릴 것이옵니다." "참으로 답답하구료. 내 한 몸의 덕을 남기기 위해 지엄하신 주상전하의 명을 거역하라는 말씀이시오?" "대감의 고충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허나 오원을 가엾게 여기시면 대감의 마음 이 다소 가벼울 것이옵니다." "주상전하께는 뭐라 말씀드리구요? 주상의 진노로 내 안위가 위태할 것이 염 려돼서 이러는 것이 아니오. 신하 된 도리로 주상의 심기를 불편케 해서는 아 니 된다는 충정 때문입니다." "하오나, 이번 일로 오원의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다면, 그 또한 안타까운 노 릇 아니옵니까?" "허면, 위창은 오원의 안위만 걱정되고 주상전하의 심기는 물론 나 같은 사람 은 마음에도 없다는 말씀이시오?" "제가 어찌 그러한 마음을 품었겠습니까?" "오원의 재주는 가상하나, 우선 사람의 도리부터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제 재 주만 믿고 방자하기가 이를 데 없으니 더는 재고할 가치가 없는 줄 아오. 주 상의 엄명을 거역한 죄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같이 방자함은 곧 주상전하를 능멸한 것이나 다름이 없소이다. 내 오원을 아끼는 위창의 마 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이번 일만큼은 그냥 넘길 수가 없습니다. 허니 위창도 주상에 대한 내 충정을 이해하기 바라오." 민영환이 끝네 굽히지 않고 전국에 수배령을 내리게 되었고, 오원은 결국 전 국 어디서나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18 미욱이 깨똥이와 함께 장거리를 들고 저자를 빠져나오는데 남정네들 열댓 명 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미욱이와 개똥이도 그 모양들 이 궁금하여 그들 틈에 함께 머리를 디밀었다. 벽에 웬 사내 얼굴이 그려진 방이 하나 붙어 있었다. 그를 보는 즉시 관가에 알리라는 내용이었다. 흔히 있는 일이어서 미욱이 무심히 돌아서려는데, 개똥이가 고갯짓을 하며 미욱의 소매를 잡아 끄는 것이었다. "왜 그러냐?" "아무래도 낯이 익습니다요." "낯이 익다니, 대체 누구를 두고 하는 말이냐?" "방에 들어 있는 얼굴 말입니다. 아저씨도 자세히 살펴보십시오." "보나마나 못된 짓을 한 불상놈 중에 하나겠지." 미욱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표정으로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러자 개똥이가 바싹 따라붙어 미욱의 손목을 거칠게 낚아챘다. "이눔아, 갈 길이 바뻐, 저런 방을 어디 한두 번 보느냐?" "아무래도 우리 나으리 얼굴입니다요." "우리 나으리라니? 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화가 나으리지요." "예끼 이눔아, 그분이 저런 데 나붙을 분이시냐. 법이 없어도 사실 분이시다. 허튼 소리 작작 하거라." "아닙니다. 제 눈으로는 틀림없이 그렇게 보입니다요. 그러니 아저씨가 한 번 더 보세요." 개똥이가 끝내 손을 놓아 주지 않아 미욱이 마지못해 무리속에 다시 머리를 밀어 넣었다. 개똥이 말을 듣고 보니 과연 장승업의 얼굴이었다. 거의 봉두난발 아래로, 술에 찌든 모습을 그린답시고 코 끝에 점 대여섯 개 찍은 딸기코에다. 밤가시처럼 듬성듬성 돋은 수염으로 보아 영락없는 장승업이었다. 미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리에서 빠져나오자 개똥이가 뒤뚱발이로 다가와 주인의 얼굴을 핥듯이 들여다 보았다. "제가 바로 보았지요?" "그런 것 같기는 하다만, 그분이 왜 저 지경이 되셨단 말이냐?" "나으리 죄목이 무엇입니까요?" "죄목은 없고 그저 잡아들인다는 내용뿐이여. 이거야 원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구나. 사람을 해칠 분은 아니시고..." "혹시, 옛날처럼 대궐에서 도망치신 것 아닙니까요?" "그때는 경복궁 중건이 있어서 대궐에 들어가셨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지 않느냐." "그래도 모르는 일입니다요. 혹시 지체가 하늘같이 높으신 어느 대감의 분부를 어기셨는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글쎄다... 그 대감이 누군지는 모르나 크게 노했을 것이 분명한데. 그 죄가 어디 예삿일이냐. 다리가 떨려 도무지 걸을 수가 없구나." 미욱이 무릎을 바들바들 떨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개똥이 도 지게를 내려 놓고 주인과 마주 앉았다. "나으리께서 안전하게 숨어 계시기나 했으면 좋겠습니다요. 잡히는 날이면 당 장 목이 달아날 판인데..." "이 일은 어쩌면 좋단 말이냐. 네 짐작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란다만, 정녕 사 실이라면 나으리 목숨이 위태한 지경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자 개똥이가 끄억끄억 울음을 짜내며 소매로 눈물을 닦아 냈다. 미욱 이 그 꼴을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며 냅다 핀잔을 퍼부었다. "이눔아. 방정맞게 왜 눈물은 짜고 그려? 나으리가 돌아가시기라도 했단 말이 냐? 이런 때일수록 좋은 방도를 찾아 내야지." "저 같은 놈한테 무슨 방도가 있겠습니까?" "허긴... 대체 어디에 계실꼬, 끼니나 거르지 않으실는지 걱정이구나." "그러게 말입니다요. 그리 좋아하시는 약주는 또 어쩌하고요." "대체, 무슨 연유로 저리 되셨는지 알 수가 없으니..." "어쨌든 죄를 크게 쓰신 것이 틀림없습니다요. 그렇지 않구서는..." "불쌍한 양반. 어디서 밤 이슬이나 맞지 않으시는지..." "안전하게 숨어 계시기나 했으면 좋겠습니다요." "내 마음도 그렇구나." 미욱은 미욱이대로 개똥이는 개똥이대로, 저마다 과거 오원과의 인연을 되 새기며 그리움과 안타까움에 빠져 눈물을 하염없이 쏟아냈다. 오원이 자신들 한테는 살아갈 방도를 아낌없이 마련해 주면서도 정작 자신은 말년을 동가식서 가숙하며 정처 없이 떠도는데다가, 이제는 관가에 쫓기는 몸이 되었으니 미 욱이나 개똥이로서는 가슴이 찢어질 일이었다. 제발, 옥체 보전하십시오. 산사의 아침을 둘러싸고 있는 만물은 온통 찬란하게 빛나는것뿐이었다. 이 슬을 머금고 있는 갖가지 나뭇잎과 온갖 풀들과 심지어 바위까지, 맑은 햇살을 받아 영롱한 빛으로 눈부시게 뒤덮여 있었다. 오원은 뜰을 거닐면서 멀리 산등성에도 시선을 던졌다가 온갖 새들이 지저귀 는 숲으로 눈길을 돌리기도 하고, 혹은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을 올려보기 도 하였다. 만감이 교차하여 한숨을 내쉬는 중에도 자신도 모르게 올라산 손 이 민머리를 쓸면서 자주 실소를 터뜨렸다. 이때 주지가 저만치서 이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허허, 입성만 갖추면 영락없는 중이로고." "편히 주무셨습네까. 스님." 오원이 잘못을 들킨 사람처러 얼굴을 붉히며 주지에게 서둘러 예를 갖추었 다. 주지는 오원을 따라 멀리 산줄기에 눈길을 주면서 "나무관세음보살..."을 중 얼거렸다. "그래. 절에서 지내는 느낌이 어떠신가." "마음이래 아주 편안합네다." "아암, 그래야지. 하루빨리 마음을 비우시게. 그래댜 도를 깨달아, 그림에도 도가 있는 법." "내래 어드렇게 도를 깨치갔습네까. 가당치 않습네다. 이자부터는 그림도 그 리디 않갔시오. 그 동안 환쟁이랍시고 방약무인하게 굴어 사람 구실을 못했습네 다. 심히 부끄러운 일이야요." "그림을 아니 그리겠다면, 여기를 떠나 무엇을 할 셈인고?" "금강산에서 지낼까 합네다. 기러다가 절경에 묻혀 죽을 생각이야요." "허긴, 그리하는 것도 괜찮은 생각이지, 나무관세음보살..." 그날, 민영환 집에서 도망친 오원은 곧장 애향의 기방으로 갔다. 숨어 있을 생 각으로 간 것이 아니라 옷을 얻어 변장을 할 셈이었다. 전후 사정을 듣고 난 애향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몸을 사시나무 떨 듯 하였다. "변복만으로는 아니 될 것이옵니다." "기럼 어카갔네. 달리 방법이래 없디 않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민 대감께서 크게 노하셨을 것이 분명하고, 포졸 을 풀어 나으리를 찾을 것이옵니다. 어디 그뿐이옵니까. 곳곳에 방을 붙이는 것 도 뻔한 일이옵니다." "기렇갔다, 허디만, 달리 방법이래 없디 않네." 그러자 애향이 거푸 한숨을 내쉬며 무엇인가 생각에 골똘하였다. 좋은 방도 를 궁리하는 표정이 역력하였다. 오원도 나름대로 생각을 이리저리 굴려 보았지만, 당장은 뾰족한 수가 떠오 르지 않았다. 답답할수록 술 생각만 간절하였다. "이보라우. 술이나 개져오라우.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한 번 죽기는 마찬가 진데 술이라도 실컷 마시다가 죽갔어." "참으로 태평하시옵니다. 저는 가슴이 떨려 수밍 곧 끊어질 지경이온데 어찌 술을 말씀하시옵니까. 저의 짧은 소견으로는..." "좋은 방법이래 생각났네?" "나으리, 제가 십수년 동안 불공을 드려 온 절이 하나 있사옵니다." "기래서?" "주지스님께 전후 사정을 말씀드리고 방도를 여쭙는 것이 어떨는지요." "산 속에만 묻혀 사는 중한테 무슨 방도래 있갔네. 있어 봤자 머리 깍고 중이 나 되라는 소리밖에 더 하갔네."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옵니다. 그 스님이 워낙 생각이 깊으신 분이라 좋은 방도를 마련해 주실지 모르는 일이옵니다." "글세...?" 애향의 채근에 못이겨 오원이 결국 따라나선 곳이 여기 삼각산아래 조그마한 절이었다. 애향이 주지에게 넌지시 다가가 찾아온 연유를 소상히 고하자, 오원이 예상한 대로 머리 깎고 중이 되라는 말부터 대뜸 내놓는 것이었다. 오원에게 원래 품은 생각이 있어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하자 주지 또한 난색을 보였다. "중이 되기 싫으면, 절에는 왜 찾아왔누?" "중이래 되는 거 말구 달리 좋은 방도래 있을까 해서 왔시오." "쫓기는 주제데 중 되는 것이 뭐 그리 대수란 말인가, 목이 달아나지 않는 것 만도 부처님 은덕으로 알아야지." "기럼, 머리만 깎아 주시라요." "머리만 깎으면?" "스님이래 입으신 승복도 한 벌 주시라요. 중 꼴로 나서면 포졸이래 감쪽같이 속을 기야요." "예끼 이 사람, 부처님 팔아 중 행세를 하겠다는 말이로고." "기런 게 아닙네다. 거저 변복만 할 뿐이야요. 중 노릇은 하지 않갔시오." 주지가 승낙할 뜻을 선뜻 보이지 않아 애향이 시주를 많이 하기로 하고 애원 을 하자 주지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떡였다. 이튿날, 애향이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는 가운데 손수 삭도를 잡은 주지가 오원의 머리를 사정없이 밀어 버렸다. 영락없이 중이었다. "엎어진 김에 쉬어 가겠다고, 머리 깎은 김에 중으로 눌러앉는 것도 괜찮을 터 인데... 나무관세음보살." "중생의 목숨을 구한다고 생각하시라요." "중의 꼴을하여 목숨을 부지했다면, 부처님의 은덕임을 잊지 마시게." "물론입네다." "나무관세음보살..." 주지한테 누덕누덕 기운 승복을 얻어 걸치고 삿갓을 깊게 눌러 쓴 모습으 로 변장한 오원이 바랑까지 짊어지니 누가 봐도 중으로 알아볼 차림이었다. 그를 방에 나붙은 오원 장승업으로 의심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원은 장안 중심가를 피해 우회하여 한양을 빠져나갈 생각이었으나, 갑자 기 장난기가 발동하여 선뜻 저잣거리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변장한 자신의 모 습을 눈여겨볼 것인지 어떤지를 시험하고 싶었다. 특히 그 동안 인연을 맺었 던 자들 중에 자신을 어떻게 볼까 그것이 제일 궁금하였다. 물론 이쪽에서 먼 저 아는 체를 하는 식의 경망함은 드러내지 않겠지만, 무심코 지나치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니 여건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았다. 먼저 미욱이와 개똥이로부터 시험하기로 하고 그의 국밥집을 향해 중의 거동 을 흉냐냐어 걸어갔다. 대여섯 걸음을 남겨 두고 주심조심 다가서는데 마침 개똥이가 구정물 통을 들고 뒤뚱발이로 나왔다. 오원은 삿갓을 더욱 깊이 내 려쓰고 그의 앞을 유유히 지나갔다. 그러나 개똥이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갑자기 그에게 괘씸한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 웃음이 나와 자칫 웃음을 터뜨릴 뻔하였다. 아새끼래, 민하게 굴기는 여전하구만기래. 오원은 돌아서서 개똥이 엉덩이를 냅다 걷어차고 싶은 욕구가 발동했으나 간 신히 참았다. 삼년 거른 노망태기 부싯깃에 태운다고, 개똥이가 눈치 없이 구는 바람에 산통 깰까 싶어 그만두었다. 그러나 이대로 영영 보지 못할 것을 생각 하니 가슴이 아팠다. 또한 미욱이가 있지 않은가, 더구나 자신의 얼굴이 방에 나 붙은 지금, 얼마나 궁금해 하고 걱정할까 생각하니 차마 발걸으밍 떨어지지 않았다. 기래, 작별은 해야디. 오원은 국밥집 뒷문으로 통하는 길로 돌아 바랑에서 목탁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사정없이 두들겨 댔다. 잠시후 미욱이 무슨 소린가 한참을 군시렁대며 다가섰다. "어째, 앞문을 놔 두고 뒷문에서 시주를 내라 하시오?" "앞이나 뒤나 문이래 다 한가지디요. 나무관세음보살." "그렇기는 하지만..." 말끝을 흐리던 미욱이 갑자기 허리를 구부려 삿갓 속으로 얼굴을 불쑥 디미는 것이었다. 그리고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보기는 뭘 보우. 시주나 하시구래." "가만 있자. 혹시 승업 형님..." 결국 들키고 말았다 .오원이 재빨이 식자를 들어 미욱의 입을 막았다. 그러자 미욱이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내래 쫓기는 몸이라, 작별하러 왔어야." "세상에... 겁도 없으슈. 지금이 어느 때라고... 사람들 눈이 있으니, 어여 뒷 방으로 드십시다요. 세상에, 세상에..." 미욱이 날렵한 몸놀림으로 주위를 살피더니 오원을 방으로 끌어 들였다. 그 리곤 문고리를 단단히 걸었다. "대체, 어찌 된 영문이우. 형님을 잡겠다고 방이 천지에 나붙었으니." 미욱이 눈물일 찐득찐득 짜내며 코를 훌쩍거렸다. 오원이 그의 손을 끌어 잡 아 걱정하지 말라고 연해 타일렀다. "기걸 어드렇게 다 설명하갔네. 어쨌든, 잘 있으라우. 온 김에 개똥이도 보고 떠났으면 좋갔구만기래." "국밥부터 말아 올까요? 술도 드셔야하고." "지체할 수가 없어야. 술은 호리병에다 담아 오라우. 쓸 데가 있으니까니. 기러 고 개똥이한테 살짝 귀띰하라우." 미욱이 다리를 ㄹ후들후들 떨며 방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신 끄는 소리가 들 리더니 문이 스르르 열렸다. 개똥이었다. 그가 눈물부터 주르르 쏟았다. "나으리..." 그가 인사 반 놀라움 반으로 엎드려 어깨를 들썩거렸다. 오원이 그의 등을 쓸 며 조용히 하라고 일렀다. "나으리... 걱정이 돼서, 숨이 끊어지는 줄 알았습니다요." "기래기래, 네 마음 다 알아, 다시는 보디 못할 테니 까니 몸 성히 잘 있으라 우." "나으리 스님이 되셨습니까요?" "기렇디 않아, 잠시 변복을 했어." "어디로 가십니까요." "당장은 정처래 없으니까니, 더 묻디 말라우." "그럼 쇤네도 나으리를 따라가겠습니다요." "아새끼래 말하는 것 좀 ㅂ라우, 네놈이 따라붙으면 내래 잡혀, 알갔네?" "나으리를 이렇게는 보내 드릴 수가 없습니다요." "기럼 나를 죽이갔네? 민하게 굴긴..." 이때 문이 다시 열리며 미욱이 호리병 두 개와 안주감이지 싶은 보퉁이를 안 고 들어섰다. 오원이 서둘러 바랑을 열어 그것들을 안에 넣도록 하였다. "대체 어디로 가시우?" "묻디 말아우. 무소식이 희소식이니까니, 걱정하디 말고 잘들 있으라우." 그러자 미욱이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엎드려 하직인사를 차렸다. 개똥이도 따 라서 넙죽 엎드렸다. 그러는 두 사람의 등짝이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이만 가갔어. 오래오래 살라우." "형님 이럴수는 없습니다." "나으리..." 오원도 결국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과 맺은 인연이 모두 두 터운 정으로 시작되어 오랜 세월 이어지고 있는 중이라 동기간이나 다름이 없었 다. 오원인들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오원은 동대문 밖으로 방향을 잡는 도중 저만치 변 주부 약전 터가 눈길에 잡 히자 가슴이 서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변 주부도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 지하에 묻혔음을 새삼 깨달으며 콧들이 저렸다. 예전의 약전은 주인을 잃자 곧 닫히고, 지금은 생판 낯선 사람이 살고 있는 중이었다. 주부 나으리, 이 장승업이래 한양을 떠납네다. 극락에서 편히 계시라요. 오원은 과거 그와의 인연을 또렷이 떠올리며.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었던 변 주부의 도타운 인품을 새삼 마음에 그리며 한참 눈시울을 적셨다. 자신의 인생 에 일등공신으로 치자면 당연히 이용후지만, 변 주부 또한 그와 선후를 가릴 수 없을만큼 중요한 인물이었따. 그의 자상한 배려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오원 장승 업이 존재할 수 없음은 하늘과 땅이 아는 사실이다. 주부 어른께 인사도 드리디 못하고 떠납네다. 용서하시라요. 마음 같아서는 그의 무덤을 찾고 싶지만 그가 묻힌 선산이 멀리 충청도 땅이 라, 찾아볼 처지가 못 되는 자신이 그저 원망스럽기만 하였다. 오원이 동대문 저자를 살짝 비켜 가는데 저만치서 사람들이 떼를 지어 웅성웅 성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보나마나 자신의 얼굴이 들어간 방을 보고 있 는 것이 틀림없다고 단정하였다. 미욱 의 국밥집 골목을 빠져나을 때도 똑같은 상황을 목격했었다. 그때 오원도 몹시 궁금하였으 나 감히 다가설 용기가 없어 서둘러 그곳 을 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번씩이나 그 모양을 보고 있자니 방의 내용이 궁금하여 차마 외면할 수가 없었다. 장승업 쌍판을 어드렇게 그렸는지, 한번 봐야 되갔어. 오원은 삿갓을 고쳐 쓰고 살그머니 다가가 사람들 꽁무니에 붙 어 섰다. 틈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얼굴 형상이 참으로 가관이었 다. 형상 옆에 한문과 언문을 섞어 쓴 문장이 있 으나 그 내용은 해 독할 수가 없고, 오원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는 것은 오직 형상이었 다. 쑥대강 이 머리에 짙은 눈썹만으로도 영락없는 산도적이고, 딸기 코 밑으로 밤가시처럼 듬성듬성 그려 넣은 수염으로는 가산굴 거지 꼴이었다. 대체, 어떤 놈이래 그린 거이가. 천하의 장승업을 저렇게 밖에는 그리디 못한다는 기야? 저래 가지구서야 어드렇게 나를 잡겠다는 기야. 한심하구만. 오원 의 심정으로는 당장 삿갓을 벗어 버리고 박장대소하며 조소 를 터뜨리고 싶었다. 틀림없이 자신 을 잘 아는 화원의 솜씨련만 오 원이 보기에는 아무래도 제대로 그린 것이 아니었다. 어쩌면 오 원 을 아끼는 화원 중에 하나가 일부러 그 꼴로 만들어 장승업이 잡히 지 않기를 바란 심중인지 도 모를 일이었다. 머리를 괜히 깎았구만기래 아무려나, 어차피 한양을 떠나 곧 일만이천봉의 풍 악산(가을의 금강산 별명)에 묻힐 몸이 머리쯤 깎였다고 안타까워할 것이 아니다 싶어 혼자 웃고 말았다. 동대문 밖 이용후의 옛집으로 들어서는 지봉길 길목이 눈앞으로 다가서자 오원의 콧등이 벌써 시큰하게 저려 왔다. 이용후가 이 한 적한 길을 수도 없이 다녔을 지난날을 떠올리자, 길 여기저 기에 빙 의 족적이 박혀 있는 것처럼 잠시 착각이 들어 오원은 손바닥으로 노면을 연해 쓸어 보 기도 하였다. 오원은 이용후가 묻힌 그의 선산으로 방향을 돌려 그가 살던 초옥을 향해 몸을 틀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아 폐가로 남아 있는 그의 옛집이 저만치 보였다. 그의 생전에도 곧 쓰러질 것처 럼 위태롭게 눌러앉은 기역 자세 칸 방 집이 이제는 한쪽이 폭삭 꺼져 있어 흉측하기 짝이 없 었 다.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해 허리에 찼고,그 사이로 나그네한테 놀 란 쥐들과 들고양이가 이리저 리 달아나 몸을 숨기기에 바빴다. 이용후의 아들 경은 기특하게도 과거에 붙어 지금은 예문관에 종6품의 벼슬로 있고,딸 원은 재산가 중인집으로 출가하여 잘 살고 있다는 후문을 들은 바 있어 오원의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하였다. 오원은 마당 한가운데 망연히 서서 그들과의 지난날들을 그 리움 으로 되새기면서, 세월의 무상함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원이 아씨. 경이 서방님. 부디 오래오래 다복하게 사시라요. 이 장 승업이래 다시는 볼 수 없을 겁네다. 나무도 병이 드니 정자라도 쉴 이 없다 호화이 서신 제는 올 이 갈 이 다 쉬더니 잎 지고 가지 꺾인 후는 새도 아니 앉는다 오원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용후 내외의 무덤 앞에 다다르자 어느덧 해가 중천에서 서너 뺍 은 기울어 가고 있었다. 잠시 무덤 주부를 둘러보는 동안 봉분이 깔끔하게 손질돼 있음을 알았다. 아 들 경이 아니면 문중에서 누군가 다녀갔음을 알 수 있었다. 오원은 바랑을 열어 미욱이 챙겨 준 술병과 안주를 꺼내 상석 위 에 올려놓고 배례하였다. 나으리. 승업이래 왔습네다. 오원은 봉 분 주위에 술을 두어 모금 뿌리고 나서 자신도 병째로 음복을 하였다. 이때,갑자기 이용후의 목소 리가 바람에 실려 허공으로부터 가까 이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오원은 소스라치게 놀라 자신의 귀를 의심하였다. '나으리... 분명, 나으리십네까?' '승업아...' 이용후의 음성이 분명했다. 오원은 정신을 수습하여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목을 이리저리 비 틀었다. 그러나 이용후의 모습은 어디 에도 없었다. '나으리... 어디 계십네까?" '승업아.나는 네 곁에 있느니라.' 분명 천상에서 내려오는 소리였다. '나으리.제발 모습 좀 보여 주시라요 한 번만 보여 주시라요.' 오원은 재빨리 바닥에 이마를 붙이고 거듭 애소하였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끝내 나타나지 않 았다. '승업아.이제 가면 언제 오려느냐.' ,다시는 뵙지 못합네다.나으리 계신 저 세상에 가서 뵙갔 시오' 오원은 그의 목소리가 자신의 마음에서 흘러나온 소리임을 깨닫고 비로소 통곡하기 시작했다. 나으리. 이 배은망덕한 놈을 용서하시라요 나으리 말씀대로 살디 못하고, 다시 뜨내기 신세로 돌 아갑네다. '승업아.인생은 뜬구름과 같다고 했느니라.' '나으리.부디 극락에 계시라요 내래 가기 전에 나으리래 좋아하 시는 긴난봉가와 병신난봉가를 불러 드리갔습네다." 정방산성 초목이 무성한데 밤에나 울 닭이 대낮에 운다 에~에헤에 에헤요 어림마 둥둥 내 사랑아 슬슬 동풍에 궂은비 오고 시화나 연풍에 임 섞여 노자 에~에혜에 에헤요 어림마 둥둥 내 사랑아 사면십리 늘어진 능파 속에 님 찾아갈 길이 망연이로다 에~에헤에 에헤요 어림마 둥둥 내 사랑아 병신의 종자가 또 따로 있나 한 다리 한 팔 못 쓰면 병신이지 에~에혜여 어거야 어야어야 디야 네가 내 사랑아 능라도 수양버들 휘이휘이 잡고서 가지나 말라고 생야단만 친다 에~에헤여 어거야 어야어야 디야 네가 내 사랑아 십오야 큰 달아 말 물어 보자 우리 님 계신 곳 비추어나 주렴 에~에헤여 어거야 어야어야 디야 네가 내 사랑아 오원은 병을 들어 술과 눈물을 섞어 마시며 끄억끄억 울음과 가 락을 함께 쏟아 놓았다. 이 나 무 저 나무를 어지럽게 오가며 지저 귀던 새들도, 오도방정을 떨며 재잘거리던 다람쥐들도, 심지 어 바람 에 나풀대던 나믓잎들까지도 오원의 끝없는 오열에 숨을 죽여 지 켜보고 있었다. 나으리. 안녕히 계시라요 오면 가려 하고 가면 아니 오네 오너라 가노라니 볼 날이 전혀 없네 오늘도 가노라 하니 그를 슬허하노라 오원은 아침 일찍 일어나 행장을 꾸렸다. 황해도 안악 고향에 와 서 보름을 머무는 동안, 장마 에 씻겨 내려간 부모 산소 자리에 어 설프게나마 봉분을 새로 만들어 놓았다. 주막을 나서면서 술과 북어 한 마리를 챙겼다. 그러자 주모가 서 운한 기색을 얼굴에 바르며 물었다. '오늘 떠나십 네까?' '어차피 갈 사람은 가야디요.' '기런데,술과 북어는 와 개져갑네까?' '아바지 오마니 무덤을 새로 만들었으니까니 봉분제 봉분(무덤을 만든 뒤에 지내는 제사)는 지 내야디요.' '기렇구만요 기럼 고향에 다시 안 오십네까?' '오디 못할 기야요 나이를 이만큼 먹었으니까니, 언제 죽을디 모르디 않습네까. ' 어디메로 가 십네까?' '금강산으로 들어갈 생각이야요.' '곧 가을이라 춥갔시오" '추워도 할 수 없디요 뜨내기 인생이 별수 있갔시요 천지의 이 치는 누구도 막을 수 없으니까 니. '허긴,기렇디요... 어쨌든 몸조심하시라요' '그동안 고마왔시요 주모도 잘 계시라요' 오원은 주모와 작별하고 서둘러 무덤으로 올라갔다. 여름 막바지라 허리까지 오른 수풀이 걸음 을 더디게 하였다. 봉분에 떼를 입히 지 못하고 그냥 풀만 떠 올린 것이 마음에 걸렸으나 당장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무덤에 술을 뿌리고 배례를 올렸다. 아바지. 오마니. 안녕히 계시라요 승업이래 이자 떠나면 다시 못 옵네다.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이 볼을 타고 입 끝으로 끊임없이 모 여들었다. 목이 메어 혀에 오른 말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아바지, 오마니.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 시라요 무릎을 끓은 채 오열하는 오원의 머리 위로 새들이 시끄럽게 짖 어 대는 가운데, 불효를 안타까워하는 그의 마음 저변에는 지나온 생애가 강물처럼 흘렀다. 아버지는 그의 나이 여섯 살 때 여의어 모습이 가물가물하고, 어머니는 아흡 살 때 세상을 떴으나 밑구멍 이 빠지게 가난한 집에서 천둥인지 지둥인지 모르고 지내, 아비 어 미 없이 자란 놈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던 어린 시절이었다. 어머니가 있어 손수 빌어먹지는 않았지만 결국 얻어 온 밥이니 그 게 그것이어 서, 결국 미꾸라짓국 먹고 용트림하는 것이나 무엇이 달랐겠는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용후 같 은 은인 잘 만나 화가랍시고 지금껏 행세하고 살아온 것이 어쩌면, 양반 못 된 것이 장에 가서 호령한 격이나 차이가 없었다. 기래. 그 동안 분수 넘티게 살았디 오원은 음복으로 술 한 병을 꿀 꺽꿀꺽 다 비우고, 다시 읍하여 하직을 고하고는 비척비척 산을 내려왔다. 오원은 고향을 떠나 곧장 장도에 올랐다. 금강산까지 가는 데 얼 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오래 전부터 산자수명한 곳에서 생을 마감 하고 싶엇던 터라, 두려움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황 흘한 기 대감으로 가슴속에 흥분이 잔잔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재령강을 건너기 위해 나룻배를 기다리고 있는데, 방갓을 눌러 쓴 웬 사내 하나가 팔자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몸피는 왜소하 나 눈에 총기가 있어 보였다. 마흔은 훨씬 넘었을 나이였다. '스님께서도 나릇배를 기다리십니까?' 사내는 오원의 차림을 보고 중으로 판단하는 그저 빙그레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님자도 강을 건널 참입네까?' '그렇습니다만... 행선지가 어디신데 강을 건너시는지요?' '금강산에 가는 길이야웨 님자래 어디메로 가십네까?' '정처는 따로 없고... 명산을 만나면 거기가 정처지요. 스님은 금강산 어느 절에 계십니까?' '혜헤. 사실은 중이 아니야요' '스님이 아니라면서 어인 연유로 승복 차림을 하셨습니까?' '기럴 사정이래 있어서, 잠시 변장을 한 것뿐이야워' '꾄장이라... 허면, 금강산에는 무슨 일로 가삽니까?" 순간 이 사내가 혹시 변장한 포졸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갑자기 들었다, 이것저것 소상하게 캐묻는 듯한 태도가 그러했다. '산이래 좋아서 가디요 님자래 산은 와 갑네까?' '글쎄요... 절경을 화폭에 옮겨 볼까 합니다만." '기럼,그림을 그리십네까?' 오원은 그가 포졸이 아니라는 확신에 우선 마음이 놓였고, 또한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에 오랜 벗을 만난 것만큼이나 반갑고 솔깃 하였다. 외로운 나그네길에서 동지를 만난 기쁨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워낙 재주가 없어서 발전이 없소이다. 헌데, 왜 그리 놀라십니까?' '한양에서 오십네까?' '아니, 충청도에서 오는 길이외다.' '님자 함자래 어케 됩네까?' '...김도연이라고 합니다만. 그건 왜 물으십니까?' '반가워서 기럽네다. 실은 나도 그림을 그렸댔시오?' '허면, 존함이...?" '장승업입네다.보잘것없는 이름이외다.' '...방금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장승업이라 했시요 와 기렇게 놀랍네까?' '그럼, 오원 장승업 선생이십니까?' '기렇대두요." '아이구, 몰라뵈었습니다. 인사 받으십시오.' 김도연이 갑자기 봇짐을 벗어던지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끓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경황에 오원 도 엉거주춤 그와 맞절을 하였다. '한양에 장숭업이라는 화백이 계시다는 소문을 들어 한번 찾아 뵙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뵙는군요 이런 광영이 또 있겠습니까.' '쓸쓸한 길에 동지를 만나니까니. 기분이 좋구만요' '헌데, 금강산에는 그저 구경하러 가십니까?' '글쎄올시다. 마음을 비우러 간다면 말이래 되갔는지 모르갔시요.' "저는 여러 해 전에 금강산에 올랐습니다만, 선생님의 그 입성으로는 추워서 견디기 어려울 것 입니다.' '까짓 얼어 죽으면 그만이디요' '얼어 죽다니요.듣기 민망한 말씀입니다. 한양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는데, 포졸들이 방을 붙여 선생님을 잡아들인다는 글귀를 보았 습니다만... 그런 방이 한양에만 붙은 것이 아닙니다. 어인 까 닭인지 궁금했습니다. 선생님 같은 분이 죄를 지으셨을 리는 없고' '헤헤, 죄를 짓기는 졌디요 지체 높은 양반을 속여 도망을 쳤으니까니 큰 죄 아니갔시오?'... 도 망을 치시다니요?' 오원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민영환 집에 머물렀던 당시의 상황을 대충 설명하 였다. 그러자 김도연이 박장대소하며 뜻밖에 즐거워 하는 것이었다. '기렇게도 웃을 일입네까?' '역시 오원 선생님 답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는 한양에 발걸 음을 아니 하셨겠군요' '물론이디요 이나마 변복을 하디 않았다면 꼼짝없이 잡혔을 거이고, 목이래 달아났디요 기래도 민영환 대감한테는 미안한 일입네다.' '그 후로는 민영환 대감의 소식을 듣지 못하셨겠습니다.' '어드렇게 듣갔습네까. 한양 소식이래 까맣게 모르고 있시오' '민영환 대감은 지난 일월에 서양국 여섯 나라 전권공사가 되어, 지금쯤 순방 중에 있을 것입니 다. 그간의 한양 소식을 전해 드리자 면 얼마 전에 주상전하께서 황제로 즉위를 하셨고. 나라 이 름도 조 선에서 대한대한으로 바뀌었습니다.' '기렇습네까? 까맣게 모르고 있었시오' '쫓기시는 몸이니, 오원 선생님의 처지로는 모르실 수밖에요' '내신세가 와 이케 됐는디 알다가도 모르갔시' '사람 운명이란 오묘한 것이니까요' 이때 마침 나릇배가 당도하여 두 사람이 나란히 배에 올랐다. 배 에 오르고서도 김도연은 한양 소식과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던 일 들을 낱낱이 전해 주었다. 동학란이 있었고, 민비를 서인으로 폐하고, 단발령이 내려졌고,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났던 것 등이었다. '머리를 와 자릅네까? 내 경우는 변장하기 위해서 깎았습네다만.' '개화파인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시행한 겁니다. 고종황제께서도 친히 자르신걸요 그러자 관리들이 가위를 들고 다니며 길에 서나 성문을 지키고 있다가 강제로 잘라 버렸습니다. 그래서 유생들이 의병까지 일으켰지요 제 머리를 보시겠습니까?' 김도연이 방갓을 벗어 상투 없는 머리를 보여 주었다. 그러자 원이 걸걸걸 웃으며, 모양 사납다 고 방갓을 얼른 쓰게 하였다, '그 동안 별일이래 많았구만요' '나라가 매우 어지러운 중에 있습니다. 외세가 한꺼번에 몰려온 탓에 백성들이 정신을 차릴 수 가 없습니다. 눈만 뜨면 세상이 달라 지곤 하니까요.' '산 속에 들어가 있으면, 기런 꼴은 보디 않갔구만요' '그렇고말구요' 강을 건너자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오원과 김도연은 주막 을 물어 한참을 걸었다. 가는 길마다 멀고 험하였다. 오원이 내금강 장안사릇안사에 당도했을 때는 깊은 가을이었다. 안악의 주 막 여자와 김도연이 일러 준 것처럼, 해가 지면 몹시 추 웠다. 겨울 채비를 전혀 하지 않아 김도 연 말대로 얼어 죽기 십상 이었다. 그래도 빼어난 경치를 본다는 기쁨에 추위쯤 아랑곳하지 않았 다. 곧 명경대와 망군대, 삼블암, 만폭동 등과 만나리라는 기대 감에 벌써부터 흥분이 전신을 휘 감았다. 장안사 주지를 만나 며칠 머물 것을 청하자 대뜸 호령부터 하였다. '머리는 깎았으되 중놈은 아닌 것 같고... 이놈아. 시주는 아니 하고 절밥을 거저 먹겠다는 말이 더냐?' '가진 거이 있어야 시주를 하디요. 내래 빈 몸이야요.' '염치도 좋구나.네놈 꼴에 부처님도 돌아앉겠다.' '부처님 공양 말고 배고픈 사람 밥 먼저 먹이라는 속담도 있시오.' '꼴에 귓구녕은 있어서 풍월하는구나.' '헤혜. 부처님 자비라는 거이 기런거 아닙네까?' '이름이 무엇인고?' '산 속에 사는 스님이래 속세 사람 이름을 어케 알갔습네까.' '이놈아. 절에 가면 중인 체. 촌에 가면 속인인 체한다는 말도 모 르느냐? 중이란 원래 사통팔 달임을 알아야지. 절이 망하려니까 새우젓 장수가 들어온다더니, 별 개뼉다구 같은 놈이 와서... 냉큼 이름자나 대거라.' '장승업이야요' '속세에서 무슨 짓을 하다 왔어?' '...그림을 그렸댔시오.' '환쟁이로구나.헌데 금강산에는 뭐 하러 왔어?' '금강산이래 좋아서 거저 왔시오' '환쟁이 주제에... 저모립(돼지털로 만든 갓)쓰고 물구나무를 서도 제 멋이라 했겠다. 소금국에 밥은 먹여 줄 터이니, 있고 싶으면 있어.' '고맙습네다. 기런데, 절에는 술이래 없디요?' '이놈이..?' '헤헤...' '이놈아. 젓국도 주랴? 절에 와서 찾을 걸 찾아야지. 감히 술이라... 천하에 불쌍놈이로고 냉큼 속세로 돌아가거라.' '헤헤. 용서하시라요. 술은 달라고 않갔시오' '...불쌍놈.' 이튿날, 오원은 밥 한술 얻어먹고 곧장 명경대로 올라갔다. 동금강천 상류로 올라 황천강 계곡 에 다다르자, 거울처럼 편편 한 암벽 명경대가 하늘을 가로막을 만큼 우뚝 솟아 짙푸른 연못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쳐질 만큼 신비감을 자아 내고 있었다. 절경을 대하는 순간, 오원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늘 이 내려 준 특별한 재주가 아니고는 이와 같은 자연을 그 림으로 재현하기란 불가능하다고 단정하였다. 화가들이 지금까지 그려 온 산 수화는 모두 허망한 것들이었다. 자연의 오묘한 생성을 깨닫지 못 하고 그저 손재주만 부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자연 은 곧 신의 예술품이었다. 아니, 자연이 곧 신일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당연하게 들었다. 자연은 말이 없으면서도 스스로 흘륭 한 예술을 만들어 내고 있음을 깊이 깨달았다. 냇물을 모래로 막을 수 없고. 흥수를 바가지로 퍼낼 수 없고, 하 늘의 무지개는 손으로 잡을 수 없다는 말이 맞구만기 래, 정말 대단 한 예술이야. 오원은 땀에 흠뻑 젖은 승복을 훌훌 벗어 놓고는 멀리 만봉만봉 들을 바라보며 생각나는 대로 시조 한 수를 을었다. 산이 하 높으니 두견이 낮에 울고 물이 하 맑으니 고기를 헤아리로다 백운이 내 벗이라 오락가락 하는구나 오원이 장안사로 돌아오자 주지가 기다렸다는 듯이 뜰을 서성대 고 있었다. 그는 오원을 보자 대뜸 '뭘 보구 왔어?' 하고 비아냥투로 물었다. 명경대에 갔댔시요 정말 절경이야요' '그것밖에 본 것이 없어?' '해 떨어질까 봐 더 있을 수가 없었습네다.' '명경대를 보고 느낀 것이 없었느냐, 물은 것이야.' '감탄하기에 바빠서 다른 생각이래 할 수도 없었시요.' '이놈아. 명경지수 명경지수!' '명경지수...? 기거이 ㅁ네까?' '저런 대가리로 환쟁이 노릇을 하다니.... 명경대를 봤으면 얻 은 것이 있어야 될 게 아니냐. 네 놈의 그 더러운 심보를 씻고 왔어 야지. 네놈이 그림다운 그림을 그리려면 먼저 마음을 맑고 고 요하 게 가져야 되는 거야. 똥밖에 든 것이 없는 마음으로 그림을 아무리 그려 봐라. 구린내나 나 지,' '...옳은 말씀입네다. 허디만. 다시는 그림을 그리디 않을 생각 이야요.' '그건 왜?' '허망한 짓이야요. 그림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조물주래 지어 낸 자연을 뛰어넘을 수 없는 법 입네다. 이 자연 이상 훌륭한 거이 없디요.' '모처럼 옳은 소리 하는구나. 그걸 이제 깨달았어? 그래서 환쟁 이들이란 모두 사위스런 인간들 이지.' '옳게 보셨습네다. 모두 사위스럽디요' 그로부터 닷새 후, 오원은 주지에게 하직을 고하며 망군대로 가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주지가 소금과 꽁보리 주먹밥 세 개를 싸 주었다. '고맙습네다.' '그것이 며칠 양식인 줄이나 알아?' '하루 양식 아닙네까?' '이놈아. 뱃속에 똥이 가득한데, 그걸 하루에 다 먹어?' '기럼 며칠 양식입네까?' '열흘.' '그 동안 굶어 죽갔습네다.' '부처님이 주신 음식이니 하루에 한 입만 베어 먹디 마음을 비우면 그것으로도 배가 터질 만큼 부를 테니까. 망군대에서 천지를 둘러보고, 그 자리에서 죽어도 안타까울 것이 없다는 마음으로 있 어야 해.그래야 네놈이 사람의 구실을 할 수가 있어.' '스님 말씀 명심하갔습네다.' '네놈이 세상에 태어난 해가 언제더냐?' '계묘생입네다,' '계묘생이라... 어서 가. 네놈이 와서 절에 온통 똥냄새가 진동 하고 있어.호랑이도 네놈을 보면 코를 틀어막겠다. 젠장 깨끗한 척하누만, 중놈 뱃속에는 똥이래 없다는 기야? 오원이 백천동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백탑동백탑동을 따라 올라가자 거기에 망군대가 있었다. 하 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암 벽 위에 수십 명이 앉을 수 있는 평평한 바위가 가로놓여 있었다, 사방 경관을 전망하기에는 그만이었다. 내금강의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 그리고 비로봉을 비롯 해서 금강산 줄기를 이루는 연봉견봉 들의 장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당장 죽어도 한이 없갔구만. 여게서 죽고 말디. 기딴 그림이래 꿔 이가. 허무한 기야. 스님 말이래 옳아. 그림이란 모두 사위스 러운기야. 오원은 갑자기 결기가 솟아 옷을 하나썩 하나씩 벗어 버렸다. 그리고는 냅다 소리를 질 렀다. '오원 장승업이래 금강산에서 죽는다아' 오원은 주지가 싸 준 주먹밥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느닷없이 그걸 한 개씩 한 개씩 골짜기에다 던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흘가분하구만. 한 조각 구름과 같은 인생, 밥은 먹어서 뭐 하갔네. 몸에 지닌 것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비로소 편안하 였다. 속세에 묻혀 살면서 그리워하고 흑은 즐거워하고 흑은 슬퍼 하고 옥은 미워하며 지냈던 지난날이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회로 애 락과 오욕칠정이란 결국 인간에게 지워진 업보에 다름이 없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만이 참 다운 삶이라는 진리를 깨달아 가고 있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남은 한 조각 구름이 뜨는 것과 같고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그로부터 닷새가 지난 새벽녘, 장안사 주지가 잠에서 소스라쳐 깨어났다. 이상한 일이로고... 꿈 이 너무 선명하였다. 신통한 꿈도 다 있지. 참으로 신통한 꿈이야. 생긴 것은 꼭 미련 한 곰이더 니,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 관세음보살... 주지는 급히 걸음을 날려 법당으로 들어갔다. 궤에서 비단 한 폭을 꺼내 붓을 들었다. '계묘생 장승업 정유년 십월 십일 승천 이를 부처님 앞에 봉정봉뜨삼가 받들어 올립하고 목탁을 잡았다. 주지의 목탁 소리에 장안사 스님들이 일제히 일어나 합장 배례 하며 법당으로 모여들었다. 주 지의 선도에 따라 스님들 모두가 배례를 거듭하며 오원 장승 업을 높이높이 봉송하였다. 토굴 나으리와 작별하고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오원의 장대한 인생역정에 편승해 있는 동안, 감히 사실의 진위를 따질 수 없을 만큼 노인의 표정과 어조 는 너무 차분하고 진지하였다. 마을 사람들에게 미치광이로 취 급 당하는 인물치고는 그의 입담이 너무 구수하고 언사마다 조리가 있어 사실성에 대해 차마 의 심할 수가 없었다. 노인은 애기하는 도중에 갈증을 풀기 위해 자주 술을 마셨다. 요 즘에도 그런 술이 생산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십수년 전의 한 되 짜리 막소주를 안주도 없이 홀짝홀짝 마셔 댔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두주불사했다던 오원의 피를 이어받은 탓이라 단정해 버렸다. 노인이 나한테도 술잔을 내밀었지만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핑계로 사양하였다. 그의 꾀죄한 몰골 에다가 때가 새까맣게 흐르고 있는 그의 손끝이 꺼림칙해서 차마 받을 수가 없었다. '어르신... 아니, 나으리. 지금까지 들려주신 얘기 모두가 선친 한테 들으신 건가요?' '이런 애기, 어디서 들은 적 있어? 나 아니고는 누구한테도 들을수가 없는 얘기야. 나도 선생한 테 처음으로 털어놓는 것이고, 선생 도 전무후무로 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선친께 들으신 얘기라면, 과연 그렇겠습니다. 그런데도, 너무 감동을 받아서 자꾸 의심이 들지 윌니까.' '후에라도 이 얘기가 사실이 아닌 걸로 밝혀진다면, 그건 내 부친이 잘못 알고 계신 것으로 책 임을 전가할 수밖에 없잖아. 안 그래?' '그렇습니다. 헌데, 오원 선생의 유품은 장차 어찌하시렵니까? 후사가 없으니 이젠 물려줄 수도 없잖습니까.' '왜? 탐이 나서 그래?' '제가 어찌 그런 생각을 가지겠습니까. 제 말씀은 돌아가시기 전에, 박물관 같은 곳에 기증하시 는 것이 좋겠다는 뜻입니다.' '나도 한때 그런 생각을 했었지. 그러나, 오늘 생각이 바뀌었어.' '무슨 말씀이시죠?' 선생한테 넘겨 주고 싶어.' '괜한 말씀이십니다.' '그렇지 않아. 오늘 선생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조부에 대한 얘기가 결국 추측으로만 무성할 뿐이고, 세월이 갈수록 거짓 말만 눈덩이처럼 불어날 테지. 내 속이 얼마나 후련한지 몰 라. 마치 조부한테 빚을 갚은 기분이야. 마침 우리 조부를 연구하는 사람이 라니까, 역사에 제대 로 남겨 주기를 바래.' '그렇게 믿어 주시니, 책임이 무거울 뿐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에 한 약속은 내가 죽기 전에 꼭 지킬 거야.' '...약속이라니요?' '이런... 유품 말이야. '그럼,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었습니까?' '이렇게 답답하기는... 선생까지도 나를 미치광이로 아는거야?' '그럴 리가 있습니까. 너무 뜻밖이라 가슴이 떨려서 그럽니다.' '지금 당장 넘겨 줄 수도 있겠지만 나도 조부에 대해 쓴 선생의 글을 일단 읽어 봐야 되지 않 겠어? 과연 제대로 썼는지 봐야지.' 나는 그의 발상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 동안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오원의 진적 진적과 유품을 갖게 된다는 기쁨보다는 노인의 호쾌한 성품에 놀라 마치 아득한 벼랑으로 추락하는 느낌 이 드 는 것이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덧 다섯 시가 되었다.내내 토굴 속에 갇혀 있 어, 마치 한밤 중에 그와 애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처럼 정신을 깜빡 놓고 있었다. 내가 일어설 채비를 하자 노 인이 입맛을 다시며 아쉬운 표정을 지으면서 몇 시냐고 물었다. 다섯 시라고 하자 그도 체념하는 표정으로 따라 일어섰다. '언제 또 올 수 있어?' '오원 선생에 대한 책이 출판되는 대로 찾아뵙겠습니다.' '그게 언제쯤이야?' '글쎄요...? 어쨌든, 서둘러 쓸 생각입니다.' '죽기 전에는 볼 수 있겠지?' '... 건강이 안 좋으신가요?' '늙은이 목숨은 한치 앞을 모르는 거야.' '아무쪼록 건강하십시오 그리고. 필요한 것을 말씀하시면 다음에 올 때 갖추겠습니다.' '그러고 싶어?' '말씀하시면...' '없어.' '그럼, 술만 가지고 오겠습니다.' '술부터 배워. 나랑 대작할 수 있어야 받어. 사내가 여태 술을 배우지 못했다니 원...' 나는 토굴 앞에서 노인과 작별하고 언덕을 내려왔다. 그는 내가 모퉁이에서 사라질 때까지 네 내 서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콧등 이 저려 왔다. 큰길로 내려오자 저수지를 옳고 날아온 매운 바람이 납작하게 덮드려 있는 눈밭을 휘저어 눈을 온통 나한테 뒤집어씌웠다. 오원 이 금강산 망 군대에 앉아 숭천한 때가 음력 시월이면 마침 요즘이 고, 그때의 금강산 날씨가 지금보다 횔씬 추웠을 것으로 미루어, 그 가 우리 같은 범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초인이었음을 단정 할 수밖에 없었다. 강산 좋은 경을 힘센 이 다툴 양이면 내 힘과 내 분으로 어이하여 얻을쏘냐 진실로 금할 이 없을새 나도 두고 노니노라 . (끝)